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 롤] 가장 많이 희생한 그가 “폐만 끼쳤다”며 눈물 흘렸다

기사승인 2018-08-30 01: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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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롤] 가장 많이 희생한 그가 “폐만 끼쳤다”며 눈물 흘렸다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폐만 끼치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하고 다음엔 더 잘하고 싶습니다

한국 리그 오브 레전드(LoL) 국가대표 팀 원거리 딜러 ‘룰러’ 박재혁은 시상대를 내려오면서부터 눈물을 흘렸다. 눈시울이 시뻘게진 채 믹스트존에 입장한 그는 울먹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한국은 29일(한국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마하카 스퀘어 브리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시범 종목 e스포츠 LoL 대회 결승전에서 중국에 최종 스코어 1-3으로 패배, 시상대 2번째 높은 곳에 올랐다.

지난 27일과 28일 진행된 조별 예선 및 준결승전을 무패로 마치고 결승에 오른 한국은 이번 대회 유력 우승 후보였다. 이날 결승 상대였던 중국 역시 앞서 조별 예선에서 2차례 격파한 전력이 있었기에 더욱 금메달이 선명해보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조별 예선에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던 중국은 이날 완전히 환골탈태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박재혁과 ‘코어장전’ 조용인이 지키는 한국 바텀 라인을 공격해 이득을 챙겼고, 기어코 승점 3개를 가져갔다.

박재혁의 맞상대이자 중국 최고 선수로 꼽히는 ‘우지’ 지안 즈하오는 이날 절정의 컨디션을 뽐냈다. 중국 팀원들도 작정한 듯 ‘우지’에게 힘을 실어줬다. 알고도 못 막는 전략이었다. 한국 최우범 감독과 ‘스코어’ 고동빈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중국 바텀 키우기를 놓고 “전략을 잘 짜왔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박재혁은 중국의 다이브 공격에 연거푸 전사했다. 그럴 때마다 판단력은 흐려졌고, 자신감은 점점 옅어졌다. 지난해 만 18세 나이로 e스포츠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인 LoL 챔피언십(롤드컵) 결승 MVP를 수상한 그였지만 이날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 넥서스가 하루 3번 터지면서 대회가 피날레를 선언했다. 국기 게양대 중앙이 아닌 왼쪽에 태극기가 올라갔다. 그때 만 19세 청년이 마주하긴 과한 부담감이 돌연 엄습했다. 박재혁은 시상식이 진행되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고, 결국 눈물을 쏟았다.

그는 “폐만 끼쳤다”며 울먹거렸다. 사실과 달랐다. 박재혁은 오히려 대표팀을 위해 가장 많은 것을 바쳤던 선수였다. 지난 6월 유례없이 비(非) 원거리 딜러 메타가 도래했을 때 그는 국가대표로 지역 예선을 준비하기 위해 원거리 딜러만을 연습했다. 지역 예선이 비 원거리 딜러 득세 전(前)의 패치 버전으로 진행됐던 까닭이었다.

지역 예선에서 박재혁은 카이사, 이즈리얼, 자야, 코그모 등 원거리 딜러만을 사용해 한국의 조 1위 등극을 이끌었다. 그때 그 챔피언 폭은 젠지의 여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이번 시즌 박재혁은 예선에서 사용한 4개 챔피언에 애쉬, 바루스, 시비르를 합쳐 총 7개 챔피언만을 사용했다.

LCK 서머 결승에 진출한 그리핀 원거리 딜러 ‘바이퍼’ 박도현은 올 시즌 15개 챔피언을 썼다. KT 롤스터 ‘데프트’ 김혁규도 12개를 활용했다. 이번 시즌 LCK 주전 원딜 중 10개 미만 챔피언을 쓴 건 박재혁이 유일했다. ‘국대 원딜’이란 자랑스러운 칭호 이면에는 그에 걸맞은 희생이 있었다.

대표팀과 소속팀 젠지에서 그를 지도하는 최우범 감독은 이달 초 LCK 정규 시즌이 마무리됐을 때 “솔직히 (비 원거리 딜러를 연습할) 시간도 없었다”고 밝혔다. 최 감독은 “오히려 득이 됐던 것 같다”고 덧붙였지만, 그의 긍정적 해석과는 별개로 젠지는 분명 이번 아시안게임을 위해 가장 많이 희생한 팀이었다.

박재혁은 귀국 후 바로 또 다른 연습에 돌입한다. 오는 9월 중순께 시작되는 롤드컵 지역 대표 선발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롤드컵은 LoL 프로게이머들의 최종 목표다.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1년 농사를 결정짓는 날을 보름께 앞두고 그는 자카르타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병역 혜택도, 연금도 없었지만 그저 태극기를 게양대 최상단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박재혁은 분명 결승에서 아쉬운 플레이를 펼쳤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을 지역 예선 1위로 이끈 것도 박재혁이었고, 전승으로 결승에 올려놓은 것도 박재혁이었다. ‘국대 원딜’ 박재혁이 있었기에 한국 LoL 팬들은 기분 좋게 3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당당히 어깨를 펴도 된다.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자카르타│윤민섭 기자 yoonminseop@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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