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3-29 16: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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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갤러리를 지나면 시스티나 대성당이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린다는 곳이다. 시스티나 대성당은 15세기 후반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지어졌다. 식스투스 4세 교황 당시 바티칸에서는 연간 35건의 미사가 올려졌다. 

이 가운데 교황이 직접 집전하는 성탄절 미사나 부활절 미사와 같은 8개의 미사는 베드로 대성당에서 있었다. 규모가 작은 27개의 미사는 마조레 예배당(Cappella Maggiore)에서 치뤄졌다. 마조레 예배당은 1368년에 건설됐고 프라 안젤리코가 내부를 장식했다고 하는데,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이르러 벽이 기우는 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식스투스 4세의 명에 따라 마조레 예배당 자리에 새로 건설된 예배당은 바치오 폰델리(Baccio Pontelli)의 설계에 따라 조반니노 드 돌치(Giovannino de Dolci)의 감독으로 1473년 착공하여 1483년에 완공했다. 성당의 내부 공간은 길이 40.9m, 너비 13.4m로 구약성경에 적힌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규모다. 바닥으로부터 20.7m 높이의 아치형 천정을 덮었다. 

새로운 예배당은 식스투스 4세의 이름을 따서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 했다. 예배당이 완공된 다음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그리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됐다.

남쪽 벽에는 모세의 이야기를, 동쪽과 북쪽 벽에는 예수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이들 프레스코화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식스투스4세가 설계한 이야기 주제는 하느님이 모세, 예수, 베드로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교황에게 최고의 권위를 내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페루기노가 북쪽 벽에 그린 ‘베드로 성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와 보티첼리가 남쪽 벽에  그린 ‘코라의 형벌’에는 교황에게 서로마 영역의 정치적 권한을 이양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그려 넣었다. 즉, 교황은 로마제국의 합법적 상속자임을 나타내려한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에는 아레나 예배당처럼 파란색으로 채색됐고 황도의 별자리를 금색으로 그려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Pope)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을 새로 꾸밀 계획을 세우고 미켈란젤로에게 그리도록 했다.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 무덤을 장식할 조각 작품을 제작하기로 했다는 이유 등을 댔지만 교황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3년에 걸쳐 천정화를 그리게 됐다. 교황은 12사도의 모습을 크게 그릴 것을 주문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교황과의 협상 끝에 자신의 뜻대로 창세기의 9개 장면을 그릴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길이 40m, 너비 13m의 천정의 가운데를 9등분하고 3개씩을 한 묶음으로 했다. 제단에서 주 출입문으로 향해 첫 번째 묶음은 하나님이 1) 빛과 어둠을 분리하고, 2) 태양과 달과 지구를 창조하며, 3) 육지와 물을 분리하는 등,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묶음은 4) 아담의 창조, 5) 이브의 창조, 6) 유혹과 추방 등, 하나님이 최초의 남자와 여자,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음과 그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걷고, 같이 살던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됨을 보여준다. 세 번째 묶음은 7) 노아의 희생, 8) 대홍수, 9) 노아의 술 취함 등으로 인류의 고난과 노아를 통한 구원을 보여준다.

천정 중앙에 그린 창세기 9장면을 둘러싸고 양쪽으로 각각 5개, 양 끝에 각각 1개 등 12개의 펜던트에는 12명의 예언자를 그렸다. 제단 위쪽이 요나(IONAS)이며, 맞은편 주출입문 위쪽은 스가랴(ZACHERIAS)이다. 제단 오른쪽에는 예레미야(HIEREMIAS), 페르시안 시빌(PERSICHA), 에스겔(Ezekiel), 에리스로라(Erythraean Sibyl), 조엘(Joel)의 순서이며, 제단 왼쪽에는 리비아 시빌(LIBYA), 다니엘(Daniel), 쿠마에안 시빌(Cumaean Sibyl), 이사야(ESAIAS), 델픽 시빌(Delphic Sibyl)의 순서다. 예배당의 네 귀퉁이에는 삼각형의 펜던트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각 모세, 에스더, 다윗, 주디스의 유대인 등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 있는 성서의 이야기 4장면을 그렸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를 마치고 25년이 지난 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제단벽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했다. 1536년 시작한 작업은 4년이 넘은 1541년 미켈란젤로가 67세가 되던 바오로3세 교황 때 완성됐다. 미켈란젤로는 제단벽에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묘사된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했다. 그림의 위쪽에는 영웅적인 형상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모여있고, 왼쪽 아래에는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기 위하여 무덤에서 나오고 있다. 오른쪽에는 지옥에 배정된 자들이 악마에게 끌려가고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예배당에 들어서니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목을 한껏 뒤로 꺾어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그들을 따라 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목이 부러질 듯 아프지만 그림보기를 멈출 수가 없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이 되었음직한 무렵에 겨우 고개를 바로 한다. 천정화는 생각보다는 작게 그려져 있고 천정이 높아서 세밀한 점을 구별할 수가 없는 아쉬움이 있다. 괴테는 “시스티나 성당을 보지 않고서는, 한 사람의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상상할 수가 없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나온 다음 베드로 대성당을 구경했다. 성당 안에서는 설명을 해줄 수 없다면서 피에타, 베드로 동상, 베드로 보좌 그리고 교황의 제대는 찾아보라 했다. 자유시간 30분 가운데 10분을 화장실에서 보내고 났더니 마음이 바빠진다. 그렇다고 뛸 수는 없고 조금 빠르게 이동하면서 보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하면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의 12제자 가운데 갈릴리의 어부 시몬, 즉 베드로[요한 복음 1장 42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가 예수 사후에 지도자가 됐다. 베드로 역시 바오로처럼 로마를 중심으로 전교를 하면서 로마의 첫 번째 주교, 즉 교황이 됐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서기 64년 10월 13일 바오로와 함께 순교했다. 

