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철학자 김형석 "60부터 절대 놀아선 안돼"

입력 2019-03-21 18: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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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대 최고인문학아카데미(해인아)가 부산 경제계에서 화제다. 지난 2014년부터 6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해인아'는 매년 각계각층 인사 40명 안팎 회원으로 운영되는 작은 컨퍼런스이지만, 초청 강사의 면면에다 알찬 강의로 큰 감동을 주는 강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에는 문학·철학·역사·예술·과학을 융합한 커리큘럼으로, 총 24강으로 펼쳐진다. 지난 19일에는 100세의 철학자로 유명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1강이 공개강좌로 마련됐다. 김태만 '해인아' 원장이 '새로운 인생설계'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김 명예교수의 강의를 정리한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편집자주>

100세 철학자 김형석

내가 몇해 전에 책을 낸 적이 있었다. <인생은 나무를 키워가는 것 같다>라는 제목이다. 이게 바로 오늘의 주제가 아닌가? 가령 여기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치자. 밑둥은 보이지 않는다. 밑둥이나 뿌리가 보이지는 않지만,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30세까지는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중학생 때였다. 같은 반 친구 중 하나가 윤동주였다. 그 친구는 시를 잘 썼지만 공부는 나보다 못했다. 당시 내 눈에도, “지금은 병아리지만 나중에 세상에 큰 울림이 될 것”이라 여겨졌었다. 다른 친구 하나가 홍창희였다. 나중에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고 소원을 밝혔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때 당시는 어린이 사망이 흔할 때였다. 그것을 안타까와해 소아과 의사가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고교졸업 후 서울대 의대로 진학했고 진짜 의사가 되었다. 나중에 아산병원장도 지냈다. 황순원도 있었다. 중학 때부터 소설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꿈이 있는 아이가 성공하지, 성적 좋은 아이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뿌리가 중요하다. 교육이 중요하다.

30세부터 60세까지는 일하는 기간이다. 일하는 기간에는 일하는 목적이나 가치를 알아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면 불행한 거다. 소유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빈손으로 간다.  

내가 80살쯤 되었을 때,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깨달았다. 최근에 무슨 상을 받았다. 4~5년 벌어야 할만큼의 큰 상금이었다. 어디다 쓸까 고민을 하다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다. 제자들이 흔쾌히 맡아 주었고, 나는 더 없이 행복했다.

사람들은 소유하려고 싸운다. 내 경제관은 “열심히 일해서 남들에게 도움주자” 라는 것이다. 기사나 차를 가지면 편한 줄 알지만,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한다. “지위는 최고로 가더라도 경제는 중산층으로 가라”는 게 내가 지식들한테 하는 잔소리다. 내게 사위가 둘 있는데, 첫째 사위는 법관이다. 그런데 가난하다. 둘째 사위는 돈이 많다. 내 둘째 딸은 가족들과 식사할 때면 꼭 제 엄마한테 식사대를 내 달라고 한다. 돈 많은 집에 시집갔지만 돈이 전부가 아니란 걸 남편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뜻이란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 사회에 무엇을 주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지난 1981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시민의식구조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 항목 중 “먹을 것 충족하고 생활이 안정되어도 일을 할 것인가?”라는 항목에 80% 이상이 “일을 한다”고 답했다. 일을 사랑하는 시민의 모습이다. 동남아가 한국을 배운다. 호주 수상이 한국을 방문해 한국을 주목하라고 선전했다. 일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일하고 토요일 오후에 연수하러 오라면 다 간다. 그리고 일요일 하루 딱 쉬고 월요일 새벽같이 출근한다. 외국인들이 놀란다. 호주에서는 연수하러 오라고 하면 수당이 얼마냐부터 따진다고 한다. 

