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간호사는 없다"…'열악한 시스템 고쳐라' 간호사들 성토

기사승인 2018-03-26 11:3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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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좋은 간호사가 아니었습니다.”

설 연휴 투신한 故 박선욱 서울아산병원 간호사를 기리는 두 번째 추모집회가 지난 24일 서울아산병원 앞 성내천 다리 부근에서 간호사연대와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 주최로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간호사들은 ‘간호사 1인당 적정 환자수를 법제화 해 달라’며 한 목소리로 촉구했다.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해 간호사들이 태움의 피해자 또는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날 집회에서 발언에 나선 간호사 A씨는 “가해자 입장에서 말해보겠다”며 “저는 좋은 선배 간호사가 아니었다. 저와 친근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후배 간호사를 사소한 이유로 야단치며 째려보기도 하였고, 한번 알려줬는데 왜 또 묻냐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A씨는 “다시 병동으로 돌아가도 자신은 좋은 간호사가 될 수 없다”며 “개인의 품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두 사람이 할 일을 한 사람에게 떠안기는 구조적인 원인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형병원 중환자실에서 7년차로 일하다 사직한 B씨는 자신을 ‘방관자’였다고 말했다.

B씨는 “나는 절대 저런 선배가 되지 말자는 생각으로 버티며 7년차가 되었고 태움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태움을 당하는 후배 간호사들을 지켜줄 수 없었고 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며 ”그런 제 자신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고 임상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B씨는 “간호사 인력이 부족해 업무강도는 올라가고, 환자 보호자·의사의 폭언과 폭행, 성희롱, 응급상황에서의 스트레스, 긴장감 등이 자꾸 간호사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여기에 병원 인증, 신규간호사 교육 등을 일을 던져준다”며 “벼랑 끝에 서있다 밀려 떨어질뻔한 간호사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더니 너 왜 화를 내냐며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간다”고 탄식했다.

또 다른 발언자 C씨는 본인을 ‘웹디자이너’로 소개했다. 그는 12년 전 간호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C씨는 “14년 전 지방의 한 중소병원에서 일할 당시 저는 간호사 1명이 35명 이상의 입원한 환자를 맡으면서 비어있는 응급실에 환자가 도착하면 뛰어가서 응급실 업무까지 봐야했던 과중한 업무를 맡았다”며 “의사의 성추행, 간호사의 수가 작아 제대로 간호가 이루어지지 않자 화가 났던 보호자의 칼부림 사건 등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퇴사 직전에는 많은 간호사들의 응급사직, 갑작스러운 환자의 사망, 간호사의 수가 부족해 2교대를 하는 등, 무기력한 상황이 되풀이돼 여러 차례 자살충동을 느끼다가 도망치듯이 간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고 고백했다.

C씨는 “저의 힘들었던 경험은 저만의 일이 아니었다. 경력이 단절된 많은 간호사들도 예민하거나 나약해서 그만두게 된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혹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만뒀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병원이 잘못되었고 법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이날 추모집회에서 간호사들은 故 박선욱 간호사의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산재인정·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하고, 간호계 태움, 인력부족 등의 문제가 조속히 해결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앞서 19일 서울송파경찰서는 박선욱 간호사의 태움 의혹에 대한 수사를 ‘혐의없음’으로 종결했다. 경찰은 유족과 남자친구, 동료 간호사 등 17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하고, 박씨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병원 폐쇄회로(CC)TV 영상을 분석한 결과 폭행·모욕·가혹행위 등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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