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주년 기념/ 아픈 역사의 현장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강경/논산편]

기사승인 2019-02-26 05:00:00
- + 인쇄

- 군산, 강경, 목포 지역 ‘3.1운동 유적지와 일제 수탈 현장을 찾아서-

-강경은 천안 아우네 만세운동보다 22일 앞서 옥녀봉서 대한독립만세 외쳐-

- 어둡고 아팠던 역사, 되짚어보고 추념하는 다크투어(Dark Tour)’ 주목-

- 치욕의 역사, 다음 세대들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

올해는 일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맞서 전 민족이 분연히 일어선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쿠키뉴스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당시 일제의 쌀 수탈을 비롯해 경제 수탈이 극심했던 군산/익산, 목포, 강경/논산 지역을 찾았다.항일 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와 비록 일본식 건축물이긴 하지만 우리 땅에서 캔 흙과 돌, 나무와 선조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지은 적산가옥을 돌아보았다. 적산(敵産)은 뜻 그대로 해석하면 적국의 재산이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적산가옥들은 해방 후 미군정이 소유로 있다가 우리 정부에 귀속된 후 일반에게 불하했다.

-굴욕의 공간과 시간도 우리가 곱씹고 보존해야 할 역사-

누구에게나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과거는 기억 속에 조차 담아두고 싶지 않는 지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어둡고 아팠던 역사도 꼼꼼히 되짚어보고 추념하는 다크투어(Dark Tour)’가 주목 받고 있다.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커다란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고 체험하면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혹은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역사교훈여행으로 우리말로 다듬었다.

대표적 다크 투어리즘 장소로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해 한국의 다크 투어리즘 장소는 제주4·3평화공원을 비롯하여 거제포로수용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비무장지대(DMZ),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제주도 알뜨르 비행장 등이 있다

왠지 미워보였던 왜식 건물정도로만 취급받던 적산가옥들이 새롭게 역사교훈상품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도 역시 우리 역사이기에 네거티브 헤리티지(부정적 문화유산)’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가면서다.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난 군산, 목포, 강경, 인천, 영주, 구룡포 등 각 지역의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대표적 다크투어리즘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위원인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적산가옥은 당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당연히 적산가옥은 보존가치에 따라 지정문화재 혹은 등록문화재로 잘 관리해야한다. 종종 본래 취지에 벗어나 고증 없이 국적불명의 형태로 건물을 보수하거나 신축해 관광상품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서 유태인의 경우 홀로코스트 뮤지엄(Museum of the Holocaust)을 세계 곳곳에 만들어서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후손들에게는 생생한 역사 교육 현장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은 겉으로는 우방국이지만 뿌리 깊은 역사 문제로 인해 가깝고도 먼 나라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의 과오를 반성할 생각이 없다. 아직도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군사력 확장에 힘을 쏟는 일본을 바라보며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가족과 지인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다.

쿠키뉴스는 군산지역에 이어 강경지역의 3.1운동사와 만세운동 유적지, 적산가옥으로 불리는 근대건축물을 소개한다.

강경의 3.1운동사

-310일 옥녀봉서 첫 만세운동 시작으로 7차례 저항운동 -

-강경서 벌인 대규모 만세운동 논산 전역으로 번져-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한 저항의 도시-

191935일 충남 부여군 청포리 청포리교회 부속 창영학교 교사인 엄창섭은 군산영명학교 학생이었던 강금옥을 그의 고향인 익산군 대붕암교회(현 제석교회)에서 만난다.

군산에서 일어난 3.5 만세운동의 준비 및 전개과정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36일 청포리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준비한다. 그는 작은 농촌 마을인 청포리보다 강 건너 강경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수천 명이 모이는 310일 강경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엄창섭은 강경시장에서 태극기 제작에 필요한 종이와 염료를 구입했다.

39일 저녁 청포리 교회에서 6명의 교인들이 만세운동 거사 당일에 쓸 태극기 2백여 개를 몰래 만들었다. 제작한 태극기는 고추가마니로 위장해 310일 만세운동 장소인 옥녀봉(玉女峯) 아래 숨겨 놓았다.

