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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열여덟 번째 이야기

아일랜드 수호성인에게 헌정된 성 패트릭 교회

기자입력 : 2018.09.19 18:00:00 | 수정 : 2018.09.19 19:14:53

클레이톤호텔 식당 앞에 있는 책읽는 공간(좌)과 객실 복도에 비치된 책(우)

여행길에서 맞는 다섯 번째 아침이다. 전날 밤 9시에 잠들어 몇 차례 깨다 자기를 반복하다가 6시에 일어났다. 강행군에 가까운 일정으로 피로가 쌓였던 모양이다. 이날 아침은 7-8-9다. 7시에 일어나 8시에 식사를 하고 9시에 숙소를 나선다는 의미이다. 클레이톤호텔에서 이틀을 묵을 예정이라서 아침이 여유롭다. 

호텔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식당 입구를 비롯하여 객실복도에 책을 비치한 공간을 두고 있었다. 아마도 사무엘 베케트, 버나드 쇼, 월리엄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조나단 스위프트 등 세계적 문호를 배출한 나라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일까? 사실 전날 숙소에 일찍 들었기 때문에 읽어볼 요량으로 복도에 비치된 책을 1권 골랐지만, 일찌감치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1장을 넘기지 못했다. 

구름이 흩어져 있는 파란 하늘로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호텔을 나서면서 보니 구름이 조금 떠있지만 파란 하늘이 싱그럽다. 바람도 적당해서 맑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숙소는 더블린 외곽에 있는 공항 근처지만, 더블린 도심을 지하로 관통하는 터널이 있어 항구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 더블린은 ‘검고 낮은 곳’이라는 의미의 아일랜드어 ‘더브 린(Dubh linn)’에서 왔다. 아일랜드어로는 ‘단단히 다진 땅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발러 아하 클리어흐(Baile Átha Cliath)’로 부른다.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며, 2003년 설문조사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수도’로 뽑혔다. 2016년 기준으로 도시인구는 117만명이고, 메트로 지역은 135만명이며, 위성도시를 포함하면 190만명이다. 도시의 남쪽으로는 위클로(Wicklow)산맥이 누워있다. 

더블린은 10세기 무렵 침공한 바이킹세력의 정착지로 설립돼 노르만족이 침공을 시작한 1169년까지 바이킹이 지배했다. 헨리2세의 아일랜드 정복에 이어 존 왕은 1204년 더블린성을 쌓아 방어선을 공고히 했다. 18세기 들어 양모와 아마무역을 주도하면서 번성해 인구가 13만을 넘어서 대영제국에서 2번째, 유럽 전체에서 5번째 큰 도시가 됐다. 도심을 관통하는 리피(Liffey)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는데, 북쪽은 노동자들이 남쪽은 중산층이 많이 살고 있다.

성 패트릭 교회의 전경

볼거리가 많은 더블린에 하루를 오롯하게 배치한 일정으로도 일부 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요즘 뜨고 있다는 ‘한 달 살기’ 일정으로 방문해서 차근차근 구경하면 좋겠다. 더블린 구경은 성 패트릭교회(St Patrick's Cathedral)에서 시작했다. 43미터의 첨탑을 가진 성 패트릭교회는 아일랜드 국교회 가운데 가장 크다. 

더블린에 있는 대주교좌 성당인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이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종교건물이다. 1870년부터 아일랜드교회는 성패트릭교회를 아일랜드의 국교회로 지정하고 12개 교구에서 뽑은 사제들을 모아들였고, 의장은 성패트릭교회에서 맡도록 햤다. 그 가운데 조나단 스위프트가 가장 유명하다. 

교회는 1191년 3월 17일 ‘하나님, 복되신 성모님 그리고 성 패트릭(God, our Blessed Lady Mary and St Patrick)’에게 헌정됐다. 1270년까지 확장한 교회건물은 화재로 소실돼 지금으로서는 볼 수 없다. 마이노트탑(Minot’s Tower)과 서편 회랑은 1362년과 1370년 사이에 재건됐다. 

영국의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 교회로 사용됐고, 1530년에는 크롬웰 군대에 의해 파손된 뒤 방치됐다. 이후 복원과 방치가 반복되면서 붕괴의 위험에 처했던 것을 1860년 벤자민 기네스(Benjamin Guinness)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재건축이 이뤄졌다. 지금 보는 교회건물은 이때 빅토리아풍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네이브를 통해 멀리 제단이 보인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패트릭성인(성 파트리치오, St. Patricius)은 4세기말(384년이라고도 한다) 로마제국의 속주였던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의 귀족 칼푸르니우스(Calpurnius) 가문에서 태어났다. 16살이 되던 해에 해적에 납치되어 아일랜드 서부 코노트 지방으로 끌려가 6년간 노예생활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사제가 돼 아일랜드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에 있던 성 제르마노(Germanus)주교로부터 사제교육을 받았다. 432년 서품을 받고 교황청으로부터 아일랜드 선교 임무를 부여받아 435년 3월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40년의 선교활동을 통해 켈트 다신교인 드루이드 신앙을 믿던 아일랜드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이끌었다. 