그 무렵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 사건의 배후로 기독교인을 지목하고 신자들을 처형했던 것이다. 당시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없다하여 거꾸로 매달아 달라 청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유해는 바티칸 언덕의 비아 코르넬리아 가까이에 있던 이교도와 기독교인들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기념비도 없이 그를 상징하는 붉은 돌이 외롭게 서있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3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서기 319년부터 333년 사이에, 기독교를 처음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베드로 성인이 묻힌 장소에 있던 작은 신전을 허물고 교회를 지었다. 동쪽 제대를 향하는 넓은 중랑과 양쪽으로 통로가 있는 전형적인 라틴십자가 양식의 교회는 길이가 103.6m에 달했고, 입구에 커다란 기둥이 있는 전실이 있었다.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교황들은 베드로 대성당에 묻혔다.

1309년부터 1376년까지 7명의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지냈던 아비뇽의 유수기간동안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은 빠르게 퇴락해갔다. 15세기 중반 교황 니콜라스 5세는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생전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니콜라스 5세의 선종이 대성당을 훼손하려는 사람들에게 내린 경고라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기로 했다. 

공모를 통해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의 설계가 뽑혀 1506년 공사가 시작됐다.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은 당시 교황령의 어려운 사정으로 빠르게 진척되지 못하고 1626년에 완공됐다. 브라만테,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페루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 미켈란젤로 등을 거쳐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에 이르러 완공됐던 것이다. 

대성당의 총 길이는 220m, 총 너비는 150m이며 내부 수랑(transepts)의 길이와 폭은 각각 137m이다. 총면적은 2만1095㎡, 내부면적은 1만5160.12㎡이다. 중앙 돔은 대성당 바닥에서 십자가의 꼭대기까지 136.57m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돔의 안지름은 41.47m로 르네상스 초기에 지은 피렌체 대성당의 돔(44m)과 고대 로마의 판테온(43.3m)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 

돔의 아랫단에는 마태복음 16장 18-19절에 나오는 내용이 1.5m 높이로 적혀 있다.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내용이다. 한편 등탑 아래에는 “S. PETRI GLORIAE SIXTVS PP. V. A. M. D. XC. PONTIF. V.”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베드로 성인의 영광을 위하여, 재위 5년째인 1590년에 교황 식스투스 5세’라는 내용이다.

대성당 전면의 넓이는 114m이며 높이는 51m이며, 전면에서 양쪽으로 높이 20m의 열주가 각각 306m의 길이로 펼쳐진다. 열주에는 284개의 원주(column)와 88개의 벽기둥(pilaster) 그리고 140개의 입상이 서 있다.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높이 25.5m에 무게는 360.2톤에 이르는데, 기단과 꼭대기의 십자가를 포함하면 40m에 이른다.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30~28년 사이에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지방장관 코르넬리우스 갈루스(Cornelius Gallus)가 포럼 율리움(Forum Iulium)에 세웠던 것이다. 서기 40년 칼리굴라가 바티칸의 원형광장을 장식하기 위해 로마로 옮겼고, 1586년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베드로 광장으로 옮겼다.

베드로 광장 가운데 서 있는 오벨리스크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분수대가 하나씩 있다. 오벨리스크 북쪽 즉 대성당 정면을 보면서 왼쪽에 있는 것이 마데르노(Maderno)가 1614년에 건설한 분수대이며, 남쪽에 있는 것은 베르니니(Bernini)가 마데르노의 설계에 따라 1667년에 건설한 분수대이다. 마데르노 분수대는 이노센트 8세(Innocent VIII) 시절인 1490년에 세운 초기 분수대 부지에 세웠다.

팔각형의 기반 위에 계단과 작은 기둥으로 장식한 불규칙한 모양의 커다란 수반을 만들었다. 옛 분수대에서 가져온 큰 돌 바스크를 아래쪽에 두었고 그 위에 두루마리 모양으로 깍은 4개의 돌 기둥으로 받침대를 장식했다. 위쪽의 작은 바스크 대신 비늘이 덮인 버섯 모양의 돌 바스크를 거꾸로 올렸다. 물이 분수대 꼭대기에서 뿜어져 나오면 위쪽 바스크 위로 쏟아져 흩어지면서 반짝인다. 1641년 프랑드르의 법률가 프랑드르 아메이든(Theodor Ameyden)은 ‘진짜 강물처럼 공기 중으로 솟아오르는 듯하다’면서 유럽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수라고 했다. 

베드로 대성당의 파사드 위에서 내려다보면 파사드에서 양편으로 빙 둘러서 세운 열주가 둥근 광장을 감싸 안는 모양새다. 마치 대성당에서 뻗어 나온 두 손이 파사드 앞에 늘어놓은 의자에 앉은 세속의 인간들을 모두 품어 안는 듯한 모습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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