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아홉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1-30 07: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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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대성당의 정문 맞은편에 있는 팔각형 건물이 성 요한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이다.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단테 알리기에리를 비롯한 피렌체의 유명한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 곳이다. 1059년에서 1128년 사이에 피렌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이 건물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다. 

세례당은 로마제국 시절 피렌체의 수호신이었던 군신 마르스에 헌정된 사원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하지만 20세기에 이뤄진 발굴조사결과, 로마성벽이 세례당이 있는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끝에 있던 감시탑의 자리에 세례당이 세워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세례교회가 지어졌고, 이는 6세기경에 또 다른 초기 세례교회로 대체됐을 것으로 보였다.

세례당은 피렌체 출신 교황 니콜라스2세의 축성으로 1059년경부터 짓기 시작해 1128년 완공됐다. 건설에 소요된 대리석은 1078년 피렌체가 정복한 피에솔에서 가져왔고, 일부는 고대의 건축물에서 나왔다. 8각형으로 된 세례당의 직경은 25.6m로 대성당 돔의 절반에 가깝다. 

요한 세례당의 팔각형 형태의 건축은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수세기 동안 전해진 세례당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숫자 8은 기독교에서 재생을 의미한다. 6일에 걸친 창조의 시간에 이은 휴식의 날, 그리고 다음날 성스러운 세례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례당은 8개의 피라미드꼴 지붕으로 만든 8각형 돔으로 덮었다. 같은 크기와 모양의 측면은 지붕 아래에 흰색의 카라라 대리석과 초록색의 프라토 대리석을 이용해 3개의 기하학적 패널로 장식된 밴드가 들어간 직사각형의 층을 배치했다. 중간층에는 게이블이 있는 창문이 삽입돼 있는 3개의 아치를 뒀고, 아치 아래에는 각각 3개의 단순한 형식의 아치가 받치고 있다. 


맨 아래층은 면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다. 동, 남, 북, 3개의 방향에는 각각 출입구를 두고 청동문을 달았으며, 서쪽에는 출입문이 없는 대신 직사각형의 상자형태가 돌출된 구조가 중간층까지 올려져있다. 나머지 4개 방향의 아래층은 장식이 없이 단순한 형태이다. 3개의 출입구에는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3개의 청동문이 유명하다. 남쪽 문은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가 제작했고, 북쪽 문과 동쪽 문은 로렌조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의 작품이다.  

피사노가 만든 남쪽문은 1336년에 완공됐는데, 28개의 패널이 4개씩 7단으로 나뉘어있다. 위로부터 20개의 패널에는 세례 요한의 삶에서 중요한 장면이 묘사됐고, 아래쪽의 8개의 패널에는 희망, 신앙, 자선, 겸손, 불굴의 태도, 절제, 정의와 신중함의 8가지 미덕을 묘사했다. 원래는 성 요한 세례당의 동쪽에 달려있던 것을 1452년 남쪽으로 옮겨 달았고, 그 때 기베르티가 제작한 돋을새김이 있는 문틀을 달았다. 문 위에 있는 청동상들은 세례 요한의 참수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1571년 빈첸조 단티(Vincenzo Danti)가 제작한 것이다.

기베르티가 만든 북쪽문은 1401년에 공모를 시작하였는데 기베르티와 피렌체 두오모의 돔을 제작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결선에 올랐고 기베르티의 설계가 최종 선정됐다. 원래는 동쪽에 달기로 했던 것을 새로운 동문의 설계가 기베르티에게 다시 위촉되면서 북쪽에 달게 됐다. 금박을 입힌 이 문을 제작하는데 21년이 걸렸다. 역시 4개씩 7단으로 배열한 28개의 패널로 구성됐다. 

위쪽의 20개 패널에는 신약성경의 이야기를 묘사했고, 아래에서 두 번째 열에는 네 명의 복음사가를, 그리고 맨 아래 열에는 암브로스(Ambrose), 제롬(Jerome), 그레고리(Gregory), 오거스틴(Augustine) 성인 등 4명의 교부들을 묘사했다. 북문 위에 있는 청동상은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프란체스코 루스티치(Francesco Rustici)의 작품이다.

역시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문은 1425년 의뢰를 받아 27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했다. 역시 금박을 입힌 10개의 패널로 구성됐다. 기베르티는 그 무렵 발견된 원근법을 적용해 작품의 깊이를 더했다. 각각의 패널에는 하나 이상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예를 들면 “요셉의 이야기”에는 형제들에 의하여 우물에 던져진 요셉, 상인에 팔린 요셉, 파라오에게 전해진 요셉, 파라오의 꿈을 해석한 요셉, 요셉에게 영예를 수여한 파라오, 야곱이 아들들을 이집트에 보냈고, 이들을 알아본 요셉은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담겼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을 천국의 문(Porte del Paradiso)이라고 명명한 이후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세기 뒤에,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는 “모든 면에서 명백한 완벽하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들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했다. 

