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목록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누가, 왜, 만들었는지 오리무중인 '스톤헨지'

기자입력 : 2018.10.26 19:15:00 | 수정 : 2018.10.26 19:11:12

(좌) 바스 수도원교회 옆에 있는 조각상. (우)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좌), 특별한 의상과 기물을 들고 그 앞을 지나는 분들이 궁금해진다

로마목욕탕박물관에서 바스수도원교회 앞을 거쳐 에이번(Avon) 강가로 이동하다보면 작은 수반에 물을 따르는 여신상을 만난다. ‘물이 제일이다’(Water is best)라고 새겨진 것을 보면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그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구나 싶다. 

그랬다면 실천방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 오염과 부족이 현실화돼가고 있는 요즘 옛 사람들의 지혜를 만나면서 느끼는 점이다. 그런데 예스러운 복장을 하고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는 분들이 궁금하다. 혹시 바스대학의 졸업식 행사와 관련된 분들일까?

조금 더 돌아 에이번 강가에 있는 테라스가로 들어서면 버스정류장이 있는 로터리에 분수대가 있다.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분수대에는 시뇨르 스테파노 발레리오 피오리니(S. Stefano Vallerio Pieroni)라는 이름이 새겨져있다. 

늪지(Bog Island)라는 별명으로 버려진 듯한 작은 분수대는 원래 스톨(Stall)거리에 있던 것이다. 따듯한 미네랄워터를 쏟아내던 분수대는 이탈리아에서 온 스테파노 발레리오 피오리니가 1856년에 만든 것이다. 스톨가에 있을 때는 바스시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것이 오늘날에는 표지판조차 없이 버려진 것 같다. 

(좌) 에이번 강을 가로지르는 풀테니 다리는 피렌체의 베키오다리 혹은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를 닮았다. (우) 스테파노 발레리오 피오리니가 제작한 작은 분수대

바스 수도원 교회를 끼고 에이번강변에 이르면 오렌지그로브(Orange Grove)의 교통섬에 오래된 듯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오렌지공 윌리엄6세가 바스의 온천욕을 통하여 지병을 치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오벨리스크는 콘월의 역사가인 윌리엄 보레이스(William Borlase) 목사가 디자인해 1734년에 세웠다. 세월이 지나면서 붕괴됐던 것을 1834년에 재건했다. 보레이스목사와 함께 바스에 왔던 친구 올리버박사는 유명한 바스 올리버 비스킷을 발명하기도 했다. 

(좌) 오렌지그로브 교통섬에 있는 오벨리스크, (우)에이번 강변에 펼쳐진 퍼레이드 가든에는 제인 오스틴 관련 행사를 알리는 꽃탑이 서 있다

오렌지그로브 오벨리스크에서 에이번강변으로 가면 독특한 형식의 다리를 볼 수 있다. 세계 4대 다리의 하나로 꼽는 풀테니(Pulteney) 다리다. 강 건너에 보유한 땅을 개발하기 위해 풀테니 가문이 1774년에 건설한 것이다. 

피렌체에 있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와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를 모방해 로버트 아담(Robert Adam)이 팔라디안(Palladian) 양식으로 디자인한 길이 45m, 너비 18m의 다리 위에는 양쪽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풀테니 다리 부근에서 에이번 강물이 포물선 모양으로 된 3단의 계단에서 떨어져 내리며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다. 또한 에이번강변에 펼쳐진 퍼레이드 가든(Parade Garden)에 펼쳐진 넓은 풀밭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우리가 여행할 무렵에 제인 오스틴과 관련된 행사가 있었는지 꽃으로 장식된 탑이 세워져 있었다.

초승달 모양을 이룬 로열 크레센트. ‘도시 속의 시골’ 분위기가 나는 듯하다

에이번 강변의 한가로운 분위기를 즐기다가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로 이동했다. 로열 크레센트는 초승달모양으로 배치된 30개의 계단식 주택이다. 건축가 존 우드(John Wood)가 설계한 대표적인 조지아양식의 건물로 전체 길이가 150m나 된다. 

주택들의 1층에는 모두 114개의 이오니아양식의 기둥을 세웠다. 1767년 착공해 1774년 완공됐다. 반대편에 펼쳐지는 공원을 조망할 수 있어서 이 건축물을 ‘도시 속의 시골(rus in urbe)’이라고도 부른다. 

초승달 모양으로 배치한 30개의 타운하우스 가운데 10개는 여전히 타운하우스로 남아있고, 18개는 다양한 크기의 아파트로 나뉘었다. 그리고 하나는 로열 크레센트 박물관 (Royal Crescent Museum)으로 중앙에 있는 대형 타운하우스는 로얄 크레센트 호텔 (Royal Crescent Hotel)로 사용 중이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당시 바스의 시장이 도시의 랜드마크로 지었다. 완공 후 왕실에 한 채를 선물하고 ‘로열’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전량 분양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높은 인기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이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은 줄서 있지만, 파는 사람이 없어 거래가 없다고 한다. 2015년에 한 채가 거래됐는데 930억 원이었고 한다.

