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12-04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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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에토는 ‘오래된 도시’라는 의미의 라틴어 우르비아스 베투스(urbs vetus)에서 유래했다. 이곳이 에트루리아 시대의 도시 벨츠나(Velzna)라는 설에는 논란이 있으나, 에트루리아문명의 중심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고고학 박물관 (Museo Claudio Faina e Museo Civico)에 가면 도시 부근에서 출토된 에트루리아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오르비에토는 기원전 3세기 무렵 로마에 합병됐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앉아 있어 난공불락인 도시 오르비에토는 피렌체와 로마 사이의 가도를 통제하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13세기 말 오르비에토 인구는 3만명에 달했다.

1236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지금은 페루지아(Perugia) 대학에 통합된 작은 대학의 모체가 된 스터디엄을 설립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5년 교황청 신학자로 활동하기 전에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오르비에토는 일찍부터 교황청의 통제를 받았으며 1860년 통일된 이탈리아에 병합될 때까지 교황청의 소유였다. 

13세기에는 교황의 궁전 3개가 세워졌다. 로마 밖에 교황궁전이 있는 곳은 오르비에토와 비테 르보(Viterbo) 그리고 아비뇽뿐이다. 프랑스 트루와 출신으로 추기경을 거치지 않은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2년부터 1264년까지 오르비에토에 살았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볼세나(Bolsena)의 기적이라는 성체포를 모시고 있어 유명하다. 1263년 로마 순례 길에 나선 프라하의 베드로 신부가 볼세나에 당도했을 때, 그는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게 됐다. 가톨릭 미사에서는 신부가 축성한 면병을 그리스도의 성체로 여겨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이 받아먹는다. 그런데 베드로 신부의 축성이 끝나자 면병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해 금세 신부의 손가락을 적시고 제대와 성체포 위로 흘러내렸다. 

베드로 신부는 매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먹고 마시는 ‘성체와 성혈이 과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마순례도 흔들리는 믿음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날 미사 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에 대한 답을 얻은 셈이다.

오르비에토에 머물고 있던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베드로 신부로부터 이 일의 전말을 보고받고 신부를 사면했으며, 성직자들을 파견해 조사시켰다. 조사 결과 베드로신부의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고 밝혀지자 교황은 성체와 피 묻은 성체포를 오르비에토로 모셔오도록 하는 한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로 하여금 성체를 공경하는 기도문을 짓게 했다. 1264년에는 성체 축일(the Feast of Corpus Christi)을 두도록 선포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볼세나의 성체포를 모시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90년 건설을 시작해 1607년 최종 마무리됐다. 무려 300년이 넘게 공사가 진행되면서 로마네스크양식에서 고딕양식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반영됐다. 피렌체 대성당을 설계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페루자의 베비그나테(Bevignate) 수사가 건축을 맡아 시작했다. 

1309년에는 시에나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로렌조 마이타니(Lorenzo Maitani)가 이어받았다. 대성당의 파사드는 마이타니가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이다. 박공에는 체사레 네비아(Cesare Nebbia)가 디자인한 모자이크화로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을 담았다. 중앙에 있는 박공의 모자이크화는 ‘성모의 대관’이다.

세 개의 박공 사이의 공간에는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오르카냐(Orcagna)가 1354년에서 1380년 사이에 건설한 커다란 장미창문이 있다. 창문 위에는 12사도를 조각했다. 장미창 양쪽에는 구약에 등장하는 12명의 선지자를 쌍으로 조각했다. 벽감에 동상을 세우는 것은 프랑스풍의 고딕양식의 전형이다. 

장미창의 네 구석에는 4명의 교회학자를 그린 모자이크화가 있다. 장미창의 틀에는 52명의 두상을 새겼고, 장미창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두상을 새겼다. 장미창 아래의 벽면에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 이야기를 그렸다. 아래쪽에 있는 박공의 꼭대기에 청동상을 세웠는데, 중앙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하느님의 어린양(Lamb of God)이고, 왼쪽에는 성 미카엘이다. 

