[현장에서/김정우 기자] 글로벌 경쟁은 재벌경영도 밀어낸다

기사승인 2016-12-23 18: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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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김정우 기자] 글로벌 경쟁은 재벌경영도 밀어낸다

[쿠키뉴스=김정우 기자] “우리나라 대기업들, 좋은 사업은 다 자기들이 하고 비대해져서 재벌경영으로 가는데 문제가 많지 않습니까?”

한 중소기업 대표가 사적인 자리에서 꺼낸 불만이다. 구체적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대기업 총수들이 대거 증인으로 출석한 지난 국정조사 청문회를 본 소감이었다. 전경련, 삼성 미래전략실 등 재계의 권력 조직이 도마 위에 오르자 살아남기도 바쁜 입장에서 상대적 박탈감에 그간 쌓인 불만을 쏟아낸 것이다. 결국 재벌 해체가 답이라는 결론까지 도달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우리나라 기업 문화와 시장 구조를 볼 때, 이 같은 불만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들고 대기업을 찾아갔다 문전박대를 당한 중소벤처기업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천대받은 아이디어가 미국 실리콘밸리 등으로 넘어가 해외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국내 연구진의 손에서 탄생해 독일 SAP의 핵심 빅데이터 기술이 된 하나(HANA)’ 등이 대표적인 예다.

유수의 기술 인재 유출은 더 큰 문제다. 국내 연구 환경에 한계를 느낀 수많은 과학자가 미국 등 외국행을 택했고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기업들은 IT게임디자인제조업 등 전 업계 인력을 흡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경유착’, ‘경영세습등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국내 대기업의 역량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원천기술 발굴보다 돈 되는사업을 모조리 점령해온 이들이 자신들의 이권보다 국가 경제에 관심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흐름에 직면해 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 장벽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이 다시 비관세 장벽을 치고 자국 산업과 시장을 보호하는 기조를 띠고 있음에도 기술과 시장의 고도화는 막지 못한다.

인력과 자본력이 최대 경쟁력이었던 과거와 달리 뛰어난 기술과 아이디어로 시장을 바꾸는 퍼스트무버’, ‘게임체인저들이 속속 등장한 것이 그 시작이다. 지금은 IT업계의 거인이 된 페이스북부터 테슬라, 우버 등 사례는 너무나 많다.

이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기존 업계도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미래 기술 전반에서 장악력을 높이고 있는 구글, PC에서 시작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까지 진출한 애플, 자율주행전기차 등 첨단 기술 경쟁이 치열한 완성차 업계 등은 변화를 통해 살아남고 있다. 업계 선두주자로 꼽히던 야후, 노키아 등의 패인도 여기에 있다.

세계적인 변화는 국내에도 빠르게 스며들었다. 소비자들은 유튜브로 동영상을 보고 페이스북으로 세계와 소통한다. 넷플릭스 미드에 빠져들고 가성비 좋은 중국산 제품을 직접 구매한다. 기존 시장에 안주하던 국내 서비스들은 외면당했다.

이런 변화는 과거 90년대부터 열창해온 세계화바람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각국의 유력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브랜드 경쟁으로 서열을 형성하고 해외에 공장을 세워 가격 경쟁력을 높이던 수준을 넘어섰다.

대기업인 삼성전자가 소니를,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을, 또 애플이 노키아를, 토요타가 포드를 밀어내던 시절은 글로벌 경쟁의 예선전에 불과했다. 이제 비대해진 덩치를 깎아내고 기술과 아이디어 확보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융합협력 방법을 찾지 못한 기업은 과거보다 훨씬 빨리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 믿던 내수 시장마저 뛰어난 글로벌 서비스로 돌아설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 업계도 변화에 돌입했다. IT 플랫폼을 활용하는 여러 기업들은 IBM의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했다. 통신사는 IoT(사물인터넷)와 미디어 플랫폼으로 눈을 돌렸고 케이블TV까지 글로벌 미디어 기업과 손잡는 등 전통적인 로컬 사업자까지 움직였다. 도태되지 않기 위한 이합집산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 잡은 삼성, 현대자동차 등에도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삼성은 기존 계열사를 매각하고 미래 기술을 갖춘 해외 기업에 대한 M&A에 적극 나섰다. 현대자동차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아우디, BMW 등에서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 과거처럼 부품부터 서비스까지 수직계열화를 통해 사업을 키우는 규모의 경제로만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계급장떼고 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기업들에게 재벌이라는 형태는 비효율적이다. 급성장을 위한 방편은 될 수 있었지만 유동적인 변화에 적합하지 않다.

이를 절감하고 있는 기업들은 스스로 재벌경영을 버릴 수밖에 없다. 억지로 전문 경영인을 내세우라 몰아붙이지 않아도 총수의 경영 역량이 부족하다면 도태되거나 뒷선으로 물러나는 방법뿐이다.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 조직의 효율화 등은 당연한 과정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청문회에서 저보다 나은 인재가 있다면 언제든 다 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의 생존이 자신의 경영권에 우선한다는 의미다. 국정조사라는 무대에서의 전략적 쇼맨십일 수 있지만 이미 변화를 받아들인 비장한 각오의 표현이길 바란다. 이는 비단 삼성뿐 아닌 구태를 청산해야 할 모든 기업이 고민할 문제다.

taj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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