바스의 구경을 마치고는 2시반에 솔즈베리(Salisbury)로 출발했다. 바스에서 솔즈베리까지는 버스로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정확하게는 솔즈베리시가 아니라 스톤헨지가 있는 솔즈베리평원로 갔다. 

솔즈베리평원은 브리튼섬의 남쪽 중앙의 남서쪽으로 펼쳐진 780㎢넓이의 고원지대이다. 윌트셔(Wiltshire)지방의 대부분과 버크셔(Berkshire)와 햄프셔(Hampshire)의 일부까지 포함된다. 초크(chalk)라고 부르는 후기 백악기에 형성된 석회암 계통의 지형에 초원이 펼쳐진다.

스톤헨지는 원형으로 둘러 선 선돌 위에 너럭바위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솔즈베리평원은 역사와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신석기시대에 솔즈베리평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로빈 후드의 공(Robin Hood's Ball)처럼 둑길로 둘러싸인 장소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500년 무렵에는 더링턴 월즈(Durrington Walls)와 스톤헨지(Stonehenge)가 중심이 됐고, 청동시 시기에는 평원의 남쪽으로 확산돼갔다. 기원전 600년 무렵의 철기시대에는 평원의 경계에 있는 언덕에 요새를 구축하게 됐다.

스톤헨지 (Stonehenge)는 윌트셔(Wiltshire )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에임스베리(Amesbury)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져있다. 스톤헨지는 높이가 4.0m, 폭은 2.1m에 무게가 약 25톤(t) 인 선돌들이 고리모양을 이루며 서있다. 

스톤헨지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백 개의 고분군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기념비적 유적이다. 고고학자들은 스톤헨지 유적이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사이에 건설됐다고 믿는다. 

유적의 기반을 구성하는 흙으로 된 환상의 둑은 기원전 310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청석(bluestones)은 기원전 2400~2200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이다. 조성 초기에 스톤헨지는 매장터였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놓은 뒤꿈치 돌

최초의 발굴을 통해 적어도 기원전 3000년 무렵의 사람 뼈들이 수습됐으며, 이후 500년 뒤의 것들도 출토됐다. 10세기 후반 작가로 활동한 에인샴(Eynsham)의 엘프릭(Ælfric) 대수도원장의 기록에 따르면, 헨지-클리프(henge-cliff)는 ‘절벽’ 혹은 ‘돌’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따라서 솔즈베리에서 멀지 않은 스타넨지(stanenges) 또는 스탄행(Stanheng)은 ‘받치는 돌(supported stones)’이란 의미로 사용됐을 것이다. 윌리엄 스터클리(William Stukeley)는 1740년에 “요크셔지방에서는 매달린 바위를 헨지(henges)라고 부른다. 색슨에 있는 스톤헨지는 ‘떠있는 돌’을 의미한다”라고 적었다.

어떤 문화를 가진 집단이 스톤헨지를 조성했는지 아직까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스톤헨지를 어떻게 만들었고,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가 하는 것도 그저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다만 커다란 삼중탑, 말발굽처럼 배열된 5개의 삼중탑, 뒤꿈치 돌, 둑으로 싸인 길 등이 동지의 일몰바양과 반대쪽으로 하지의 일출방향과 일치돼 신비롭다. 

20세기 동안, 스톤헨지는 신자유주의와 뉴에이지 신앙, 특히 네오 드루이드 지지자들이 숭배하는 장소로 주목받았다. 1972년부터 1984년까지 스톤헨지 자유축제(Stonehenge Free Festival)가 열렸지만, 1985년부터는 종교적 목적의 행사는 불허되고 있다. 

1977년까지는 스톤헨지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돌 사이를 걸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돌을 타고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손상이 심해짐에 따라 밧줄을 걸어 출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스톤헨지로 향하는 초원을 개양귀비꽃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3시 반에 스톤헨지의 안내소에 도착했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약 5분정도를 달려 유적에 도착했다. 물론 걸어서도 갈 수 있다. 스톤헨지로 가는 길에 펼쳐진 평원은 개양귀비꽃으로 가득 채워져 붉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넓은 평원에 서 있는 스톤헨지는 사진에서 이미 익숙한 모습이다.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 안에 들어 간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아주 멀찍한데 쳐놓은 줄 밖에서 사진이나 찍을 수밖에 없다. 빙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는 서둘러 셔틀을 타고 되돌아 나왔다. 자유시간이 넉넉지 않아 전시관을 둘러보기에도 빠듯하기 때문이다. 

스톤헨지 전시관 밖에는 바위를 옮긴 장비의 모형(좌)과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이 살던 집의 모형(우)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에서는 이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고 스톤헨지가 건설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동영상도 보여준다. 기원전 3500년 이 지역에 거주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이 마을중앙에 원형으로 작은 돌을 세웠다가 기원전 2500년에 지금 모습에 가깝게 커다란 돌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일설에는 파종시기를 잡기위해 계절을 가늠하던 일종의 천문대로 짐작된다고도 했다. 전시관 밖에는 커다란 돌을 어떻게 끌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와 당시 사람들이 살던 움집의 모형을 세웠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    
  • 맨 위로



이미지

photo pick

이미지
이미지
SPONSORED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