패트릭 성인의 전교활동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세 잎 클로버와 뱀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패트릭성인은 가톨릭의 삼위일체론을 대중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세 잎 클로버에 비유했다. “클로버 잎이 셋 달린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이와 같다”라고 설명했다. 성 패트릭의 강론은 쉽고 재미있어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패트릭 성인을 나타내는 색깔은 파란색이었는데, 훗날 클로버에서 유래된 초록색으로 바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 잎 클로버는 아일랜드의 국화이기도 하다. 아일랜드에서는 성 파트리치오 축일인 3월 17일이 국경일이다. 이날 아일랜드 사람들은 초록색 옷을 입고 성인을 기린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3월 아일랜드와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청계천 광장에서 기념행사가 열린다.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는데 패트릭 성인 덕이라고 전해온다. 패트릭성인이 스라이고 지방에서 수행을 마쳤을 때, 뱀이 몰려들었다. 그때 성인이 종을 울리면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더니 뱀들이 영국으로 물러갔다는 것이다. 지질학적으로 아일랜드의 땅에는 석회암 성분이 많아 뱀이 살 수 없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할로윈 축제는 가톨릭에서 축일이 없는 성인을 위한 축일인 11월 1일, 만성절(萬聖節)의 전야제(前夜祭)인 만성제(萬聖祭)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고대 켈트족에는 죽음과 유령을 찬양하는 삼하인(Samhain)축제가 있고, 천국과 지옥 모두에서 거부당한 영혼을 상징하는 ‘잭 오 랜턴(Jack O' Lantern)’이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점 등을 고려한다면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걸리버 여행기’로 친숙한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와 그의 동반자였던 스텔라의 묘역

성 패트릭교회는 그리 넓지 않은데 반하여 구경 온 사람들로 넘쳐나는 바람에 움직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자료에 따르면 교회 바닥과 바깥에 있는 묘지에 500명이 넘는 유골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교회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걸리버 여행기’로 친숙한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와 그의 동반자였던 스텔라의 묘역이었다. 그는 1713년부터 1745년까지 이 교회의 의장을 지냈다. 

제단 앞에는 성가대석이 있다

네이브를 통해 제단 쪽으로 가다보면 성가대석이 나온다. 선 패트릭교회는 1742년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가 초연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와도 인연이 있다. 작곡가 안익태 선생이 더블린에 머물면서 헨델의 ‘메시아’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 환상곡(Korea Fantasy)’을 작곡했고, 1938년 2월 20일 더블린 가이어티 극장(Gaiety theater)에서 아일랜드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해 초연했다. 일부에서는 더블린 게이트 극장(Gate theater)에서 초연됐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회랑의 왼쪽에는 1605년 아일랜드 대주교 및 총리를 지낸 토마스 존스(Thomas Jones) 부부의 묘역을 비롯해 19세기 초반 성 패트릭교회의 의장을 지낸 헨리 리차드 도슨(Henry Richard Dawson) 등 다수의 묘지표지를 볼 수 있다. 

1605년 아일랜드 대주교 및 총리를 지낸 토마스 존스(Thomas Jones)의 묘(좌)와 성 패트릭교회의 의장을 지낸 헨리 리차드 도슨(Henry Richard Dawson)의 묘(우)

1492년 킬달(Kildare)의 백작 제럴드 모어 피츠제럴드 (Gerald Mór FitzGerald)가 나무문의 구멍을 뚫고 손을 집어넣어 오르몬드(Ormond)의 백작 제임스와 악수를 했다는 화해의 문(The Door of Reconciliation)도 볼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다’(chancing your arm)라는 관용구가 유래된 유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쪽 회랑에는 철제로 된 앙상한 나뭇가지가 서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기억의 나무(The Tree of Remembrance)’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2014년에 공개됐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전쟁관련 기념물들이 대부분 남성 중심이었던 것과는 달리 성 패트릭교회의 ‘기억의 나무’는 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취지를 담았다. 나무는 중립적인 자연의 상징이지만, 이 작품에서 천연의 재료가 아닌 강철을 사용한 것은 현대 산업전쟁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고, 나무로 된 바닥에는 갈등의 보편적인 상징인 철조망으로 둘러쌌다. 

화해의 문(좌)과 기억의 나무(우)

이어서 바닥에 놓인 켈트 십자가를 볼 수 있다. 19세기 교회 인근에 있는 성 패트릭 우물에서 발견된 것이다. 켈트 십자가는 중세 초기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사용된 것으로 후광 혹은 고리 모양이 결합된 십자가의 형태다.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아일랜드에서는 성 패트릭이나 성 데클란 (Saint Declan)이 소개했다고 전한다. 패트릭 성인이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이교도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들이 추종하던 태양의 이미지를 십자가와 연결한 것이라고 한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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