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네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2-16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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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을 나오면서 시간을 보니 약 1시간 정도 돌아본 것 같다. 현지가이드가 꼭 보아야 할 것들을 챙겼을 것으로 생각은 하지만 여행기를 정리하다보니 원형경기장을 비롯해 외과의사와 내과의사의 집 등은 개인적으로 꼭 구경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일종의 직업병 때문이다.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 버스를 내린 곳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으로 가다보니 오렌지와 주먹보다 큰 레몬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가게를 다시 만났다. 햇볕이 많은 곳에 왔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식사를 하는데 기타 반주에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는 이가 등장했다. ‘오 솔레미오’, ‘돌아오라 소렌토로’, ‘푸니쿨리푸니쿨라’ 등 우리 귀에서 익숙한 곡들이다.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면서 들었던 ‘오 솔레미오’가 뭔가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폴리 만에서 듣는 ‘오 솔레미오’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식사 후에 찾아갈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이어졌기 때문일까? 그리고 보니 ‘푸니쿨리푸니쿨라’는 노래가 시작한 베수비오화산 인근에서 듣게 되니 제대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식사 중이라서 박수로 박자를 맞춰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일행 가운데 노래 값을 치르는 분이 계셨다. 노래를 좋아하시나 보다. 

점심을 먹고 난 12시15분에 모여 폼페이 기차역으로 갔다. 폼페이 역은 깔끔해보였지만, 막상 플랫폼에 들어섰더니 선로가 두 개밖에 없는 간이역 비슷한 느낌이다. 전철을 40여분 타고 소렌토 역으로 갔다. 선택관광 일정인 카프리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렌토로 간다. 폼페이와 소렌토를 연결하는 열차구간은 절반 이상이 터널이었다. 이탈리아반도의 서쪽 해안을 더듬어가는 기차여행은 동굴 속을 달리는 여행인가보다. 

2007년 기준 1만6547명이 사는 소렌토는 나폴리만의 남쪽을 감싸는 소렌트 반도 끝에 위치하며, 만 건너편에 있는 나폴리와 반도의 뿌리 쪽에 있는 폼페이를 조망할 수 있다. 소렌토반도의 남쪽 해안의 절벽 위를 따라 아말피를 거쳐 살레르노까지 내려가는 아말피 해안의 그림 같은 절경이 유명하다. 

버스에서 내려 소렌토항을 찾아가는 길에 길가에 서 있는 흉상이 눈길을 끈다. 이탈리아어는 잘 모르지만 어림짐작으로 ‘토르나 수리엔토(Torna a surriento)’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역시 맞았다.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가사를 쓴 시인이자 화가인 지암바티스타 데 쿠르티스(Giambattista De Curtis)였다. 

1902년 이탈리아의 총리 주세페 자나르델리(Giuseppe Zanardelli)가 소렌토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구로리엘모 트레몬타노(Gulorielmo Tramontano) 소렌토 시장이 친구인 지암바티스타에게 노랫말을 부탁했던 것이다. 지암바스타가 쓴 시에 그의 형이자 음악가인 에르네스토 데 쿠르티스(Ernesto De Curtis)가 곡을 썼다. 이 노래는 1905년 공식적으로 저작권을 얻었는데 ‘오 솔레미오’, ‘산타 루치아’, ‘푸니쿨리푸니쿨라’ 등과 함께 이탈리아 가곡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노래가 됐다.

클라우드 아벨링(Claude Aveling)이 ‘Come Back to Sorrento’라는 제목으로 영어가사를 썼고, 독 포머스(Doc Pomus)와 모트 슈만(Mort Shuman)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위해 ‘Surrender’라는 새로운 가사를 썼다. 김학용의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우리말 가사도 참 아름답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 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 /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 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 /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하지만 제발 떠나지마. / 내게 이런 고통을 주지마. / Surriento로 돌아와서, / 나를 살려 줘!(But please do not go away, / do not give me this pain. / Come back to Surriento, / let me live!)”라고 애걸복걸하는 듯 마무리하는 자학적인 느낌의 영어가사보다도 우리말 가사가 얼마나 은근하고 마음을 움직이는가 말이다. 

버스를 내려 한적한 길을 한참 걷다보니 타소광장(Piazza Tasso)에 이른다. 16세기 이탈리아 시인 토르쿼트 타소(Torquato Tasso)의 이름을 딴 광장이다. 타소가 1581년에 발표한 장편 서사시 ‘예루살렘 해방(La Gerusalemme liberata)’은 부용의 고드프리(Godfrey of Bouillon)가 이끄는 기독교 기사단이 예루살렘을 탈취하기 위해 무슬림과 싸우는 첫 번째 성전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통의 로맨틱 서사시이다. 