엄창섭을 비롯 고상준, 추병갑, 김종갑, 추성배, 서삼종 등 6인의 결사대는 310일 금강을 건넌다. 마침내 약속했던 오후 3시가 되자 옥녀봉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창섭이 연단에 올라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독립에 관해 힘차게 연설을 하자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한국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북옥리 일본인 거주지를 통과하여 강경읍 장터까지 진출하였다. 장날인 10일 강경장터는 어느 때보다 붐볐다.

점차 시위 참가자가 늘면서 시장에 이르렀을 때는 5백 명에 이르는 군중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 해질녘까지 강경읍 각처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결국 만세운동을 주도한 엄창섭을 비롯 주동자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징역과 태형의 형량을 선고 받았지만 옥녀봉에서 시작된 강경지역의 3.10 만세운동은 이후 7차례 걸쳐 줄기차게 이어졌다. ‘3.10강경 만세운동은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41일 대규모로 벌어진 만세운동보다 무려 22일 앞선 것이다.

강경에서 시작된 7차례 만세운동

강경1차 시위: 1919-03-10 강경 장날 옥녀봉에서 500여 명 만세시위/ 주모자 17명 체포강경2차 시위: 1919-03-12 '천도교인들의 경찰서 앞 시위' 논산 천도교인이 독립선 언서 배포하다 손필규 외 2명 체포, 강경경찰서 앞에서 시민과 학생 백여 명 손필규 등의 석방 요구하며 시위

강경3차 시위: 1919-03-20 강경 옥녀봉에서 시장터까지 1천명 만세시위/ 주동자 4 명 체포. 강경성결교회 초대 감독이었던 영국 맨체스타 출신 존 토마 스 목사(John Thomas)가 일본경찰에 각목으로 구타당해 29군데 골절 상을 입어 영국과 일본국의 국제문제 발생. 결국 일본이 정식으로 사과하고 보상하게 된다. 보상금으로 구 강경성결교회 건축.

강경4차 시위: 1919-03-3 ‘무언의 저항강경 시장 상인들의 300여 호가 철시운동으 로 시위

강경5차 시위: 1919-04-01 ‘일본인 상점 방화강경 주민들이 일본인 상점에 방화 시위

강경6차 시위: 1919-04-04 ‘경찰서 공격과 왜경의 발포강경 장날에 5백 명이 만세 시위, 경찰 주재소 공격, 발포 진압/ 사망 3명 중 상 1

강경7차 시위: 1919-04-07 ‘야간 횃불 시위강경장날 시위에 대비하여 군경이 삼엄 한 경계, 주민들은 야간에 산상 봉화 시위

이처럼 강경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310일부터 47일까지 일제의 식민지 탄압에 맞서 줄기차게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다. 강경읍은 논산 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전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세운동이 전개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주로 옥녀봉과 시장을 중심으로 농민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운동의 불길이 꺼지지 않자 징역과 고문과 태형 등 일제의 탄압도 그만큼 극심하였다.

또한 강경은 192410, 전국에서 최초로 신사 참배를 거부해 강경교회 주일교사와 주일학교 학생 57명, 일반학생 5명 등이 면직과 퇴학을 당한 항일의 고장이다.

 강경의 만세운동 유적지와 일본 근대건축물

-100년 전 그날 찾아 떠나는 역사교훈 여행-

-강경은 평양대구와 함께 조선 3대 시장-

-일제 상흔 고스란히, 철거 대신 보존 택해 재생사업 지속 추진-

-인근 일제강점기 드라마 세트장도 인기-

조선왕조를 무릎 굻린 일제는 논산과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곡물을 강과 바다를 통해 실어 나르느라 강경 포구는 언제나 붐볐다. 그 시절 나라를 빼앗긴 민초들의 삶은 고단했지만 원산항과 함께 조선 2대 포구로 유동인구까지 합하면 10만의 인구가 붐비던 곳이었다. 현재 강경 인구의 10배가 넘는 숫자다. 지금은 논산시 인근의 조그만 읍에 불과하지만 1600년경에는 평양대구와 함께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일본은 강경의 개항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강경의 객주들은 일제에 맞서 개항을 저지했다. 그러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하고 군산선과 호남선, 장항선이 강경 주변으로 개통되면서 강경은 상업 중심지로서의 옛 영화를 잃었다.

