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있는 삶] 다만 편안한 추사고택

기사승인 2017-03-25 09: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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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살아온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은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일대,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던 제주도 대정리의 추사적거지와 추사기념관 그리고 추사가 만년에 살았던 과천의 과필헌과 추사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추사고택은 충천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습니다. 이 일대는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외동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한 이후 마련된 땅입니다. 북으로 용산에서 남쪽 오석산까지 해발 100미터가 채 되지 않는 산줄기가 2킬로미터 남진 이어집니다. 이 산줄기를 뒷담장 삼아 그 동편 자락 아래에 월성위 김한신은 53간의 집을 지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아산만의 바닷물이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을 거스르는 풍경 없이 둥글둥글하고 완만해 편안한 곳입니다.

추사는 이곳 용궁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아니라 한양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추사는 김노영의 큰 아들로 태어나 여덟 살 즈음에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하며 월성위 집안의 종손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추사의 후손들이 살았다던 고택은 당시만 해도 폐허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1970년대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투입되면서 고택이 비록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다시 지어지고 이 일대가 정비되면서 사람들이 찾아와 편안히 추사를 만나고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추사고택은 추사기념관, 추사 묘, 고택, 김한신 묘, 화순옹주 홍문, 그리고 최근 조성된 백송공원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모퉁이를 돌아 400미터가 채 못 되는 곳에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와 그 앞에 추사가 심었다는 오래된 백송이 있습니다.

추사기념관에선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삶을 알려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추사가 이런 사람이라고 애써 설명하려 하지만 보통사람에게 다만 추사는 알기 어려운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추사체의 글씨를 남겼다고 막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의 글씨를 대하면 워낙 다양하고 난해하기까지 해서 어느 형식의 글씨를 추사체라고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합니다. 어떤 글씨는 보기에 따라서는 알 수 없는 기호 또는 암호처럼 보여 최근 한자를 폭 넓게 배우지 않은 이들에게는 바라보기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권의 책을 읽고 그 지식을 가슴에 품고나면 그 추사 글씨에 스며들어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까요.

추사기념관 주변의 이런 저런 조형물들을 살피고 추사의 묘로 향합니다. 추사묘는 단정합니다. 저 아래에 얼핏 엎드려 있는 동물형상의 바위와 잘생긴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 뿌리에서 자란 두 그루의 소나무는 마치 부부가 눈을 맞추듯 마주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에 놀라. 여러 학설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니 한 번 그 미혹에 빠지면 타파할 수 없어 참람하고 망령된 것을 헤아리지 않는다’며 조선 고유의 글씨를 추구하던 원교 이광사에 대해 추상같은 평가를 내렸던 엄격함과 단호함은 이 묘역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여행이 있는 삶] 다만 편안한 추사고택추사고택 대문을 들어서면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주련입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둘러보는데 보이는 나무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고 처마 아래 곳곳에 현판이 보입니다. 이런 저런 곳에서 보았던 추사의 글씨는 거의 다 모였습니다. 추사의 다양한 글씨들을 한 자리에서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한 듯합니다. 주련 아래에 글귀의 한자와 음 그리고 뜻이 적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하나하나 살피며 글자 형태가 어떻게 변형되어 있는지 찾아보아도 좋겠습니다.

안채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추사 영실이 있습니다. 담장 아래 백송은 튼실하지만 아직은 어려서 등걸에 흰색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권돈인의 글씨라는 추사영실 현판을 보고 돌아 나와 보니 안채와 사랑채의 뒤란 처마 아래 툇마루가 정겹습니다.

추사의 증조부 묘역에 이르고 보니 이 부부의 사연에 조금 분위기가 애틋합니다. 영조가 애지중지했던 외동딸 화순옹주는 13살에 동갑의 김한신과 부부의 연을 맺고 25년을 살았습니다. 39살이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뜨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 넘기지 않은 채 지내다가 보름만에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영조는 차마 딸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정조가 보위에 오른 이후 열녀문을 내렸다고 합니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 오른쪽에 화순옹주의 열녀문이 있습니다. 화순옹주는 조선 시대 왕족 중 유일한 열녀였습니다.

화순옹주 홍문 옆엔 새로 백송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면적이지만 추사가 남긴 서예작품을 주제로 한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추사의 글씨를 한 번 더 살필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월이 가면 이곳에서 자라는 많은 백송이 그 흰 등걸의 아름다움으로 그 곁의 조각 작품을 압도할 듯합니다. 공원 뒤로 완만한 동산길을 따라 2킬로미터 남짓 가면 월성위 가문의 원찰이었던 화암사에 이릅니다.

백송공원에서 길모퉁이를 돌아 360미터쯤 가면 추가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가 있습니다. 화순옹주와 결혼한 김한신의 아버지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까닭은 대부분 여기에 자라는 백송을 보기 위함입니다.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와 심었다고 하니 200년쯤 되었습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두 줄기는 고사되었고 한 줄기만 살아남아 그 창연한 흰색 몸통을 뽐내고 있습니다.

화암사는 추사고택이 안겨있는 산줄기의 남쪽 끝에 있는 작은 절입니다. 과거 월성위 가문의 개인사찰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절집 앞에 서면 그 모습이 조금은 낮 설게 보입니다. 양반가의 사랑채 형태의 집에 추사가 남긴 글씨의 주련과 현판들이 붙어 있습니다. 추사가 만년에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비록 모각이지만 볼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유배길에 썼다는 해남 대흥사의 현판 ‘무량수각’과 비교하면 군살이 쏙 빠진 글씨입니다.

절 뒤엔 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습니다. 이곳에 젊은 날의 추사가 글귀를 둘 새겨두었습니다. ‘詩境(시경)’ 그리고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사람들은 이 글씨를 두고 추사가 직접 쓴 글씨라고도 하고 청나라에서 가지고 온 탁본을 그대로 새긴 것이라고도 합니다. 추사가 남겼지만 모를 일입니다.

누구나 추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라서 추사를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글·사진=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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