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기획] 성폭력 피해자 두 번 울리는 ‘2차 가해’

기사승인 2018-03-05 0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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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기획] 성폭력 피해자 두 번 울리는 ‘2차 가해’

사례 1. “본인이 피해자라고 추정되는 사람들한테 연락을 한 것 같아요. 그때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데 이제 와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 싶고… 가장 먼저는 무서웠어요. 더 이상 그 사람 목소리 들을 자신도 없고 그냥 본인이 했던 일에 대해서 인정하고 저에게 직접 사과하기보다는 공개적으로 자숙하고 반성하겠다는 모습만 보여줘도 (될 것 같아요).” - MBC가 보도한 사진작가 로타에게 성폭력을 당항 피해자 제보

사례 2. “2001년까지 여성분과 사귀는 관계였고, 그해 가을 있었던 다른 일로 헤어지게 됐다. 여성분이 저와의 만남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 하였고, 그와 같은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립니다. 당시 저는 배우자와 사별한지 오래되어 서로간의 호감의 정도를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였고, 이에 대한 비난은 달게 받겠습니다” -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김태훈 교수 해명글

사례 3. “그는 여자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이번 사건은 아주 오래전 일이고 저는 오달수라는 사람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오달수씨가 진짜 그런 짓을 했다면 저는 그 누구보다 큰 실망을 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직접 담당한 3개월 그리고 같은 회사에서 격은 긴 시간동안의 오달수라는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배우의 어두운 모습을 보기 싫고 아니라고 믿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 오달수 前 매니저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


‘미투(Me Too) 운동’에 동참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또 한 번 폭력을 당하고 있다. 이들을 향한 ‘2차 가해’가 연일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익명 피해자들의 폭로를 부인해서 실명을 공개하게 만드는 건 물론, 직접 여러 번 전화를 걸거나 연인 관계로 치부하기도 한다. 피해자들은 폭로 이후에도 같은 상처와 고통을 반복해서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도 문제다. 정작 2차 가해에 동참한 이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 2차 가해 방식도 가지각색

2차 가해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가장 많은 유형은 성폭력 가해 당사자가 사건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폭로 직후 배우 조민기가 소속사를 통해 “명백한 루머”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바로 다음날 조민기의 반응에 분노한 청주대학교 연극학과 학생들의 폭로가 쏟아졌다. 현재 경찰은 10여명에 이르는 피해자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가해자들이 사건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신을 폭로한 피해자들이 익명으로 제보하거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 인터뷰하는 등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한 폭로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태도에 피해자들은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JTBC ‘뉴스룸’에서 오달수의 성폭행 사실을 고발한 배우 엄지영이 대표적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오달수의 첫 번째 사과문 기사에 단순 연애사건을 부풀린 것 아니냐며 엄지영을 향해 공격적인 댓글을 쏟아냈다. 오달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 대신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했다면, 엄지영은 TV에 출연해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해야 했을까.

사과문, 기자회견 등을 통해 ‘셀프 면죄부’를 주거나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자신의 잘못을 축소하는 경우도 많다. 연극 연출가 이윤택이 대표적이다. 성추행 사실을 시인한 이윤택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 선언까지 했지만 끝까지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고 버텼다.

이 기자회견은 그의 제자인 배우 오동식을 통해 사전 리허설까지 치러진 쇼였음이 밝혀졌다. 이후에도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냈고 여러 건의 폭로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윤택은 묵묵부답이다. 한 번의 사과 이후 피해자들을 마주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피해자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연락을 반복하는 이도 있다. 사진작가 로타의 경우가 그랬다. 로타는 익명의 제보자에 의한 성추행 폭로에 대해 “촬영 중 모델의 동의를 구했고, 당시에 아무 문제 제기가 없었다”고 부인했다. 이후 자신의 성추행이 밝혀지자 피해자로 추정되는 모델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여러 차례 문자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세종대 김태훈 교수나 오달수처럼 사귀는 연인 관계였다는 해명하는 경우도 있다. 또 오달수 前 매니저처럼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감싸는 경우도 있다. 모두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드러낸 사례다.


△ 누구나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

2010년 여성가족부가 발간한 ‘성폭력 가해자 교정·치료 프로그램 매뉴얼’에는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일반적인 성폭행과 다르다며 강간범과 자신을 차별화하려고 시도하고, 자신의 성폭력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2차 가해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과거 사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폭로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2차 가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이유로 자신과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김현지 활동가는 “성폭력을 어떤 것으로 인식하느냐의 문제”라며 “성폭력 가해자도 성폭력을 흉악범이 저지르는 특별한 폭력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행동을 호감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거친 성관계 정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차 가해를 막기 위해선 성폭력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김 활동가는 “성폭력 피해자는 사건 이후 항상 슬퍼하고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성폭력을 바라보는 인식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여성이 조심해야 하고 몸단속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폭력 예방 교육도 문제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주변에서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하거나 공격적인 말을 하면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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