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여덟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1-2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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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는 본격적으로 피렌체의 중심을 탐구한다. 피렌체의 골목골목을 채우고 있는 집들은 중세풍으로 고졸한 느낌을 준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거리’라고 한 ‘냉정과 열정사이 blue’의 한 대목이 실감난다. 

작가 츠지 히토나리는 한걸음 나아가,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 거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해.(…) 거리는 세월이 갈수록 노화되어가지. 복원해도 여전히 무너져 내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래도 이 곳 사람들은 과거에서 살기를 원해. 적어도 미래 따위는 없으니까”라는 남주인공 쥰세이의 선생의 말을 빌어 피렌체 사람들의 속생각을 전한다. 

속생각은 그럴지 모르지만, 피렌체 사람들의 자존심은 불편하단 말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피렌체 사람들의 놀라운 참을성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두오모로 향하는 길에 단테 박물관(Museo della casa di Dante)을 만났다. 작은 광장에는 우물이 있고, 박물관의 벽에는 단테의 흉상을 걸었다. 시뇨리아 광장 부근의 좁은 골목 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테의 생가를 1911년 건축가 주세페 카스텔루치(Giuseppe Castellucci)가 중세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신곡’의 지옥편에서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 아름다운 아르노 강가에 있는 대도시였소”라고 적었지만, 단테 자신은 산 마르티노(San Martino)교구의 피오렌타나 수도원(Badia Fiorentina)의 그늘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물론 지금 박물관 자리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박물관 인근에 있는 산타 마게리타 데 세르치 교회(Santa Margherita de 'Cerchi)는 시인이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Beatrice Portinari)를 처음 만난 곳이다. 

단테가 ‘신곡’의 천국편에서 “한때 사랑으로 나의 젊은 가슴을 뜨겁게 했던 / 저 태양은 아름다운 진리의 부드러운 모습을 / 논박과 증명으로 내게 나타내 보였다”라고 노래한 것은 베아트리체를 향한 젊음의 무모한 정열을 지성으로 승화시켜간 과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3층으로 된 박물관에는 단테의 삶을 시기별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1층에는 13세기 피렌체의 모습과 단테의 청년기에 관한 문서, 캄팔디노(Campaldino)전투를 나타내는 모형과 당시 무기의 복제품 등을 전시한다. 2층에서는 그가 피렌체 사회에서 비난을 받다가 1301년 망명길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시인은 포를리(Forli), 베로나(Verona), 볼로냐(Bologna) 등을 전전하다가 1321년 라벤나(Ravenna)에 있는 귀도 다 폴렌타(Guido da Polenta)의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3층에는 14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테와 관련된 예술작품들을 재현해 놓았다. 조토(Giotto), 베아토 안젤리코(Beato Angelico),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라파엘(Raphael)과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등의 작품들이다. 

다시 골목을 누벼 두오모로 향한다. 이윽고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에 이르렀다. 골목을 벗어나자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피렌체 대성당의 공식적인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으로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는 뜻이다. 

초록색과 분홍색 등 다양한 색갈의 대리석 판으로 외벽을 마감하고 하얀 윤곽선을 둘렀다. 이들 대리석은 카라라(하얀색), 프라토(초록색), 시에나(붉은색), 라벤차 등의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설계한 돔으로도 유명하다. 건물 면적은 8300㎡, 길이 153m, 너비 38m, 교차 90m 넓이의 엄청난 규모일 뿐 아니라, 통로 안의 아치 높이는 23m, 돔의 랜턴까지의 높이는 114.5m에 달한다.

