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무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2-03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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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대성당을 떠나 칼자이올리(Calzaiuoli) 거리를 걸어 시뇨리아광장으로 이동했다. 광장으로 가는 길 양편으로 샤넬 등 명품가게들이 이어진다. 이 길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장인들이 길드를 이뤄 장사를 하던 곳이라고 했다. 중간에 보면 오르산미켈레 교회 및 박물관(Orsanmichele chiesa e mvsea)이 있다. 

산 미켈레(San Michele) 수도원의 부엌 정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1337년 프란체스코 탈렌티(Francesco Talenti), 네리 디 피오라반테(Neri di Fioravante), 벤치 디 키오네(Benci di Cione) 등이 곡물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사각형 건물 1층에는 곡물 시장의 로지아를 구성하는 13세기 아치가 있다. 2층은 사무실로 사용했고, 3층에는 기근이나 적의 포위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곡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1380년과 1404년 사이에는 피렌체에서 급부상한 공예와 무역길드의 구성원들이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으로 사용됐다. 1399년 의사와 약제사(Medici e Speziali) 길드가 후원해 피에트로 디 조반니 테데스코(Pietro di Giovanni Tedesco)가 제작한 ‘로즈의 마돈나’를 건물 외벽 벽감에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601년 치안판사와 공증인(Giudici e Notai) 길드가 후원하고 잠볼로냐(Giambologna)가 제작한 ‘루가 성인’의 청동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14개의 벽감이 설치됐다.

건물의 정면에는 세 개의 벽감이 있는데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은 ‘루가 성인’의 청동상이며, 가운데의 것은 상인 트리부날레 디 메르칸지아(Tribunale di Mercanzia)가 후원해 안드레아 델 베로 키오(Andrea del Verrocchio)가 1467년에서 1483년 사이에 제작한 ‘그리스도와 성 토마스’ 청동상이다. 가장 왼쪽은 칼리말라 상인조합(Arte di Calimala)이 후원해 1414~1416년 사이에 기베르티가 제작한 ‘세례 요한’ 청동상이다.

오르산미켈레 박물관의 조각들은 피렌체 무역상들의 헌신과 자부심의 유물이며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위대한 예술이 생겨났음을 시사한다. 상인들은 피렌체의 중요한 곳에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물을 제작할 때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늘날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사본이며, 원본은 매주 월요일에만 열고 있는 교회 위층의 박물관에 보관돼있다. 도나텔로가 제작한 두 작품은 피렌체의 다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오르산미켈레 박물관에서 조금 더 가면 L자 모양의 광장이 나타난다. 피렌체에서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는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이다. 시뇨리아 광장은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이라고도 불리는 시뇨리아 궁전(Palazzo della Signoria)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베키오 궁전은 피렌체 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피렌체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지금까지도 이 도시의 정치적 중심이 되고 있다. 

베키오 궁전, 시뇨리아 회랑(Loggia della Signoria), 지금은 농업국이 들어 있는 상업재판소(Tribunale della Mercanzia) 궁전, 라파엘이 전면을 장식한 우구치오니(Uguccioni) 궁전 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가운데 코시모 데 메디치 1세의 기마상이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 넵튠 분수와 도나텔로가 제작한 청동상 ‘유디스와 홀로페르네스’가 있다. 

1299년 피렌체공화국은 위상에 걸맞은 궁전을 짓기로 했다. 피렌체 공화국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설계는 피렌체 두오모와 산타 크로체교회를 지은 아르놀포 디 캠비오가 맡았고, 부지는 우버티(Uberti) 가문의 판티궁전(Palazzo dei Fanti)을 허물고 지었다. 구엘프(Guelfi)에 속했던 우버티 가문은 피렌체와 기벨린(Ghibellini)의 반란군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11세기말,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기독교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인 서임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이때 교황을 지지하던 세력을 구엘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던 세력을 기벨린이라 했다. 구엘프와 기벨린의 대결은 2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구엘프에는 신흥 상업가문이 가담했고, 기벨린에는 전통 귀족가문이 가담했다.

석재를 쌓을 때 만나는 곳이 우묵하게 파이도록 하는 건목치기 양식을 적용한 입방체의 베키오 궁전 2층과 3층에는 한 쌍의 세모꼴 아치로 구성된 창문들이 있다. 오른쪽 귀퉁이에 서 있는 94m 높이의 종탑은 포라보스키(Foraboschi) 가문의 고대 탑, 라 바카(La Vacca, 암소)를 하부 구조로 이용한 것으로 설계자의 이름을 따서 아르놀포의 탑(Torre d' Arnolfo)이라고 부른다. 

탑에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는데, 1435년에는 코시모 메디치를, 1498년에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가두었다. 탑의 중간에 걸려있는 시침만 있는 시계는 1353년 니콜로 베르나르도가 제작했던 것인데, 1667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게오르그 레더러(Georg Lederle)가 만든 복제품으로 교체됐다.

궁전 입구의 왼편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복제품이, 오른편에는 바키오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가 대리석으로 조각한 ‘헤라클레스와 카코’ 조각상이 서 있다. 입구의 위쪽에는 두 마리의 금박을 입힌 사자상을 새겼고, 그 사이에는 ‘왕중의 왕 그리고 주님의 주님’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Rex Regum et Dominus Dominantium’가 적혀있다. 위에는 영광으로 감싸인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 기독교 교회의 종교적 상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것)을 새겼다.