강경은 과거 번성했던 포구답게 근대문화 자원도 많다. 1904년 강경에는 일본인 최초의 여관과 병원이 개업했고 1909년에는 재판소가 들어섰다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1년에 대형 극장이 중심가에 들어섰다비록 유쾌한 기억은 아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경은 개발의 광풍을 비껴간 덕에 일제 근대문화 흔적인 적산가옥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논산시 10건의 등록문화재 건물 중 9건이 강경에 자리하고 있다. 옛 연수당 건재약방 건물, 한일은행 강경지점 건물, 강경노동조합 건물, 구 강경성결교회건물,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현 강상고등학교), 강경공립보통학교 강당(현 강경중앙초등학교), 강경갑문, 강경배수장, 강경성당 등으로 강경성당(1961년 건축)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제 때의 건축물이다호남의원호남여관금성다방 등 보존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물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아쉬움도 많지만 그래도 군산에 버금가는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윤석일 강경역사문화연구원장은 강경 역시 일제의 수탈과 탄압으로 아픔이 많은 근대역사 도시라며 비록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지만 남아 있는 일제 건축물도 우리 선인들의 피땀으로 지어진 우리 건축물이다. 잘 보존해서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역사교훈 장소로 또 침체된 강경의 경제활성화를 위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한다.”고 밝혔다.

옥녀봉을 시작으로 중심통인 중앙리와 홍교리 등 강경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어느 새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듯 100여 년 전 아픈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옥녀봉과 강경항일만세운동 기념비

강경 옥녀봉은 논산 8경 중 7경에 속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1919310일과 20일 강경읍 장날을 이용해 1,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펼친 옥녀봉에는 강경 항일 만세운동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사가 있던 장소로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강경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찾아야할 장소다논산시 김명희 문화관광해설사는 늘 기념비 앞에 서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강경은 타 지역과는 달리 평민과 상인들이 주도해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면서 또한 강경은 일제의 수탈현장이 많이 남아있는 근대역사박물관 같은 곳이라고 전했다.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강경근대역사관· 등록문화재 제324

이 건물은 1905년 자본금 50만환의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으로 설립되어, 국권침탈 후 일제에 의해 한호농공은행이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되면서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되었다또한 해방과 더불어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다시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바뀌면서 명실 공히 근대시기 번성했던 강경지역의 상권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금융시설이다.


연면적 60지상1층 규모의 이 건물의 외관은 전면부 및 금고실 부분을 제외한 측면이 모두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다천정고(7.2m)가 높아 주어진 공간에 비해 내부공간이 환하고 넓어 보인다건물 옆에는 창고가 있었다예전에 건어물 같은 것을 담보로 돈을 빌렸는데 그런 담보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였다. 2012년 강경역사관으로 개관해 일제강점기와 근대 역사문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구 강경성결교회(등록문화재 제 42)

옥녀봉을 올라가다보면 우측에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초기 선교기의 구 강경성결교회를 만날 수 있었다. 예배당 내부는 정면 4, 측면 4칸 규모로 정면과 측면의 비가 거의 1:1인 정방형의 평면이다.예배당을 출입할 수 있는 2개의 문은 남녀유별의 유교적 유풍에 따라 남녀의 출입을 구분했고 강대상을 중심으로 천으로 가리고 남녀가 나뉘어서 예배를 드렸다.

