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갈 병원이 없다

피해자에 '응급피임약' 처방않는 성폭력 전담 병원, '고소' 해야만 도움주는 원스톱 센터…2차 피해 속앓이

기사승인 2018-02-24 0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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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갈 병원이 없다성폭력 피해자는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까.

미투 운동(#Me too)으로 성폭력 피해 고발이 잇따르고 있지만, 정작 성폭력 피해자의 의료 접근성은 턱없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3일 복수의 성폭력 전문 상담가들은 한 목소리로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할 의료기관이 태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성폭행(강간) 피해 이후에는 가능한 한 72시간 내로 증거를 채취하고, 피임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물이 소실되고, 임신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가족부가 지정하는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조차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지어 종교적인 사유로 성폭력 피해 여성에 응급(사후)피임약 처방을 거부하는 몇몇 병원도 버젓이 ‘전담 의료기관’ 타이틀을 내세우고 있었다.

경기도의 모 대학병원의 경우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성폭력 피해자를 구제하는 ‘해바라기센터’를 위탁 운영 중이다. 그런데 이 병원은 종교적 사유로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으며, 강간으로 인한 낙태 시술도 하지 않는 곳이다. 종교인인 병원장이 센터장으로 있다.

해당 해바라기센터 관계자는 “병원에서는 종교특성상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는다. 센터로 이관돼 상담을 받고 강간피해를 신고(고소), 증거채취를 진행해 피해가 확인된 분에게는 처방할 수 있다. 강간 낙태는 하지 않고 다른 병원에 연계한다”고 말했다.

종교적인 사유가 아니더라도 성폭력 피해자들을 반기는 의료기관은 드물다. 수익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하고, 자칫 불법 낙태로 연루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안양 지역의 경우 지난해까지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이 2곳이었지만, 최근 1곳이 전담기관 지정 취소를 요청했다.

안양여성의전화 관계자는 “병원들이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려는 의지가 크지 않다. 수익사업은 아닌데 제반 과정이 많아 부담스러워 한다. 1곳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해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매년 1천 건 이상의 성폭력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신혜정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폭력 전담 의료기관’을 활용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성폭력 사건에 감수성이 있는 병원으로 안내한다”며 “의료기관이 성폭력 피해자에 방어적으로 나오는 근본원인은 낙태죄를 적용해 처벌받게 하는 큰 시스템일 것”이라고 평했다. 

여성가족부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해바라기센터, 여성긴급전화 1366 등을 운영·지원하고 있지만, 성폭력 피해자에 요구하는 바가 까다로워 실질적인 도움은 부족한 상황이다. 또 앞서 지적한대로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은희 상담가는 “해바라기센터는 ‘원스톱’을 표방하지만 제약이 크다. 피해자가 고소를 결정한 경우가 아니면 증거채취, 사후피임약 제공을 해주지 않는다”며 “당장 고소할 마음이 없더라도 방문 시 증거채취를 해두면 나중에 고소할 용기가 생겼을 때 도움이 되는데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민간상담기관으로 다시 오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소송과정은 고단하지만, 처벌이 보장되지않고,  그 수준도 높지 않다. 또 가해자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악용해 보복성으로 고소로 맞서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 입을 다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번지는 미투운동에서는 학교, 직장 등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침묵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사례가 잇따라 터져나오고 있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에도 불구하고 , 해바라기센터 등의 도움은 받기 어려웠다.

이와 관련 여성가족부 권익지원과 담당자는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은 희망하는 의료기관과 보건소를 대상으로 일정 기준에 부합하면 지정한다”며 “일부 전담 병원이 종교적 이유로 응급피임약 처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 사안이다. 확인해보겠다”고 답했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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