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위협·고강도 제재’ 얽히고설킨 북·미…트럼프·김정은 ‘70년 매듭’ 풀까

기사승인 2018-06-12 0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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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1일 오전 싱가포르에서 ‘세기의 만남’을 가진다. 북·미는 지난 70년간의 앙금을 풀고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까.

북한은 지난 1948년 정부 수립 선언 당시부터 미국과 삐걱대는 관계로 출발했다. 광복 이후 남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북한은 한반도 전 지역에서 치르기로 한 선거를 거부했다. 이에 38선 이남에서만 선거가 진행됐고, 남측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북한은 1달 뒤인 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주장했다. 이후 2년 뒤인 지난 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을 도와 참전했던 미국은 북측 지역에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34발의 원자탄 사용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됐다. 일각에서는 이때 핵 위협을 느낀 고(故) 김일성 북한 주석이 지난 56년부터 핵 개발에 힘을 쏟았다는 분석을 내놨다.

북·미 갈등은 지난 68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재차 표면화됐다. 북한이 동해상 원산 앞바다에 있던 미 해군 첩보선 푸에블로호를 공격, 강제 나포한 것이다. 승조원 83명 중 1명이 나포 도중 총격으로 사망하고, 82명이 북한에 11개월가량 억류됐다. 승조원들은 이후 모두 송환됐지만, 푸에블로호는 북한에 남아 전시됐다. 지난 76년에는 판문점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군은 공동경비구역에서 시계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하던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이에 미국 측은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 등의 병력을 한반도에 동원,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후 북한이 ‘유감 성명’을 발표하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북·미관계가 늘 갈등을 빚었던 것은 아니다. 냉전이 종식되고 관계 개선 기회가 찾아왔다.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91년 “전 세계 미군기지에서 지상과 해상의 전술핵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도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핵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조처 협정에도 서명했다. 한반도에 훈풍이 일며 북·미관계도 해빙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난 93년 북한이 돌연 태도를 바꿨다. 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한반도 정세는 다시 살얼음판이 됐다.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도 고려됐다. 이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해결사로 나섰다. 그는 미국 전 대통령 신분으로 지난 94년 6월 북한을 방문, 고 김 주석을 만났다. 고 김 주석은 카터 전 대통령과의 만남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사망했으나, 유산은 남았다. 같은 해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가 성사됐다.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와 중유 등을 제공하고, 북한은 IAEA의 사찰 허용과 궁극적 핵시설 해체를 약속했다. 미사일 발사 등 간헐적인 갈등이 이어졌으나 합의는 지속됐다. 지난 2000년 7월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에서 첫 북·미 외교장관회담이 열렸다.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해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다. 같은 해 10월에는 북·미 적대관계 청산을 골자로 하는 공동 커뮤니케도 발표됐다.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 북한이 이라크에 무기를 제공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후 지난 2002년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했다.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발언 또한 북·미관계 파탄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같은 해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우리는 핵을 가질 권한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 북한은 이듬해인 지난 2003년 NPT를 재차 탈퇴했다. 핵시설을 다시 가동시켰고 군사적 도발도 진행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몇 차례 이뤄졌지만 뚜렷한 성과는 보지 못했다. 비핵화 준수를 위한 9·19 공동서명이 채택됐으나, 대북제재가 다시 쟁점으로 떠오르며 협상이 결렬됐다. 북한은 결국 지난 2006년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합의와 대화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 부시 전 대통령의 후임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북한의 자연스러운 붕괴를 바라는 ‘전략적 인내’를 대북정책으로 구사했다. 한국에도 ‘보수 정권’이 집권하며 북한과의 대화 채널은 단절됐다. 

‘핵 위협·고강도 제재’ 얽히고설킨 북·미…트럼프·김정은 ‘70년 매듭’ 풀까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집권 후,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북한은 지난 2012년 자신들의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핵 개발과 경제 발전을 함께 꾀하겠다는 병진노선도 채택했다. 지난해에는 수소폭탄과 미국 워싱턴 타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됐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도발에 미국 또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북선제 타격론’ 등을 거론하며 갈등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지난 1월 신년사에서 남측에 대화를 제안했다. 이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남북관계 진전과 함께 역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개최도 합의됐다. 김 위원장은 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부를 묻는 친서를 전달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은 지난달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의 갱도와 지휘소 시설 등을 폭파하는 등 비핵화 약속 이행을 위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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