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3-19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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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토리오 궁전의 왼쪽으로 돌아 경사로를 내려가다 보면 도로바닥에 놓인 쇠로 만든 맨홀 뚜껑에 SPQF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치이념이라고 한다. 라틴어로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과 대중’을 뜻한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기의 정부를 이르는 말이었다. 

로마 제국의 시절에도 요인들의 연설문, 역사서를 비롯해 정치, 법, 역사 등의 문헌 곳곳에 등장할뿐더러, 동전을 비롯해 돌이나 금속으로 새긴 국가 비문의 마지막에서도 볼 수 있다.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한 베니토 무솔리니는 ‘새로운 로마제국’을 드러내기 위해 이 표시의 사용을 확대해 로마의 문장에 넣고, 공공건물, 공공분수, 심지어는 맨홀 뚜껑에도 새겼다.

세나토리오 궁전을 돌아가면 로마의 유적이 흩어져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로마 포럼의 유적이다. 건물은 무너지고 몇 개의 기둥만 남았지만, 살아남은 몇 개의 건물 덕분에 그나마 흩어지지 않은 모양새다. 가까이에 서있는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이다. 

서기 195년과 197-198년에 벌인 페르시아와의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Caraalla)와 게타(Geta)를 기리기 위하여 원로원이 헌정한 것으로 서기 202년에서 203년 사이에 건설됐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죽은 뒤에 카라칼라와 게타는 합동 황제였지만 212년 카라칼라가 게타를 암살한 뒤에 게타에 관한 기록은 공공건물과 기념물에서 사라졌다. 중앙 통로의 스팬들에는 날개가 달린 승리의 여신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작은 통로의 위쪽에 있는 패널 네 곳에는 각각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장면들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 왼쪽으로 8개의 기둥이 박공벽을 떠받치고 있는 사트르누스 사원(Tempio di Saturno)의 유적이 있다. 남아있는 박공벽에는 “Senatus Populusque Romanus incendio consumptum restituit”라는 비문이 남아있다. ‘로마의 원로원과 대중은 불에 탄 [사원]을 복원했다’라는 의미다. 

사트르누스사원은 로마왕국 말기에 타키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에 의해 건설됐다. 지금 보는 유적은 283년 로마제국 최악의 황제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는 카리누스(Carinus) 시절의 불로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한 세 번째 신전이었다. 로마공화정 시기에는 금과 은을 보관하는 금고, 국가 기록보관소,  무게를 측정하는 공식 척도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사투르누스사원 아래에는 로마 포럼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포카의 기둥(Colonna di Foca)이다. 서기 608년 동로마제국의 포카스(Flavius ​​Phocas Augustus) 황제에게 헌정된 것이다. 세로로 홈을 새긴 코린트양식의 기둥 높이는 13.6m이며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원래는 2세기 무렵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일부로 사용됐던 기둥을 재활용한 것이었으며, 기둥은 다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헌정된 동상을 지지하는 기둥으로 재활용됐다.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 뒤쪽으로 약간 높은 곳에 남아 있는 세 개의 기둥은 보통 ‘카피톨리노의 주피터신전’이라고 하는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Jupiter Optimus Maximus) 신전이다. 여러 신을 숭배한 로마에서는 일종의 대성당과 같은 존재였다. 주피터 신전이 처음 세워진 것은 기원전 509년이라고 전한다. 로마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형 신전으로 에트루리아 양식의 건물이었을 것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83년 화재로 소실됐다. 기원전 79년에 사용된 동전에 새겨진 모습을 보면 4개의 기둥과 복잡한 지붕선을 보여준다.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의 왼쪽에 서 있는 교회는 산티 루카 에 마르티나(Santi Luca e Martina) 교회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황제가 재위하던 228년 순교한 마르티나 성녀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서기 625년 교황 호노리우스의 명에 따라 건설됐으며, 1256년 알렉산데르 4세 교황 시절에 복원됐다. 1588년 교회가 로마의 화가, 조각가 및 건축가의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Accademia di San Luca)에 넘겨졌다. 1634년 아카데미 회장으로 선출된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Pietro da Cortona)가 교회의 복원에 착수했다. 

교회의 평면 구조는 길이가 같은 동방정교의 십자가형이며, 중앙에는 돔을 올렸다. 십자가가 교차하는 지점에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을 밀집시켜 돔의 무게를 지탱한다. 교회는 아카데미의 수호성인 루카와 마르티나 성녀에게 헌정됐다. 정면은 붙임기둥이 완만한 곡률을 보이는 2층 구조로 돼있다. 위쪽의 루카 성인의 교회 제단에는 안티베두토 그람마티카(Antiveduto Grammatica)가 그린 유화 ‘성모 마리아(Madonna)’가 걸려있고, 아래교회에는 니콜로 멘기니(Nicolo Menghini)가 제작한 마르티나(Martina)의 흰색 대리석상이 있다.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공간이 바로 로마 포럼(Foro Romano)이다.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에 위치한 이 장소는 고대 로마의 관청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로마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이 됐다. 원래 이곳은 주변을 둘러싼 언덕에서 내려오는 물이 빠져나가는 늪지였다. 

기원전 616년에서 579년까지 로마의 전설적인 다섯 번째 왕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시절 배수시설을 만들어 정비한 뒤로 사용이 가능해졌다. 로마왕국 시기에는 남동쪽 가장자리에 사원들이 들어섰고, 북서쪽에는 왕실의 주거공간과 정치 및 사법 활동의 무대가 됐다. 

