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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⑩ 16년간 연락 없는 외교부…"우리가 귀찮은 존재인가"

[쿠키뉴스 특별기획]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민수미 기자입력 : 2017.09.12 05:30:00 | 수정 : 2017.09.12 21:12:51

[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어떤 상처는 대를 잇기도 한다. 일제 강제동원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렇다. 한영용(75)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회 회장도 그들 중 한 명이다. 1945년 8월24일, 일본 아오모리현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가 교토부 마이즈루만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한 회장의 아버지 고(故) 한석희(당시 27세)씨도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다. 배 안에서 비극을 맞아야 했던 여러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한씨의 억울했던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시 한 회장의 나이는 세 살. 홀로 남은 스물다섯의 모친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남들 두 배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시련은 어린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일이 없었다. 한 회장은 이른 나이에 일을 시작해야 했다. 배를 곯는 날도 허다했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했다. 서러움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꿈에서나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야겠다.’ 한 회장은 결심했다.

아버지의 자취를 더듬기 시작했다. 한 회장은 생전 아버지의 모습을 어렵게 전해 들었다. 함께 강제 동원된 먼 친척을 통해서다. 한 회장의 아버지는 비행기 격납고에서 노역을 했다고 한다. 맨몸으로 땅굴을 파야 했는데, 일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을 ‘해저 기뢰’로 결론지었다. 총 승선 인원은 3725명. 이 중 사망자 수는 524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배 안에 적어도 7000명에서 1만2000명까지 있었다고 회고한다. 사고 직후 일본 정부가 만든 승선자 명단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한 회장의 아버지 한씨도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단에 없다. 배와 함께 침몰하던 그를 본 목격자가 있음에도 말이다.

법의 힘을 빌려야 했다. 우키시마호 생존자와 희생자 유족은 1992년 이래 3차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싸움은 길었다. 그리고 2003년 5월 일본 오사카 고등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우키시마호 운항은 국가 치안상 이유에 의한 군사적 조처이기 때문에 안전 수송 의무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한 회장과 희생자 유족회는 사비들 들여 2012년 일본으로 떠났다. 바닷속에 잠겨있을 유해와 선체 잔해 발굴 작업을 위해서였다. 잠수부 2명이 이틀간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펄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성과는 없었다.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기도 쉽지 않았다. 일본 항만청과 해안경비대, 어업협동조합을 통해 잠수허가를 받고 현지 작업용 선박을 빌려야 했다. 우리 정부는 없었다. 유가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다.

물론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도 여러 차례. 한 회장은 2001년 당시 외교통상부에 우키시마호 관련 자료 조사 및 사망 인정서 재교부 요청을 민원으로 제출했다. 돌아온 답변은 간단했다. “현재 주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정부에 협조를 요청해 놓은 상태이며,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무려 16년이 흘렀다. 외교통상부는 한 회장에게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국민 신문고도 수도 없이 두드렸지만, 모두 같은 대답이었다. ‘우키시마호 재조사는 힘들다’ ‘외교 문제와 연결돼 정부의 관여가 쉽지 않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한 회장은 절실하다. “유가족들은 유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라도 정부에서 나섰으면 좋겠다.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작은 해결 의지 한 번 보인 적 없다. 유가족들이, 혹은 사회단체가 나서지 않았다면 아무런 수확도 없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를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강제동원 피해자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다.” 

민수미, 박효상 기자 min@kukinews.com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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