타소광장에서 바다 쪽으로 난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끼어든 도로가 내려다보이는데, 바로 이 길이 항구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 길을 따라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에 내려가 보니 아찔한 절벽 아래에 그리 넓지 않는 공간이 있어 배를 타는 부두를 만들었다. 바다 건너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도시가 바로 나폴리다. 

1시 반에 떠나는 카프리행 배를 기다리며 소렌토의 해안을 산책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지 않아서 카프리 섬으로 가는 배가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카프리 섬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여행시즌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이 복을 받았다고 했다. 정시에 출항한 배가 항구를 빠져나가자 바로 커다란 너울을 탄다. 

바다는 거칠어 보이는 않지만 파도는 넓고 깊은가보다. 그동안 세심한 부분까지 챙겨오던 현지가이드가 멀미약을 가져와 일행들에게 나누어 준 덕에 멀미를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필자는 평소 멀미를 하지 않는 편이라서 따로 약을 먹지는 않았다. 마침 읽고 있던 ‘그대의 마음에 고요가 머물기를’에 나오는, “스스로 바다가 되지 않으면 날마다 뱃멀미를 앓을 것”이란 레너드 코언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날씨가 좋은 탓에 배가 순항을 해서 40분 만에 카프리 섬에 도착했다. 카프리 섬(isola di Capri)은 나폴리 만에 연한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에 위치한 석회암과 사암으로 된 섬이다. 섬의 가장자리는 대부분 절벽이다. 마리나 그랑데(Marina Grande, 큰 항구)와 반대편에 있는 마리나 피콜라(Marina Piccola, 작은 항구) 등 두 개의 항구가 있다. 

항구에 도착하면 절벽 위에 있는 마을로 올라가기 위해 리프트를 타던지 아니면 꼬불꼬불하게 낸 도로를 올라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10.4㎢의 면적에 최고봉이 해발 589m인 카프리 섬에는 2002년 기준 1만2200명이 거주한다. 두 개의 시정촌(comuni)이 있는데, 섬의 동쪽과 중앙은 카프리에, 서쪽은 아나카프리에 속한다. 

카프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이 섬을 처음 개척한 것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었는데, ‘야생 멧돼지’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κάπρος(카프로스)’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오래된 멧돼지 화석이 발견돼 이 설을 뒷받침하게 됐다. 그런가하면 로마사람들은 염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capreae’라고 불렀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이 섬에 사람이 살았던 시기는 청동기를 거슬러 신석기 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카프리가 휴양지로 떠오른 것은 동쪽 해안에 별장으로 바다궁전을 지은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이다. 뒤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는 카프리 섬 여러 곳에 빌라들을 지었다. 동쪽 끝에 있는 빌라 조비스(Villa Jovis)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보존 된 로마 빌라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 티베리우스황제는 서기 27년에 카프리로 이주해, 37년에 죽을 때까지 제국을 다스렸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카프리는 나폴리를 지배하는 세력의 통치를 받았지만, 해적들의 공격에 시달렸다. 19세기 후반부터 카프리는 유럽의 예술가, 작가 및 기타 유명인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가 됐고, 카프리를 대상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서머싯 몸의 단편 ‘몽상가(The Lotus Eater)’의 무대이기도 하다. 또한 카프리는 외국의 동성애자들에게도 비교적 안전한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독일의 화가이자 작가인 아우구스트 코피쉬(August Kopisch)가 1826년에 독일어로 발표한 ‘카프리섬에서 발견한 푸른 동굴(Entdeckung der blauen Grotte auf der Insel Capri)’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로마시대에 발견된 푸른 동굴(Grotta Azzurra)은 아나카프리의 북서쪽 해안 석회암 절벽에 있는 길이 60m 너비 25m의 해식동굴이다. 썰물 때 폭이 2m, 높이가 1m 정도의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데 작은 4인승 보트의 바닥에 누워야만 한다.

동굴 안은 푸른빛 혹은 에메랄드빛으로 가득 차있다. 빛은 입구와 그 아래 1~2m 폭의 바위로 구분된, 입구보다 열배는 큰 구멍을 통하여 들어온다. 햇빛에 포함된 붉은 빛은 바닷물에 걸러지기 때문에 푸른빛만이 동굴로 들어오는 것이다. 동굴 안에서 수영은 금지돼있다. 하지만 티메리우스 황제는 개인 수영장으로 사용했으며, 동굴 가장자리를 사원과 휴식공간으로 사용했다. 1964년에는 동굴바닥에서 로마신화에서 바다의 신인 넵튠과 트리톤의 조각상이 발견되어 아나카프리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네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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