피렌체 대성당은 피사와 시에나에서 대성당을 새로 짓는 것에 자극을 받아서 짓게 됐는데, 당시 피렌체 사람들은 적어도 베드로 대성당이나 세비야 대성당, 혹은 밀라노 대성당과 맞먹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피렌체 대성당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Santa Reparata, Florence)을 부수고 지었다고 해서 그럴 것까지 있었겠느냐는 지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이미 신도들을 수용하기에 비좁았고, 지은 지 900년 정도 됐기 때문에 무너져가고 있었다고 한다.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플라비우스황제(Flavius ​​Augustus Honorius)의 통치기간(395~423년) 중에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고딕왕 라다가이수스(Radagaisus, 405년 혹은 406년에 사망)와의 전투가 레파라타 성인의 날에 승리로 마무리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건립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산 로렌조(San Lorenzo)에 있던 자노부스 성인(St. Zanobus)의 유해를 430년에 산타 레파라타로 옮겼다는 기록을 보면 그때는 이미 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렌체 대성당은 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키오 궁전을 건축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의 설계로 1296년 착공해 140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됐다. 팔각형 돔을 중심으로 3개의 넓은 중랑이 배치됐다. 가운데 중랑이 들어선 자리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곳이다. 조토(Giotto)가 대성당공사에 참여한 것은 1334년으로 종탑건설에 기여했다. 

대성당 건물의 몸통부분은 15세기 초에 완성됐지만, 벽돌로 쌓기로 한 42m나 되는 네리의 돔은 1419년 별도의 공모를 통해 건축가를 선정했다. 그 무렵 강력한 경쟁관계였던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제작한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와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의 후원을 받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최종 결정 대상에 올랐고, 브루넬레스키로 결정됐다. 

브루넬레스키는 드럼 위에 이중벽 구조의 8각형의 돔을 벽돌을 쌓아올려 제작했다. 버팀목이나 홍예가 없어 생기는 수평인장력 문제는 돔의 기초에 나무와 철을 수평으로 엮은 팽팽한 사슬로 해결했다. 뿐만 아니라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을 써서 3만7000톤 무게의 돔을 특수한 기계를 만들어 지붕위에 얹어 마무리했다.

원래의 전면(파사드)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디자인했지만 조토를 비롯해 후세의 여러 예술가들이 관여했다. 전면은 르네상스 시대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587년에서 1588년 사이에 분해돼 대부분은 대성당 뒤에 있는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고, 나머지는 베를린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금의 전면은 1871년에 당선된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 Emilio De Fabris)의 설계안으로, 1876년 공사를 시작해 1887년 완공했다. 하얀색과 초록색 그리고 붉은색의 대리석으로 된 이 고딕 양식의 전면으로 대성당과 종탑, 세례당과 함께 조화를 이뤘다. 전체 전면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졌다.

전면에는 3개의 출입문이 있고, 1899년에서 1903년 사이에 만든 청동문을 달았다. 문에는 성모 마리아의 일생에서 가져온 장면들로 장식했다. 각 문 위의 반원형 공간에는 니콜로 바라비노(Niccolò Barabino)의 모자이크화로 꾸며졌다. 

왼쪽의 것은 피렌체 박애 협회의 설립자들의 자비를, 가운데의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세례자와 함께 왕좌에 오른 그리스도를, 그리고 오른쪽의 것은 신심에 경의를 표하는 피렌체의 예술가와 상인과 인문주의자들을 나타낸다. 

가운데 정문 위의 박공벽에는 티토 사로키(Tito Sarrocchi)가 꽃으로 장식된 홀을 들고 옥좌에 앉은 마리아를 반돋음새김으로 장식했다. 전면 꼭대기에 있는 벽감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열두 사도가 늘어서 있고, 장미창과 입구 위쪽 그리고 지붕 사이에 있는 박공의 삼각면 사이에는 위대한 피렌체 예술가들의 흉상을 뒀다. 

광대한 고딕양식의 실내는 비어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주장한 종교적 엄격함을 반영한다. 피렌체의 저명한 정치가나 장군을 찬미하는 작품들이 예술품이 장식돼있다. 

특히 14~15세기에 걸쳐 만든 44 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유명하다.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당시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들로 장식했다. 측랑 안과 익랑 안의 창들에는 성경에 나오는 성인들을 묘사했고, 돔의 원통형 안과 출입구 위에 있는 둥근 창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표현했다. 

지름 45m의 돔 내부 면적 3600㎡ 공간은 코시모 1세의 결정에 따라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와 페데리코 주카리(Federico Zuccari) 등에 의해 1568년에 시작해 1579년 사이에 그려진 그림은 위로부터 아래쪽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 덕, 성령의 선물들, 더없는 행복 등으로 이어지고, 돔의 맨 아랫부분에는 중대한 죄와 지옥을 그렸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여덟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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