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기획] 드라마는 영포티(Young Forty)의 환상을 파는가

기사승인 2018-02-1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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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기획] 드라마는 영포티(Young Forty)의 환상을 파는가

오빠들이 아저씨가 됐다. 최근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는 남자 배우들의 연령대가 높아지는 추세다. 반면 여자 배우들의 연령대는 낮아졌다. 자연스럽게 남녀 배우의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으로 벌어졌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초 방송된 드라마들만 살펴봐도 이 같은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KBS2 ‘황금빛 내인생’의 박시후-신혜선은 12세, OCN ‘블랙’의 송승헌-고아라는 13세, SBS ‘이판사판’의 연우진-박은빈은 8세, JTBC ‘언터처블’의 진구-정은지는 13세, MBC ‘투깝스’의 조정석-이혜리는 14세,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박해수-정수정은 13세, MBC ‘돈꽃’의 장혁-박세영은 12세, KBS2 ‘흑기사’의 김래원-신세경은 9세, KBS2 ‘라디오 로맨스’의 윤두준-김소현은 10세의 나이 차이를 보였다. 최근 드라마 제작발표회,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지 몰랐다”, “나이 차이 느끼지 못했다”는 배우들의 해명이 자주 들리는 이유다.

남자 배우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여자 배우들의 연령대가 낮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아홉 편의 드라마 중 윤두준을 제외하면 남자 배우들은 대부분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이다. 여자 배우들은 박세영, 신혜선을 제외하면 모두 20대다.

단순한 나이 차이의 문제는 아니다. 나이 많은 남자의 가부장적인 모습, 나이 어린 여성의 수동적인 모습이 쉽게 그려지는 것이 문제다. 현재 사라지고 있는 가부장제의 고정된 성역할을 드라마가 재생산,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가 영포티(Young Forty, 나이에 비해 젊게 살고 싶어 하는 40대를 뜻하는 신조어)의 환상을 키우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앞서 언급한 아홉 편의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로맨스는 대부분 아는 것이 많거나 능력 있는 남성과 세상살이에 서툴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거칠게 대하는 장면도 다수 등장한다. 처음엔 제 할 말을 하던 여자 주인공들도 남자 주인공의 재력과 힘에 결국 설득되는 구도로 흘러간다.

‘흑기사’에선 가난과 불운으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신세경에게 많은 돈을 가진 김래원이 손을 내민다. 도움 없이 살 수 있다는 신세경에게 김래원은 무상으로 자신의 큰 집을 제공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 돕는다. ‘황금빛 내인생’에선 재벌 3세 박시후와 ‘흙수저’를 대변하는 신혜선의 로맨스가 펼쳐지고, ‘투깝스’의 형사 조정석은 방송기자 이혜리를 대놓고 무시한다. ‘라디오 로맨스’에선 화려한 톱스타 윤두준이 자신의 스케줄을 위해 한 겨울에 호수로 수십 번 뛰어드는 라디오작가 김소현을 지켜만 보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물론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여자 배우들이 활약하는 드라마도 있다. MBC ‘병원선’이 대표적이다. 하지원은 열세 살 연하의 강민혁, 열아홉 살 연하의 이서원과 삼각 로맨스를 펼친 바 있다. SBS ‘다시 만난 세계’의 이연희-여진구, KBS2 ‘고백부부’의 장나라-손호준, SBS ‘사랑의 온도’의 서현진-양세종, KBS2 ‘마녀의 법정’의 정려원-윤현민도 연상의 여자 배우-연하 남자 배우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여자 배우가 연상인 드라마는 남자 배우가 연상인 드라마의 숫자에 비해 현저히 적게 제작되고 있다. 능력 있고 강한 힘을 가진 여자 주인공이 수동적인 남자 주인공을 돕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남녀 비중이 동등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30~40대 여자 배우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로맨스보다 일과 육아에 집중하는 여성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현재 방송 중인 SBS ‘리턴’과 tvN ‘마더’, JTBC ‘미스티’는 40대 여자 배우를 원톱 주연으로 내세웠지만, 남자 주인공과의 로맨스는 없다. ‘마더’의 이보영은 모성애를 보여주고, ‘미스티’의 김남주는 일에 바쁘다. ‘리턴’의 고현정은 남자 배우들에 밀려 적은 분량을 소화하다가 하차했다. 일과 사랑을 모두 거머쥐는 여성의 이야기는 그려지지 않는다.

이 같은 문제는 앞으로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젠 40대 남성과 20대 여성의 로맨스를 다루는 드라마, 영화가 연이어 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달 첫 방송을 앞둔 tvN ‘나의 아저씨’와 올해 방송 예정인 ‘미스터 션샤인’이 대표적이다. ‘나의 아저씨’는 tvN ‘또 오해영’의 박해영 작가와 tvN ‘미생’, ‘시그널’의 김원석 PD가 만난 화제작이다. ‘미스터 션샤인’ 역시 KBS2 ‘태양의 후예’와 tvN ‘도깨비’를 연속 흥행시킨 김은숙 작가-이응복 PD의 세 번째 작품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는 18세 차이의 이선균-아이유를, ‘미스터 션샤인’은 20세 차이의 이병헌-김태리를 주연으로 캐스팅해 논란을 예고했다.

나이 차이 뿐 아니라 내용으로 영포티 마케팅을 펼치는 영화도 있다. ‘레슬러’(감독 김대웅)는 왕년의 레슬러인 아버지(유해진)와 촉망받는 레슬링 유망주인 아들(김민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레슬러’는 극 중에서 아들의 여자친구(이성경)가 친구 아버지(유해진)을 짝사랑하는 내용을 그릴 예정이다. 유해진과 이성경의 나이 차 역시 20세다.

다양한 소재를 갖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드라마, 영화 제작자의 고유 권한이다. 무슨 이야기든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재 제작되는 드라마, 영화들은 정말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걸까.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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