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2-12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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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성기형태의 표지를 따라가 보니 유곽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도착했다. 라틴어로 루파나레(lupanare)라고 적혀있는데, 매음굴이라는 의미다. 겉으로 보아서는 다른 집들과 구분이 되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갔을 때 처음 살던 동네가 이랬다. 

우리가 살던 이웃집이 바로 그런 집이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현관이 있는데 벽에 퇴색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상당히 야한 내용이다. 늘어선 작은 방들이 그런 용도로 쓰인 듯한데, 겨우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돌침대가 끝에 있고, 방도 꽤나 협소하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주택가였던 듯, 창문은 없고 벽돌을 쌓아올린 집들이 이어져 엄숙한 느낌을 주는 골목도 있다. 그런가하면 철창살로 가로막아 놓았지만, 입구의 바닥에 타일로 모자이크를 새겨놓은 집도 있는데, 현관을 지나면 꽤 넓어 보이는 정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이 살던 집이었나 보다. 골목을 걷다보면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곳도 있다. 호기심 많은 관광객이 던지는 질문에 쑥스러워하는 표정이다. 

골목을 이리저리 돌다보니 다시 포럼이다. 제우스신전의 오른쪽으로 벽돌로 쌓은 아치형 문이 있다. 베수비오화산이  아치 안으로 자리한 장소가 인증샷을 찍는 장소라고 했다. 아치형 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포럼 목욕탕이다. 폼페이에는 포럼 목욕탕, 스타비안 목욕탕, 중앙 목욕탕 등 3개의 주요 목욕탕이 있었다. 

포럼 목욕탕은 가장 작지만 가장 우아한 목욕탕이었다.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목욕하는데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탈의실, 냉탕, 온탕, 열탕은 물론 운동시설과 화장실까지 있었다. 물론 남성과 여성이 따로 목욕할 수 있도록 출입구가 분리되어 있었다. 포럼 목욕탕은 공공기금으로 지어졌고, 관청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포럼 목욕탕 건너편에 있는 건물은 현관 바닥에 모자이크로 사나운 개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카베 카넴(cave canem)이라고 적혀있다. ‘개조심’하라는 표시가 유래된 유명한 모자이크다. 이 집은 비극시인의 집(Casa del Poeta Tragico)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머의 집 혹은 일리아드의 집이라고도 부르는 이집은 1824년 고고학자 안토니오 보누치(Antonio Bonucci)가 발견한 이 집은 많은 프레스코벽화와 모자이크화가 있어 학자들과 작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현관도 투명판을 통해서만 들여다 볼 수 있는데, 현관 너머에는 안마당이 있다. 안마당 가운데는 움푹 파인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어 빗물을 모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안마당을 둘러싼 네 개의 벽에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안마당 건너편에는 사무실(tablinum)이 있는데, 이곳의 바닥에는 현관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모자이크로 장식돼있다고 한다. 플루트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고, 공연을 위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장면이다. 바로 이 장면 때문이 이 집을 ‘비극시인의 집’이라고 부르게 됐다.

사무실 다음에는 기둥들로 둘러싸인 안뜰이 나온다. 눈속임이라고 하는 트롬판토요(trampantojo) 기법을 적용한 가상의 정원의 벽에는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이라고 알려진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이피게네이아의 비극은 트로이와의 전투를 준비하던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저주로 바람이 불지 않아 출정을 못하고 있던 중에 이피게네이아를 희생물로 바치라는 신탁을 얻은 데서 시작한다. 

아킬레스와 혼인하게 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온 이피게네이아를 희생하려는 순간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아르테미스가 용서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 대신 사슴을 희생물로 받고,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의 신전에서 제관으로 일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분노한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전쟁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을 살해했고, 두 사람이 낳은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이 집의 장식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는 영국작가 에드워드 불워리톤(Edward Bulwer-Lytton)이  1834년에 발표한 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s of Pompeii)’과 블라디미르 야노빅(Vladimir Janovic)의 장편 서사시 ‘비극시인의 집(The House of the Tragic Poet)’이 있다. 

비극시인의 집 왼쪽에는 예우스 아레이우스 니기디우스 마이우스의 집(Gnaeus Aleius Nigidius Maius)이라고도 부르는 판사의 집(Casa di Pansa)이 있다. 1813년 처음 발견돼 몇 차례 발굴 끝에 1943년에 발굴이 마무리됐다. 상점과 숙박시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집은 복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벽에는 일부 회반죽이 남아있지만 어떤 내용의 그림이 그려졌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현관에서 네모난 빗물 저수조가 있는 안뜰(impluvium)로 바로 연결되며 작은 사무실(tablinum)이 있다. 작은 사무실 뒤로는 이오니아식 기둥 6개가 서 있는 안뜰이 있다.

