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미투 운동 그 후가 더 중요하다

기사승인 2018-03-18 13: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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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투 운동 그 후가 더 중요하다글·성신여자대학교 심리학과 채규만 명예교수(전 한국임상심리학회 회장)

[쿠키 칼럼] 최근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미투 운동이 벌어지며 성피해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안 해 본 남자는 있어도 안 당해본 여자는 없다는 누군가의 말을 이번 미투 운동의 확산에서 절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번 미투 운동은 사건을 폭로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된다.

필자는 1996년 한국에 귀국하면서 한국여성상담센터에 성피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치료를 한국에 처음 도입해 지난 30년간 성피해 여성들이 정상적인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며 살아왔다.

많은 성피해 여성은 사건을 폭로하고 난 이후, 사건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몇 년이 지나도 사건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고, 사건에 대해 문득문득 생각이 나면서 일상생활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달아 오른 미투 운동 이후에, 우리가 이 여성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지지할 것인지, 그리고 치료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도와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꼭 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피해 여성들은 사건에 대한 분노 및 죄책감, 후회 등 다양한 복합적인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꼬여, 그것을 풀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치유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심리치료가 포함돼야 하며, 성피해 여성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더 이상의 상처를 받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도 최근 약물치료의 한계를 인지해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 심리치료를 건강보험에서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편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시기가 늦은 감이 있지만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개편안으로 인해 성피해 여성들이 장기간 받아야 하는 지지와 치유의 과정을 제대로 받고, 제 삶을 살게 도와주고, OECD 국가 중에서 높은 우리나라의 자살률을 낮추는 등 삶의 질이 높아졌으면 하는 강한 소망을 가져 본다.

그렇지만 이번 개편안을 통해 가장 대표적으로 하는 심리치료이며, 근거가 가장 단단한 인지행동치료 시행주체에서 그 동안 이 영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해온 정신건강임상심리사들이 배제됐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 인지행동치료 시행 주체를 현 개편안에서 정신건강의학과와 신경과 의사로 한정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강력 반대한다.

첫 번째, 정신과 의사와 신경과 의사는 공식 수련 과정에서 충분한 인지행동치료 수련을 받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국가에서 공인한 정신건강임상심리사들은 석사과정 2년 중에 인지치료와 행동치료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여 실습 위주의 학습을 하고 있고, 최소 2~3년의 수련 기간 동안 인지행동치료를 포함한 다양한 치료기법을 실습하고 슈퍼비전을 받고 있다.

또한, 정신건강임상심리사들은 인지행동치료를 필수로 수련을 받아야지만 자격증 취득이 가능하다. 현재 개편안대로 시행이 될 경우, 성피해 여성들은 훈련이 미흡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신경과 전문의들에게만 인지행동치료를 받을 수 있다. 특별한 민감성이 필요한 피해자들에게 인지행동치료에서 배우는 공감과 지지, 그리고 의사소통 방법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의사들은 자칫 이미 상처난 이들에게 2차적 피해를 줄 수 있는 여지가 커 보인다.

두 번째, 인지행동치료 수가를 제정하거나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지난 20여년간 OECD 권고안에 따라 정신건강전문요원으로 활동한 정신건강임상심리사를 아무런 근거나 사전 논의 없이 배제해 버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충분한 논의 없는 강행은 특정한 집단이기주의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어 실망스럽고 당혹스럽다.

정신건강의학과 및 신경과 의사들이 실제 환자들의 약물치료를 하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인지행동치료를 한다는 것은 현장에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환자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인적자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별한 관심과 인지행동치료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가 필요한 성피해 여성들의 치료를 정신건강의학과 및 신경과 의사 본인들이 실제로 모두 수행할 수 없으면서도 타 전문가를 배제하는 것은 특정 전문가 집단의 만행이다.

세 번째, 인지행동치료를 특정 정신건강의학과 및 신경과 의사들에게만 한정하는 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에만 해당된다. 즉 미국을 비롯해서 일본, 유럽은 인지행동치료를 임상심리전문가들이 당연히 관여하고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인지행동치료를 정신건강의학과 및 신경과 의사들의 독점물로 여기고 개편안을 시행하려는 발상은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처사이다.

지금은 직역의 이기주의를 주장할 때가 아니라, 모든 직역들이 협력해 어떻게 하면 성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은 수많은 여성들을 가장 잘 치료를 해줄 것인지 논의를 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일부 의사가 언론 기고에서 이번 개편안과 관련 “상담전문가 다수의 이력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대부분 심리학과 관련된 어떤 전문적인 학위 과정도 밟지 않고 몇 시간짜리 강의를 이수한 뒤에 60점 이상을 취득하면 자격증을 받는다”라고 하면서 심리상담가 전체를 왜곡 및 폄하하고 의사들만이 심리치료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임상심리전문가 집단이나 인지행동전문가 집단까지도 왜곡하는 글이어서 이분이 대한한국에 살고 있긴 하나,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심리치료는 인간의 영혼과 생명을 다루는 아주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한국임상심리학회에서는 임상심리전문가를 석사 과정을 포함하여 평균 5년간의 교육과 훈련, 슈퍼비전을 통한 도제식으로 양성하고 있다. 필자 역시도 지난 30년간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심리치료에 참여하며 이런 부분을 항상 강조해왔다. 심리치료란 시간을 채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사람만 치료하더라도 최대한 성의 있고 소중하게 경청을 하여, 상처 난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주는 과정이다.

아직 미투 운동은 계속되고 있고, 그 동안 입을 닫고 있었던 더 많은 피해자들은 입을 열 것이다. 지금은 정신건강영역간의 갈등이 아닌 모든 영역들이 힘을 합쳐 그들을 지지하고 도와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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