로마제국 시절에는 관련 건물들이 밀집되는 바람에 열린 공간이 포럼은 130×50m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축소됐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이 장소에서 전승 행진, 선거, 연설, 형사재판, 상업적 업무가 이뤄졌으며, 위인들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인구가 감소하면서 로마 포럼은 퇴화돼가기 시작했고, 언덕에서 쏟아져 내리는 토사물이 쌓여갔다.

19세기 들어 로마 포럼을 정비하기 전까지 풀밭으로 변한 이 곳은 풀어놓은 가축 차지였기 때문에 암소 마당(Campo Vaccino)이라고 불렀다. 1898년 이탈리아의 공교육부 바켈리(Baccelli) 장관의 주도로 로마 포럼의 발굴이 시작됐다. 발굴 작업에는 3가지 목표를 뒀다.

첫째는 흩어진 기둥, 기초, 및 처마 돌기 등의 조각들을 포럼의 원래 위치로 되돌리고, 둘째는 기존의 구조를 손상시키지 않고 가급적이면 포럼의 바닥에 도달하며, 셋째는 이미 드러난 구조물들은 원로원이나 아에멜리아 대성당 등과 함께 식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로마 포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큰 길로 내려와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à)을 보러갔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à) 장면은 앤 공주역의 오드리 헵번과 조 브래들리 역의 그레고리 팩이 서로의 신분을 감추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장치로 사용됐다. 진실의 입은 문학과 예술 영역에서 다양하게 인용되고 있어, 르네상스 시대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하 (Lucas Cranach the Elder)는 사람들이 사자상의 입에 손을 넣은 모습을 묘사한 그림 두 점을 그렸다.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진실의 입은 1.3톤 무게의 원반형 대리석에 바다의 신 오케아누스(Oceanus)의 얼굴을 돋을새김으로 묘사한 것으로 눈, 콧구멍 그리고 입이 열려 있다. 어디에 쓰이던 것인지 분명치 않은데, 판테온처럼 지붕에 둥근 구멍이 있던 소시장(Foro Boario)의 헤라클레스 빅터(Hercules Victor) 사원의 배수관 덮개로 쓰였다는 설이 있다.

이와 달리 가축 상인들이 헤라클레스 신에게 바친 가축의 피를 뽑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대리석 원반은 13세기 무렵 고대의 소시장에 있던 헤라클레스 빅터사원에서 떼어내 코스메딘 성모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의 벽으로 옮겨 붙였다가 17세기에는 현재 위치인 교회 현관의 주랑벽으로 옮겼다.

진실의 입에 손을 넣는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인증사진을 찍는 것에 관심이 없는 필자는 창밖에서 구경하다가 진실의 입이 비어있는 짬을 붙들었다. 진실의 입이 있는 코스메틴 성모교회의 왼쪽으로는 오페라극장이다. ‘로마의 휴일’에서는 앤공주와 브래들리 기자가 스쿠터를 타고 폭주를 한 끝에 끌려간 경찰서 장면을 찍은 장소라고 했다. 

계단을 올라 오페라극장 앞으로 가면 길건너 편 고대의 소시장 자리에 있는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Piazza Bocca della Verità)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은 테베레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에서 내려지는 다양한 물류들이 거래되던 장소였다. 광장 오른편에는 헤라클레스 빅터 사원이 있다.  

헤라클레스 빅터 사원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코린트를 파괴하고 아케아를 정복한 루시우스 무미우스 아카이쿠스(Lucius Mummius Achaicus) 장군이 건설했다. 석회석과 대리석 벽돌을 쌓아 내벽을 세우고, 그 주변에 10.66m 높이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 20개를 지름 14.8m되는 원형으로 세웠다. 그 위에 상인방(Architrave)와 지붕을 얹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현재의 기와지붕은 최근에 덮은 것이다. 사원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대리석 건물이다. 

헤라클레스 빅터 사원 앞에 있는 분수대는 트리톤 분수(Fortana dei Tritoni)이다. 1715년 교황 클레멘트 11세의 명에 따라 카를로 비자케리(Carlo Bizzaccheri)의 설계로 건설했다. 낮은 16개 기둥으로 둘러싼 8각형의 저수조 가운데 나무줄기를 조각한 바위가 있다. 바위 위에는 꼬리가 붙은 채 무릎을 꿇은 2명의 트리톤이 두 팔을 들어 위쪽 저수조를 받치고 있다. 트리톤 분수는 1610년 완공된 아쿠아 파올라(Acqua Paola)의 물을 공급받고 있다. 

헤라클라스 빅터 사원 북서쪽에 있는 건물은 포르투누스(Portunus) 사원 혹은 포르투나 비릴리스(Fortuna Virilis) 사원이다. 4주식 주랑현관과 방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건물을 계단을 둔 높은 연단 위에 세웠다. 전면에 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웠고, 그 뒤로 2개의 기둥을 추가했다. 뒤쪽의 방에는 각각 4개씩의 기둥이 벽을 따라 세워졌다. 

기원전 3-4세기 사이에 세워졌고, 기원전 120~80년 사이에 재건됐다. 872년 교회로 바꾸어 산타 마리아 에기지아카(Santa Maria Egyziaca, 이집트의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됐다. 1916년 다시 고대 사원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두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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