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사랑스러운 돼지 이야기

기사승인 2018-07-17 0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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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돼지가 인연을 맺은 것은 순환기내과를 전공한 덕분입니다. 돼지의 심장 모양이나 혈전 체계 등이 사람과 비슷해 심장 질환을 연구할 때에 돼지의 심장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전공으로 하는 관상동맥 질환의 경우에 관상동맥을 풍선도자나 스텐트 등으로 넓히는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 후에 발생할 수 있는 재협착 병변을 유도하는 동물 모형으로도 돼지의 관상동맥이 가장 좋습니다.

저는 1987년 1월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순환기내과 전임의를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내과 분과전문의 자격시험도 있고 전임의라는 제도가 있지만, 30년 전에는 전임의라는 제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시기여서 2년간 전남대학교병원에서 무급 전임의로 일을 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심도자실에서 환자를 도우며 진료와 연구를 할 수 있었기에 보람있게 보낸 2년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증 환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훗날 전임강사 발령을 받고 1990년대 초반에 미국심장병학회에 참석하였을 때 끝이 보이지 않았던 학회장을 바라보고 놀랐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언제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심장병 환자를 모아서 임상 논문을 쓰고 동물실험을 하여 기초연구도 발표할 수 있을까.’ 큰 좌절감이 생겼고 구미 선진국과 우리나라 수준의 격차를 느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남대학교 강정채 교수님(전 전남대학교 총장)은 우리대학을 비롯해 국내대학들이 격상되고 국제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임상연구도 중요하지만, 동물 모형을 활용한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기초 연구를 위하여 미국 메이요 클리닉에 연수를 갔을 때의 고생도 잊을 수 없습니다. 대한순환기학회 회원들과 박옥규, 강정채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은사님들의 격려에 힘입어 모진 고생과 온갖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고 매번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에 손수 적어 보내준 격려의 편지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맙고 사랑스러운 돼지 이야기

1995년 말 무사히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돼지 농장을 찾아 나섰고 돼지 실험을 할 수 있는 실험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전남대학교병원의 이비인후과 조재식 교수님의 도움으로 무안 유당농장으로부터 돼지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돼지 실험실을 임상연구소 8층에 마련하여 귀국한지 1달 만에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첫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돼지 실험이 끝나면 돼지를 키울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다시 무안에 있는 돼지농장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오가는 사이에 돼지가 아깝게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임상연구소 엘리베이터가 부실하여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면 돼지를 들고 8층까지 올라가야만 하였습니다.

돼지가 무안까지 먼 거리를 오고 가면서 희생되기도 하였고 환자들과 직원들이 왕래하는 3동 임상연구소에서 돼지 실험을 계속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돼지 사육사를 의과학연구소 동물 사육사 2층에 설치하기 위하여 사육시설을 직접 설계하여 1996년 여름에 돼지 사육시설을 만들었고 1997년도에는 최신형 혈관촬영기도 도입하여 드디어 국내 최초의 동물 심도자실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때에 백영홍 전남의대 학장님과 김신곤 전남대학병원장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협심증과 심근경색증 순환기 환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하여 낮에는 환자들을 위한 관상동맥 중재술을 시술하고 밤이나 주말에 동물 실험을 하였습니다. 특히, 전남대학교병원은 전국에서 심근경색증 환자가 가장 많이 찾아오는 병원입니다. 환자 진료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동물 실험에 남은 시간을 모두 할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돼지 실험을 위해서는 많은 연구비도 필요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연구비만 많이 들어가고 연구 결과도 국제 수준에 비하면 초라한 실정이었지만, 강정채 교수님께서는 결과는 걱정하지 말고 학생과 전공의 교육을 위해서 실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니 동물실험을 계속하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연구비도 획득하고 과연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1996년도에는 대한순환기학회 신진연구비, 1997년도에는 대한내과학회연구비, 1998년도에는 보건복지부연구비 등을 순조롭게 획득할 수 있었고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한국 원자력연구소연구비, 한국과학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뿐만 아니라 외국 연구소에서도 연구비를 획득할 수 있었고 동물심도자실 연구논문이 국내외 학회지에 게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계속)

전남대학교병원 순환기내과 정명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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