맨 아래 있는 세 개의 출입구에 서 있는 네 개의 홍예받이 위에는 4명의 복음서의 저자, 마태(Matthew), 루카(Luke), 마르코(Mark), 요한(John)을 상징하는 천사, 황소, 사자, 그리고 독수리의 청동상을 세웠다. 중앙출입구 위에는 안드레아 피사노가 1347년에 만든 성모상을 세웠다. 

성당의 세 개의 입구에 세운 청동문은 시칠리아의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io Greco)가 1970년에 완성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삶에서 자비를 묘사한 것이다. 대성당의 파사드를 아름답게 장식한 것과는 달리 옆면은 흰색의 석회암과 청회색의 현무함을 번갈아 사용해 단순화시켰다. 

본당 내부는 2개의 통로가 있는 십자가형으로 6개의 구획으로 나뉜다. 내부의 아치를 받치는 기둥은 석회암과 현무암을 교대로 쌓았다. 제단 정면의 애프스(apse)는 보니노의 유리장인 지오반니(Giovanni)가 1328년에서 1334년에 걸쳐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중심으로 프레스코화가 그려졌다. 

성모마리아의 삶을 그린 고딕양식의 제단화는 오르비에토에서 활동하던 여러 명의 화가들이 참여한 1370년경 작품으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제일 큰 것이었다. 제단 위에는 마이타니가 만든 커다란 나무십자가가 있다. 

성체 예배당(Cappella del Corporale)은 제단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볼세나의 성체포를 보관하기 위해 1350년에서 1356년 사이에 만들었다. 예배당의 왼쪽 벽에는 성체의 역사를, 오른쪽 벽에는 피가 흘러내린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프레스코화로 그려 넣었다. 제단 중앙에는 성체를 담은 작은 상자가 있는데 1358년에 만든 것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천정화와 루카 시뇨렐리의 걸작,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산 브리조의 성모 예배당(Madonna di San Brizio)은 구경할 수 없었다. 15세기에 만들었다는 이 예배당은 성체 예배당과 같은 구조로 돼있다. 

처음에는 새 예배당(Cappella Nuova)이라고 부르다가 스폴레토와 폴리뇨의 첫 번째 주교로 오르비에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브리티우스 성인(Saint Britius)에게 1622년에 헌정됐다. 이 예배당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와 베노조 고졸리(Benozzo Gozzoli)가 그린 천정화 ‘심판의 그리스도(Christ in Judgment)’와 로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의 걸작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이 특히 유명하다. 

대성당 안을 돌아보고 문을 나서는데, 그 앞에 경찰차가 서 있어도 고졸한 분위기가 살아있는 가게가 눈길을 끈다. 짧은 자유 시간에 오르비에토 구시가지를 돌아봤다. 골목조차도 좁은 탓에 방향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긴장한다. 조금 내려갔더니 크지 않은 광장이 나타난다. 시민광장(피아자 델 포폴로, Piaza del Popollo)이다. 광장 한 켠에 중세풍의 건물이 서 있는데, 문이 잠겨있다. 팔라초 델 카피타노 델 포폴로(Palazzo del Capitano del Popolo)이다. 

오르비에토에 포폴로라고 하는 정치조직이 있다는 사실은 1244년 기록에 등장한다. 그 수장인 카피타노 델 포폴로가 처음 임명된 것은 1250년이었다. 1281년 포폴로의 수장이었던 라니에리 델라 그레카 (Ranieri della Greca)는 포폴로 궁전을 짓고 그 앞에 광장을 설치하기로 했다. 

포폴로궁전은 폰첼로 오르시니(Poncello Orsini)가 수장이던 1315년~1316년 사이에 완공됐다. 16세기 말에는 법학, 신학, 논리를 가르치는 학교가 들어섰다가 17세기 초에는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으로 넘어갔다. 지금은 1984년부터 1989년 사이에 복원을 거쳐 원래의 모습을 많이 되찾은 상태이며, 전시회와 세미나를 위한 컨벤션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오른쪽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아돌포 코짜(Adolfo Cozza)의 흉상이 서 있다. 1848년 6월 4일 오르비에토에서 태어난 코짜는 18세가 되었을 때 가리발디의 트렌토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각가로 활약했고, 고고학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얻었다. 이런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오르비에토시에서 기념물을 조성한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세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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