직장생활할 때 행복해야 한다. 인간관계를 배우지 못하면 인생을 실패한다. 연대 교수 때 인촌 김성수 선생이 동아일보를 만들었다. 하지만, 자기가 사장을 하지 않고 친구인 송진우에게 맡겼다. 중앙고등학교를 만들고는 교장을 타인에게, 고려대학교를 만들어서도 총장을 타인에게 맡겼다. 혼자했더라면 다 망했을지 모르지만 세 사람에게 나누어 맡겼으니 일이 잘 됐다. 일이 잘 되게 하려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절대 아첨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마라. 이승만은 참 불행했다. 주변에 아첨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느 직장에서건 선의의 경쟁은 있어야 한다. 남을 헐뜯지는 마라. 절대로 편가르기 하지 마라. 집단이기주의가 된다.

'내가 언제 60살이 될까'하고 살다보면 어느덧 나도 60살이 된다. 60살이 대단히 소중한 나이다. 30살부터 60살까지 일한 것이 60살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다. 60살에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60살이면 자식들로부터 해방되고 직장으로부터 해방된다. 사회에서 새로 태어난다. 60부터 70, 80, 90까지 30년을 어떻게 사느냐가 관건이다. 0~30살은 교육받고 공부한다. 30~60살은 일한다. 그리고, 60~90살을 어떻게 사느냐.

60부터는 첫째, 절대 놀아서는 안된다. 놀지 마라. 무엇이라도 해라. 봉사가 됐든 놀이가 됐든. 둘째 무엇이건 배워라. 내가 성장하기 위해 공부하라. 셋째, 평생 못한 일을 하나씩 하라.

한국에는 60살을 넘으면 놀기 시작한다. 노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불행한 사회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여중·고 교장선생님들한테 특강할 때였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아들딸을 둔 어느 분이 하는 말이었다. “미국사회에서 놀아보니 노는 사람이 제일 바보다. 1주일 중 나흘을 매일 두 시간씩 병원에서 봉사한다. 1년 동안 번 돈으로 성지순례를 가거나 유럽 여행을 떠난다. 노는 게 행복이 아니라 바보다. 호스피스로 무료봉사를 해도 좋다. 동양화연구소장을 하는 모 씨는 고등학교 때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 탓에 경제학부로 갔는데, 직장을 다 마치고 퇴직한 후에는 미술를 공부한다. 경제보다는 미술이 재밌단다.

김태길, 안병욱 그리고 나 이렇게 철학계 3총사라 얘기한다. 하루는 만나서 얘기하다가 “인생에서 정말 노른자가 몇 살 때쯤일까?”라고 물었다. 50세는 일의 절정이지만 철이 안났고, 61~75세 정도는 되어야 가장 행복한 나이다. 사과나무도 그때쯤에 열매를 맺는다. 일반인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내가 75세 때였다. 영문과의 한 교수가 회갑이 되었는데, 누군가가 “철도 안든 친구가 회갑이야?” 라고 말한 게 기억난다. 그러면서 나를 보면서 “김 교수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요?”라고 물었다. “일흔 다섯입니다”라고 하니, “좋은 나이다!”라는 거였다. 75살까지는 대체로 성장한다. 

안병욱, 김태길 그리고 나 셋이서 모여 평생을 함께 했지만 셋이서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이제 나이도 많이들 먹었으니 춘하추동 한번씩 네 번만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김태길이 거절했다. “하나만 생각하지 또 다른 걸 생각하지 못한다. 그냥 열심히 일하다가 때가 되면 순서대로 그냥 가자.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함께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가고 홀로 남겨졌을 때다”라고 했다. 아마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아닐까? 할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고 끝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나 혼자 남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머님의 남겼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느낌을 느꼈다. 마지막에 전화기를 놓고는 “너무 힘들어 하지마! 네가 정신이 제일 또렷하니 남은 것 마무리 잘 하고 와!”라는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점점 생에 대한 의욕이 떨어진다. 건강, 의욕, 인생의 짐에서 벗어나고 싶다. 120세까지 살라는 주문이 많다. 지금 사는 것도 버거운데, 더 이상은 힘들다. 죽을 때 고생 없이 가면 좋겠다. 

부산=박동욱 기자 pdw7174@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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