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푸어가 됐다⑤] "약을 먹었다" 스스로 최면을 건다

기사승인 2017-05-06 0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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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조민규 기자] “약 먹고 밥 먹을 돈 없어 굶어 죽으나, 밥 먹고 약 못 먹어 병들어 죽으나, 뭐가 다르겠어요”

말기 폐암 환자 임지원(57세, 여, 가명)씨의 첫 마디였다. 임씨는 지난 3월 18일부터 약을 먹지 않고 있다. 병이 나아서도 아니고 다른 치료법을 찾아서도 아니고 약값을 감당할 수 없어 약을 끊은 것이니, 정확히는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맞겠다. 

그 동안 홀로 투병 생활을 꾸려온 임씨는 지난 석 달 동안 자비로 먹은 표적항암제를 마지막으로 5년간 힘들게 이어온 폐암 치료를 포기했다. 월 1000만 원에 이르는 약값을 더 이상 부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목숨을 담보로 표적항암제의 급여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2월에 마지막으로 약을 받으면서 결심했다. 이 약을 먹고 돈이 없어 굶어 죽으나, 약 못 먹어 죽으나 뭐가 다르나. 지난 17일 아침에 마지막 남은 약을 먹었고,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는다. 매일 아침마다 약을 먹는 대신 가슴을 치며 말한다, ‘오늘 약 먹었다, 나는 다 나았다’ 하고…”

임씨는 2012년 12월 종합검진을 통해 폐암을 진단 받았다. 검사를 한 병원에서 다시 한 번 엑스레이를 찍어보자는 연락이 왔고, 약 한달 후 임씨는 인근 대학병원에서 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제 갓 50을 넘긴 나이였고,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20대의 두 딸이 있는 임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임씨는 검사 결과 EGFR라는 유전자 변이가 확인되어 표적항암제를 먹을 수 있었다. 표적항암제는 참으로 신통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찍은 가슴 사진에서 암 덩이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별다른 부작용 없이 컨디션도 좋았고, 곧 다 나을 것 같은 희망이 절로 생겼다. 

“이레사를 처음 먹을 때는, 하루가 다르게 암이 내 몸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매일 산에 오르면서, 나도 완치라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약 1년 후 더 이상 표적항암제가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약에 대한 내성으로 또 다른 암 변이가 생긴 것이다. 치료 시작하고 11개월만이다.

2차 암이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내성 암은 최근까지만 해도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2013년 말 임씨는 화학치료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화학치료는 암을 억제하기 위해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표적항암제와 달리 전신에 작용한다.

하지만 화학치료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이후 쓸 수 있는 모든 약을 모두 다 쓰면서 2년을 넘게 버텼다. 폐암으로 5년, 지금까지 산 것도 기적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한다.

임씨는 치료 시작 후 1년도 되지 않아 내성이 생겼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행운이라며, 주치의에 대한 믿음이 치료를 견디게 하는 큰 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치의 선생님을 만난 지 5년째다. 단 한 번도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화학치료가 말을 안 듣자 그 때 타쎄바와 지오트립을 먹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고민하고, 언제나 작은 확률이라도 열어두고 진료해 주셨다”고 말했다

2016년 4월 주치의는 임씨에게 임상시험 참여를 제안했고,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나 치료가 없었기에 마지막 희망으로 임상시험에 도전했다. 

타그리소라는 폐암신약은 초기에 임씨가 치료받았던 이레사나 타쎄바와 같은 약을 먹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내성 암에 효과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임씨는 T790M이라는 변이가 발견되지 않아 타그리소 치료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대신 화학치료를 받는 대조군으로 임상시험에 참여하게 됐다.

그렇게 서울의 대학병원에 입원한 임씨는 한 달에 두 번, 화학항암치료를 받았다. 첫 번째 화학치료 후, 극심한 숨가쁨과 구토 증상이 나타났다. 이전에도 화학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부작용을 겪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 번째 치료를 받았을 때는 속에서 피가 나왔다. 결국 임씨는 임상 참여를 중단했다.

“대구에 계시는 주치의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울며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그 길로 내려가 폐 사진을 찍어보니 가슴 전체에 암이 퍼졌더라. 한 번도 흉수가 찬적은 없었는데, 폐 전체가 흉수와 암으로 덮여있었다. 아직 시집 보내지 않은 혼기가 꽉 찬 둘째 딸이 생각났다”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늘 희망을 걸고 임씨를 응원해왔던 주치의도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 가을이 됐다. 임씨는 “항암제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먹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어 그저 식욕촉진제로 연명할 뿐이었다”며, 죽음 직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벼랑 끝에서 찾은 희망이 석 달 후 절망으로… “부자만 치료받을 수 있는 나라”= 겨울을 앞둔 어느 날 임씨는 주치의로부터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유전자 검사를 해보자는 권유를 받았고, 별다른 기대 없이 응했던 검사에서 T790M 변이가 확인됐다. 

“정확하게 기억한다. 1월 5일이었다. 검사결과를 보자마자 교수님이 ‘이제 살았다!’ 외치셨다. 나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하지만 약이 비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타그리소 28일치를 처방 받고 외래에서 수납을 하는데 1000만원이 넘는 돈이 전액 자기부담으로 찍혀 있었다. 그 때부터 기대보다 걱정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타그리소를 먹고 난 후 임씨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흉수가 없어지면서 무거운 돌이 누르고 있는 것 같았던 가슴도 한결 홀가분해졌다. 몸 구석구석 피가 돌고 힘이 뻗는 것 같았다. 움직이는 것도 수월해져 3월에는 산행도 다녀왔다.

몸이 가벼워질수록 마음은 무거워졌다. 두 번째 처방을 받던 날, 마음속에는 확실히 걱정이 더 커져 있었다. 걱정보다는 좌절이었다. 

임씨는 “먹으면 살 수 있는 약이 있는데, 내가 이걸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까. 하루하루 건강해지는 기쁨과 다음 달 약값에 대한 불안이 하루에도 수백 번 마음을 오갔다”며 심정을 전했다.

그리고 3월 17일 아침 임씨는 마지막 남은 약을 먹었다. 약을 삼키고 빈 약봉지를 손에 들고 있을 때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암환자의 보험급여를 결정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병에 걸린 것이 억울했고, 그 다음엔 내가 부자가 아닌 것이 화가 났다. 그렇지만 그 다음엔 돈 없는 사람들은 약도 못 먹게 하는 이 나라가 원망스러웠다. 우리나라는 부자들만 살 수 있구나…” “약 안 먹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4월 안에 보험 안되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메디컬푸어가 됐다⑤]
임씨는 “교수님께 여쭤봤다. ‘타그리소 안 먹고 제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했더니, ‘글쎄요, 한 달 정도.’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럼 4월 안에 보험이 안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거냐. 아직 작은 딸 시집도 보내야 하고, 큰 딸 손자도 봐줘야 하고 할 일이 남았는데… 한 달 안에 타그리소가 보험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

임씨는 요즘 TV 뉴스를 보며 억하심정에 더욱 기운이 빠진다고 했다. 그는 “뉴스에 보니 건강보험 재정이 흑자라고 잘했다고 칭찬하더라. 그 돈으로 나 같은 환자들 보험 해 주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나, 그러려고 만든 제도 아닌가. 국민이 다 죽은 후에 보험재정 흑자가 무슨 소용이겠나”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임씨는 오늘 아침에도 ‘오늘 약 먹었다’ 최면을 걸며 암 세포가 그 최면에 속기를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하는 하루도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다. 임씨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혹시라도 들려올지 모르는 타그리소의 급여소식을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다. kio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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