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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네 번째 이야기

한 때는 지중해를 호령하던 해양강국 피사로 가다

오준엽 기자입력 : 2019.01.13 06:00:00 | 수정 : 2019.01.13 05:20:11

몬테로소역 앞에 백사장 끝에 있는 절벽 위에 서 있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동상(좌). 곁에 있는 개더러 먼 바다를 바라보라 권하는 듯하다(우).

절벽 위에는 몸을 기울여 누군가를 굽어보는 동상이 서 있다. 절벽을 돌았을 때 본 마을까지 내려가려면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했다. 올라올 때 힘들 것 같아 차라리 누굴까 궁금해진 동상을 보러 올라가기로 했다. 문대현 인솔자는 절벽 위로 올라가는 것도, 내려오는 것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한다. 그래도 올라가 보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을 숨이 턱에 닿도록 씩씩거리며 올랐다. 절벽 위의 동상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었다. 데리고 있는 개더러 멀리 바다를 바라보라고 부축이고 있었다. 동물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이 잘 표현돼있다.

절벽 위에 있는 작은 교회당(좌). 그 옆으로 납골당이 있다(우).

프란체스코 성인을 지나 계단을 더 올라가니 절벽 위에 작은 교회당과 납골당이 들어서 있다.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터를 잘도 다듬었다. 교회당은 소박했다. 몬테로소 사람들은 죽으면 안 될 것 같다. 영구를 이곳 교회당까지 모시고 올라와 장례를 치르려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엄청 힘들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의 신심이 참 대단하다는 것은 절벽 중간에 걸린 좁은 길을 걸으면서도 볼 수 있다. 길가의 바위를 파내 작은 그로토를 만들어 용설란을 심고 역시 작은 피에타 상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길을 오가며 성호를 긋지 않을까? 

마나롤라 역에서는 터널을 한참 걸어가야(좌), 마을에 들어설 수 있다(우).

약속한 11시35분보다 훨씬 이르게 몬테로소로 역으로 갔더니 일행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열차를 놓치면 1시간 뒤에나 오는 다음 열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늦은 사람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다고 미리 안내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 스페치아 행 열차로 되잡아 타고 마나롤라에서 내렸다. 마나롤라 역에서 마을로 가려면 터널을 한참 걸어야한다. 

마나롤라에서는 절벽에 의지해서 들어 서 있는 마을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이 중요하다. 리구리아 해를 건너온 파도가 절벽 아래 바위를 핥는 모습이 우아하다. 영혼의 테라피스트라고 하는 마크 네포가 쓴 ‘그대의 마음에 고요가 머물기를’에서 “광대한 바다가 마치 딱딱한 바위를 달래기라도 하듯 물보라를 뿜어대다가 모습을 바꿔 바위 표면을 흠뻑 적셔버리는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바다야말로 ‘받아들임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마나롤라의 먹자골목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절벽 중간에 길을 내놓았다(상).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쓰러진 고목의 무늬를 닮은 바위들을 볼 수 있다(하좌). 그 길 끝에서 계단을 타로 절벽 위로 오르면 절벽 위에 올라앉은 마나롤라 마을을 볼 수 있다. 마을 위쪽으로 절벽을 계단모양으로 깎아 만든 포도밭이 보인다.

마나롤라 마을을 통하는 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을 오른쪽 절벽 중턱에 나있는 길로 연결된다. 절벽의 모퉁이에 이르면 새로운 풍경이 ‘짠!’하고 나타난다. 절벽을 돌아가는 순간 세찬 바람에 몸이 날아갈 지경이다. 머리에 눌러쓴 모자가 벗겨지려는 순간 얼결에 붙들었다. 순발력은 아직도 그리 떨어지지 않았나 보다. 땀에 전 모자로 리구리아 바다가 오염되지 않아 다행이다. 여기서도 계단을 통해서 절벽 위로 올라가야 마나롤라 마을의 전경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 절벽을 계단식으로 일군 포도밭, 그리고 절벽을 이룬 바위들이 마치 오래된 고목의 나뭇결을 보듯 신기하다. 

아름다운 마을모습을 실컷 구경하고 나니 배가 고파진다. 점심때가 된 것이다. 일행들보다 먼저 절벽을 내려왔지만 식당을 고르느라 망설이다보니 맨 꼴찌가 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잘 나간다는 오징어 튀김과 봉골레 등 파스타 두 접시와 음료를 시켰다. 음식 맛은 나쁘지 않아, 해외여행 중에는 한식보다는 현지식이라는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하지만 세 사람의 점심값으로 15%나 되는 봉사료 7.5유로를 더해 57.90유로를 내고나니 가성비를 따져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마나롤라 마을 초입에 있는 테라스에 서면 바닥에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갈매기 두 마리가 보인다.

식사를 마치고 약속한 2시15분에 맞추어 기차역에 갔더니 다른 일행은 벌써 와 있었다. 다들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28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10여분 정도 지나자 라 스페치아에 도착했다. 생각해보니 친퀘 테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동굴을 지나는 구간이 대부분이라서 지하철을 타는 느낌. 가끔 동굴 밖을 지나는 구간이 잠깐씩 나타나는데 이때는 서울 지하철이 한강을 지나는 구간이 연상된다. ‘설국’을 쓴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이곳에 왔더라면 ‘열차가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오자 온통 파란 세상이 펼쳐졌다’라고 쓰지 않았을까?