내부에 들어서면 웅장한 천정 모자이크화에 압도당하게 된다고 했다. 가운데 랜턴을 중심으로 5개의 층으로 나뉜 모자이크가 테를 이루고 있다. 랜턴 아래로 빙둘러가며 천사합창단을 그렸고, 그 아래로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그 아래로는 요셉이야기, 그 아래로는 마리아와 예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테두리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다만 서쪽 앱스 위쪽으로는 천사합창단 아래로 나머지 층을 통합해 최후의 심판을 그려 넣었다. 

천정 모자이크화는 1225년 프란체스코회의 수사 자코부스(Jacobus)가 시작해 13세기의 마지막 무렵까지 그려졌다. 자코부스와 그 문하생들이 그린 최후의 심판은 가장 크고 중요한 이미지이다. 열정적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이 양편으로 늘어선 가운데 장엄한 모습의 그리스도가 중앙에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구원받아 기쁨에 차 무덤을 떠나는 자들을, 왼쪽으로는 저주받은 자들을 그렸다. 사악한 짓을 한 자들은 불에 태워지고, 꼬치에 꿰여 구워지거나, 돌에 맞아 만신창이가 됐으며, 뱀에 물리거나 끔찍한 짐승들에 씹히고 있다. 

다소 어두운 내부는 3개의 층으로 나뉘는데, 천정화가 그려진 층과 통로가 있는 2층 갤러리가 있고, 아래층은 통로를 받치는 화강암 기둥과 벽면으로 구성된다. 벽은 외부처럼 흰색의 카라라 대리석과 프로토의 녹색 대리석을 이용하여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었다. 바닥에도 정교한 모자이크를 새겨 넣었다. 

성 요한 세례당에는 8각형의 세례반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산타 레파라타 교회에 있던 것을 1128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 세례반은 1571년 프란체스코 이 데 메디치 대공의 명에 따라 없앴으며, 지금 있는 것은 1658년에 설치한 더 작은 것으로 남쪽 문 가까이에 있다. 

단테는 세례를 받는 중에 익사할 위험에 빠진 아기를 구하기 위해 세례반을 발로 차 쓰러뜨렸다고 ‘신곡’ 지옥편에 적고 있다. “이들은 내 아름다운 성 요한 성당에서 / 세례를 받는 자들을 위한 곳으로 만들어진 / 구멍들보다 더도 덜도 커 보이지 않았다. // 몇 년 전 나는 그 구멍들 중 하나를 부순 적이 있었다. / 그 안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 나의 이 말이 사람들의 소문을 닫았으면 좋으련만.” 

아마도 단테가 세례반을 파괴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또한 ‘신곡’ 천국편에 성요한 세례당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적은 것을 보면, 단테는 언젠가 피렌체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변한 목소리와 또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으로 /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내가 / 세례를 받은 샘에서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성 요한 세례당에는 로마 가톨릭이 혼란에 빠져 아비뇽의 베네틱토 13세를 비롯해 그레고리 12세 등과 함께 3명의 교황이 존재하던 시기의 또 다른 교황 지오반니 23세의 무덤 외에도 라니에리(Ranieri)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무덤 등 피렌체의 유력인사의 관이 들어있다. 로마 시대의 석관들도 가지고 있다. 

시선을 조토의 종탑으로 옮겨보자. 피렌체 대성당의 한 요소이지만 따로 세워진 종탑은 조토가 건축을 시작했다. 1302년 대성당 건축을 맡았던 캄비오가 죽고 30년이 지난 뒤에 유명한 화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가 후계자로 지명됐다. 당시 67세였던 조토는 대성당의 종탑의 설계와 건설에 힘을 쏟았다. 

조토는 캄비오가 대성당 건축에 적용한 여러 색깔의 대리석을 사용한 방식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고딕양식의 특징인 선조 골격을 대신해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하는 변화를 주었다. 한 변이 14.45m인 사각형의 바닥에 84.7m 높이로 대리석을 쌓아올렸다. 종탑은 5개의 층으로 구분된다. 

1337년 조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종탑은 겨우 아래층만 마감되었을 뿐이었다. 카라라 (Carrara)의 흰 대리석, 프라토(Prato)의 녹색 대리석, 시에나의 붉은 대리석을 이용해 기하학적 무늬를 완성했다. 조토가 완성한 아래층의 세 면에는 각각 7개의 돋을새김으로 장식한 6각형 패널이 들어갔다. ‘7’이라는 숫자는 성경에 적힌 완성된 인간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성 요한 세례당의 남문을 제작한 피사노가 1343년부터 조토에 이어 종탑건설을 맡아 2개 층을 더 올렸고, 이어서 프란체스코 탈렌티(Francesco Talenti)가 이어받아 1359년에 마무리했다.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에는 흑사병이 돌아서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도 있었다. 탈렌티는 조토가 설계한 첨탑을 올리지 않고 건설을 끝냈기 때문에 종탑의 높이는 설계된 122m보다 낮은 84.7m에 머물게 됐다. 

지상에서 꼭대기까지는 414개의 계단이 설치돼있다. 종탑의 벽을 장식한 6각형의 패널과 마름모꼴의 장식에는 우주의 질서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했고,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돋을새김으로 담았다. 종탑의 종루에는 1705년에 주조된 직경 2m, 무게 5385㎏인 캄파노네(Campanone)를 비롯해 1956년에 주조된 것까지 7개의 종이 걸려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아홉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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