판사의 집에서 조금 더 올라가 왼쪽으로 돌아가면 빵집(Casa del Forno)이 있다. 문을 들어서면 먼저 정원에 흩어져 있는 제분기들을 볼 수 있다. 끝을 둥그렇게 다듬은 원뿔 모양의 바윗돌이 있고, 그 위에 맞춤하게 밑이 둥그렇게 파인 바윗돌이 얹혀있다. 위에 얹혀있는 돌의 옆구리에 뚫려있는 구멍은 당나귀를 매거나 혹은 노예가 밀 수 있도록 막대기를 꽂은 흔적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자방아라고 하는 도정기구 혹은 제분기구가 있었는데, 폼페이의 제분기구는 우리네 연자방아와는 규모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폼페이에는 30개가 넘는 빵집이 성업 중이었다고 한다. 마당 한켠에는 반원형의 입구가 있는 오븐이 있다. 반죽한 빵을 오븐에 넣어 구워냈을 것이다.

다시 포럼으로 돌아와 아폴론 신전을 구경했다. 기원전 7~8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들어온 아폴론은 훗날 주피터신이 주신(主神)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폼페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이었다. 아폴론 신전은 모두 48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는 페리테로(peripteros) 형식의 건물로서 기둥은 그리핀, 꽃줄기와 꽃잎 등으로 치장된 프리즈로 이어졌다. 28개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바탕으로 한 성전은 안뜰의 뒤편에 있는 연단 위에 있었다. 

지금까지 폼페이의 유적을 돌아본 소감은 ‘그 옛날에도 이처럼 호사스러운 도시를 건설한 로마사람들이 참 대단하다’, 혹은 ‘흥청망청했구나’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모아둔 야외 박물관에 도착하는 순간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사용하던 단지와 같은 생활용품은 그렇다고 쳐도, 베수비오 화산이 쏟아낸 화산재와 용암에 묻혀있던 사람들을 발굴과정에서 석고를 부어 떠낸 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숨진 다음에 묻힌 듯한 어린이부터 끔찍한 상황을 어서 멈추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 쏟아지는 화산재를 피하려 안간힘을 쓰는 처절한 모습 등을 차마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잠시 그들을 위로하는 기도를 바치고는 물러났다. 

폼페이 유적을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본 장소는 비너스 신전이었다. 비너스신전은 폼페이의 수호여신이었을 뿐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루시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의 수호여신이었다. 비너스신전은 고대 로마가 폼페이에 식민지를 건설한 직후에 지어 비너스에게 헌정됐다. 

비너스 신전이 들어선 장소는 폼페이의 남서쪽 항구와 교회의 사이에 있는 테라스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였다. 성전 터를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있던 개인 소유의 많은 건물들을 헐어내야 했다.

첫 번째 사원의 규모는 300㎡ 정도였다. 하지만 2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파괴돼 다시 지었다. 베수비오화산이 분출할 당시에도 62년의 지진으로 무너진 신전을 세 번째 건설하던 중이었다. 지진이 일어난 직후 신전을 더 크게 짓는 재건작업이 시작됐다. 신전 정면에 있던 계단을 떼어내고 표석을 양쪽에서 잘라냈다. 사방으로 넓이 1.5m 이상으로 현무암 덩어리를 쌓아 기초를 다졌다.

그런 단계에서 재건이 중단된 비너스신전에서 본 청동상은 다소 생경스럽다는 느낌이었다. ‘화산재 속에서 꺼낸 것 맞나?’싶었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폴란드의 현대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지(Igor Mitoraj, 1944-2014)의 청동작품 ‘데다로(Dedalo, 2010)’라고 했다. 2016년 5월 15일부터 2017년 1월 8일까지 폼페이 유적 곳곳에 설치한 폴란드 출신 프랑스 조각가의 청동조각 전시회, ‘미토라지 아 폼페이(Mitoraj a Pompei)’ 당시 설치했던 작품인가보다.

그리스신화에서 크레타 섬에 있는 미노타우루스를 가둔 미로를 설계한 건축가 다이달로스이다. 미노스 왕이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미궁에 가두자 새털을 모아 만든 날개를 달고 미궁을 탈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는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잊고 하늘 높이 날았다가 새털을 붙인 아교가 녹아내리는 바람에 추락해 죽었다. 다이달로스의 청동상을 비너스 신전에 배치한 미토라지는 다양한 형태의 이카로스 청동상을 만들어 델아본단자(dell'Abbondanza) 거리를 비롯해 스타비안 목욕탕, 교회 등에 세웠다고 한다. 

미토라지는 고대 유적을 전시장으로 자신의 조각 작품을 전시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이탈리아 제3의 기둥재단(Fondazione Terato Pilastro)의 의장인 에마뉘엘 에마누엘레(Emmanuele Emanuele)교수는 “미토라지의 ‘현대 예술적 표현’을 고대사의 현장에 배치하면, ‘고대와 현대의 완벽한 공생’을 창출해낸다.”라고 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세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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