④ 구연수당 건재약방 (등록문화재 제10)

지상 2층 규모의 한식 목조 건물로 1923년에 건축되었으며 한식을 기본으로 했지만 1층의 차양지붕과 지붕장식재 등에 일본 양식이 접목됐다. 일본 건축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한약방은 1층은 점포로 전면을 미서기문으로 2층은 정면 창 3개로 각 칸별로 미서기창을 두었으며 근대 한옥 변천사적 가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1920년대 촬영된 강경시장 전경사진에 나오는 건물들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등록문화재 제322· 현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

1931 건축된 교장관사는 일본목조 쇼인조[書院造] 형식을 벽돌조로 바꾼 것으로 높은 박공지붕이 내려오면서 이음지붕형태로 늘어진 것이 특징이다. 입구는 석재마감의 포치를 사용하고 있으며, 외형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1920~30년대 학교 관사의 성격과 근대적 주택 건축 기술의 여러 특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강경공립보통학교 강당(등록문화재 제60· 현 강경중앙초등학교)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를 나와 강경시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 초등학교 건물 옆으로 고풍스러운 적색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강경공립보통학교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준공했다. 이 강당 건물은 한국 근대시기 교육시설 중 강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논산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라는 역사적인 상징성과 함께 근대 도시 강경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강경노동조합(등록문화재 제 323)

강경이 전국의 농수산물 집하지로 명성을 날리던 1920년대 당시 대부분 강경 포구를 통해 전국으로 물류가 운송되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역시 규모나 세력은 대단하였다. 본 건물은 1925년에 신축되었다

현재는 1층 만 남아 있다강경지역 근대시기 상권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

강경은 논산시에 편입되기 전인 1900년도 초 중반만 해도 논산읍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도시였다. 강경읍 중앙리 골목 700m구간에는 논산시가 관광자원화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까지 3년에 걸쳐 조성한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7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만든 근대거리는 박제된 드라마 세트장처럼 만들어져 논산시는 충분한 고증을 거쳐 새롭게 단장할 계획이다.

⑨ 연산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48)논산 연산역 급수탑은 일제강점기의 공공용시설로 현재 남아있는 급수탑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됐다급수탑 재료를 석재를 사용한 것이 큰 특징으로서 몸체는 화강석을 쌓았으며 외곽 테두리를 정교하게 다듬었다호남선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11년 설치 후 1970년대까지 약 60여 년 간 사용하였다급수탑의 규모는 높이 16.2m로 급수탑 용량은 30t이다급수탑 옆에 위치하고 있는 우물은 폭 2.8m, 깊이 6m의 크기로 급수탑의 급수를 위해 만들었다급수탑은 가장 인상적인 근대산업시설물로 중요한 근대 철도 건축물이다.

강경성결교회 최초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

19241011일 당시 강경성결교회 성도였던 김복희 교사와 학생 57명이 단체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강경성결교회 앞 광장에 세워진 5m 높이의 조형물은 당시 김복희 교사와 학생들의 항거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선샤인랜드 및 선샤인스튜디오

강경의 근대역사문화거리를 돌아봤다면 논산시 연무읍에 위치한 선샤인랜드도 들려보자.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미스터 션샤인의 드라마 세트장인 선샤인스튜디오11월 개장 후 두 달 만에 관광객이 40여만 명을 넘어섰다.

적산가옥과 한옥, 서양식 건물이 뒤섞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드라마 속 글로리호텔 카페와 의상대여실, 사진관 등 주요 세트장을 카페, 의상실, 갤러리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선샤인스튜디오와 함께 위치한 선샤인랜드 역시 1900~1950년대 근대 한국의 모습을 재현한 촬영 세트장이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비록 재현해놓은 역사의 현장이지만 암울했던 식민통치 시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이들의 추념하면서 돌아보면 좋겠다.

강경/·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드론 촬영=왕고섶 사진가 취재협조=논산시 김명희 문화관광해설사


기사모아보기
친절한 쿡기자 타이틀
모아타운 갈등을 바라보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역점을 둔 도시 정비 사업 중 하나인 ‘모아타운’을 두고, 서울 곳곳이 찬반 문제로 떠들썩합니다. 모아타운 선정지는 물론 일부 예상지는 주민 간, 원주민·외지인 간 갈등으로 동네가 두 쪽이 난 상황입니다. 지난 13일 찾은 모아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