마나롤라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는 여성을 만났는데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분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피사에서도 이분을 다시 만났는데 동행은 필자가 모르는 남성이었다. 아는 척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했더니, 아내가 보기에는 닮았지만 우리가 아는 분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마나롤라 마을 초입에 있는 테라스에서 마을을 지나는 골목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라스페치아 역에 도착해서는 버스가 기다리는 해군기지 주차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동하는 중간에 호주에서 온 분들이 보이지 않아 찾는 소동이 있었다. 사실 여행하는 동안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됐다. 단체여행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듯하다. 피사로 출발한 것은 2시54분이었다. 라 스페치아에서 피사까지는 버스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피사는 수수께끼가 많은 도시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피사를 오래된 도시라고 불렀다. 기원이 분명치 않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펠라기스(Pelasgi) 사람 등 그리스계나, 에트루리아 사람, 혹은 리구리아해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이베리아반도의 해안지역에 흩어져 살던 리구리아사람들이 건설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유물들이 나오고 있다. 

아르노강이 리구리아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피사는 지정학적 위치만으로도 참 슬픈 운명을 가진 도시이다. 기원전 180년 로마공화국에 합병된 것을 시작으로, 로마제국, 서로마제국, 오도아르왕국, 동고트왕국, 동로마제국, 롬바르드왕국, 카롤링거왕국, 플로렌스와 피렌체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에트루리아왕국, 프랑스제국 등 외세에 합병됐다가 근세에 들어 이탈리아왕국을 거쳐 이탈리아공화국에 속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외세에 시달린 적이 많지만, 그래도 1000년부터 1406년까지 피사공화국 시절에는 베네치아, 제노아, 아말피와 더불어 지중해의 4대 해양공화국의 일원으로 혹은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하여 인구 9만1104명(2015년 기준)의 작은 도시 피사에는, 피사의 사탑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피사에는 12세기에 문을 연 피사대학교가 있고, 20여개의 역사적 배경을 지닌 교회들, 중세의 궁전들, 그리고 다리들이 있다. 

공영주차장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주차장 길 양쪽으로 서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에는 열매가 다닥다닥 맺혀있었다. 이탈리아여행의 특징은 걷고 또 걷는다는 것이다. 목적지 부근에 주차는커녕 정차할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먼 곳에 있는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야 한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성벽이 나오고, 성문을 지나 피사성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은 또 다른 공간이었다. 

피사 성문에 들어서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널따란 공간, 두오모 광장이 나타난다. 성벽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저 하얀 동물은 늑대일까?(좌). 두오모 광장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이 성 조반니 세례당이다(우).

성안은 파란 잔디가 깔린 광장이 널따랗게 펼쳐지고 세례당, 대성당 그리고 종탑이 흩어져 있다. 20세기 들어서는 기적 광장(Piazza dei Miracoli)이라고도 부르는 두오모 광장(Piazza del Duomo)이다. 두오모 광장은 구시가의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광장의 북쪽으로는 세례당, 피사 대성당과 피사의 사탑이라고 하는 대성당 종탑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캄포산토(Camposanto Monumentale, 현충사)가 길게 자리하며, 중세에 지어진 궁전과 병원들이 있다.

성문에 들어서는 순간 성문 밖의 좁은 골목을 따라 납작납작한 집들이 이어지던 것에 비하면 별유천지에 온 것처럼 널따란 공간에 놀라고, 이어서 그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인파에 두 번 놀라게 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기울어진 종탑을 손으로 막아보려는 모습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다. 큰 아이에게 같은 자세로 사진을 찍어보겠느냐고 물었더니 진부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럼 창의적 자세를 한 번 취해보라 했지만, 답이 금세 나오지는 않았다. 발로 버티는 젊은이도 있었단다. 손이나 발을 쓰지 않는 창의적인 자세가 금방 생각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두오모 광장에서 처음 만나는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은 지름이 34.13m에 높이가 54.86m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세례당이다. 세례당은 대성당과 종탑에 이어 1152년에 짓기 시작해 1363년에 완공됐다. 역시 모래가 많아 지반이 약한 까닭에 대성당 방향으로 0.6도 가량 기울어있다. 대리석으로 지은 세례당은 아래쪽은 둥근 아치를 둔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했고, 위쪽은 뾰족한 아치를 둔 고딕양식을 적용한 특이한 건축물이다.

조반니 세례당의 내부에서 올려본 돔(좌상). 조반니 세례당의 입구(좌하). 조반니 세례당의 내부. 장식이 많지 않지만 압도되는 분위기이다. 중앙에 세례 요한의 청동상이 서 있는 8각 세례반이 있다(우). [사진=Wikipedia]

입구는 대성당을 마주한 쪽에 있는데, 양쪽에 서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고정양식으로 조각됐으며, 안쪽의 기둥은 비잔틴양식으로 돼있다. 세례당 입구의 상인방은 2단인데, 아래쪽에는 세례 요한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했고, 위쪽에는 천사와 복음사가들로 에워싸인 성 모자와 세례 요한의 모습을 새겼다. 세례당 내부는 장식은 별로 없지만 웅장한 모습이며, 중앙에 있는 8각형의 세례반은 귀도 비가렐리 다 코모(Guido Bigarelli da Como)가 1246년에 제작했으며, 세례반 중앙에 서 있는 세례 요한의 청동상은 이탈로 글리셀리(Italo Griselli)의 작품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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