입구를 통과하면 첫 번째 안마당이 나타난다. 1453년 미켈라쪼(Michelozzo)가 설계한 안마당 가운데에는 바티스타 델 타다(Battista del Tadda)가 만든 반암 분수대가 놓였다. 분수대 위에는 돌고래와 함께 있는 푸토(Putto, 통통한 남자 아이로 묘사되는 예술작품의 인물을 가르키는 이탈리아 단어)가 얹혀있다. 이 조각상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작품으로 카레기(Careggi)에 있는 빌라 메디치의 정원에 있던 것을 옮겨놓았다.

첫 번째 안마당과 두 번째 안마당 사이에 있는 계단은 친궤첸토의 살롱(Salone dei Cinquecento)으로 연결된다. 길이 52m, 폭 23m인 이 방은 메디치가문이 추방된 뒤에 사보나롤라(Savonarola)에 의해 공화국의 영적 지도자로 추천된 시모네 델 폴라이올로(Simone del Pollaiolo)에 의해 1494년에 만들어졌다. 벽에는 피렌체가 승리를 거둔 유명한 전투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들로 장식돼있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그린 카시나(Cascina) 전투를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앙기아리(Anghiari) 전투 등을 그린 것들은 사라져 이제 볼 수 없다.

로지아 델라 시뇨리아(Loggia della Signoria)라고도 하는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는 베키오 궁전의 오른쪽에 있는 열린 회랑형식의 건물이다. 1376년에서 1382년 사이에 벤치 이 치오네(Benci di Cione)와 시오네 디 프란체스코 탈렌티(Simone di Francesco Talenti)가 야코포(Jacopo)의 설계에 따라 지었다. 

코린트양식의 주두를 가진 기둥들이 아치를 지지하고 있다. 아치 위에는 용기(Fortitude), 절제(Temperance), 정의(Justice), 신중함(Prudence) 등의 덕목을 담은 4개의 세잎장식(Trefoils)을 걸었다. 아그놀로 가디(Agnolo Gaddi)의 작품이다. 회랑에는 골동품 및 르네상스 시절의 조각 작품을 전시한 야외 조각 갤러리다.

로지아의 맨 왼쪽에 있는 청동상은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로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작품이다. 받침대의 4면의 벽감에는 각각 주피터(Jupiter), 머큐리(Mercurius), 미네르바(Minerva), 그리고 페르세우스의 어머니 다나에(Danaë)의 청동상이 들어있다. 그 뒤에 있는 석상은 피오 페디(Pio Fedi)가 1865년에 제작한 ‘폴리세나의 강탈’이다.

폴리세나(Polyxena)는 트로이의 프리아모스(Priamos)왕과 헤카베(Hecabe) 왕비의 딸이다. 아킬레우스에게 죽음을 당한 헥토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파리스, 그리고 예언능력이 있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카산드라 등이 오빠와 언니다.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헥토르를 애도하는 폴리세나를 본 아킬레우스는 사랑에 빠져 전쟁을 끝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청혼을 했고, 폴리세나 역시 아킬레우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에 숨어있던 파리스가 화살을 쏘아 아킬레스의 약점을 맞췄고, 아킬레우스가 죽음을 맞았다. 트로이전쟁이 끝나고 그리스 군이 물러날 때 아킬레우스의 유령이 나타나 폴리세나를 죽여 자신의 무덤에 합장해달라고 요구했다.

페디는 숨어있던 폴리세나를 찾아낸 그리스 군사가 끌어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왼손에는 폴리세나를 안고 오른손에 든 검으로 헤카베를 베려 하고 있다. 헤카베가 밀고자를 딛고 그리스 군사의 손에 붙잡힌 폴리세나를 붙들려 안간힘을 쓰는 순간을 묘사했다. 두 여인의 머릿결은 물론 몸에 흘러내리는 옷자락의 주름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돼있다. 

가운데 있는 석상은 ‘파트로클로스(Patroclus)의 시신을 부둥켜안은 메넬라우스(Menelaus)’라는 로마시대의 조각품을 복원한 것이다. 기원전 그리스의 페르가몬에 있던 조각상을 고대 로마의 플라비아 시기에 복사한 것으로 코시모 메디치 1세가 로마에서 구입해 가져온 것이다.

오른쪽 앞에 있는 석상은 플랑드르 출신의 장 드 불로뉴(Jean de Boulogne)의 ‘사비네(Sabine) 여성의 강탈’이다. 그는 지암볼로냐(Giambologna)라는 이탈리아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로지아의 오른쪽 뒤에 있는 ‘켄타우로스를 가격하는 헤라클레스’도 1599년에 그가 제작한 것이다.

로지아의 뒤편에는 대리석에 조각한 마티디아(Matidia), 마르키아나(Marciana), 소 아그리피나(Agrippina Minor), 사비네스(Sabines) 그리고 바바리아의 죄수 투스넬라(Thusnelda) 등, 5개의 여성동상이 있다. 트라야누스 황제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이르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무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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