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첫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4-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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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는 인문학기행의 세 번째 여행지는 독일이다. 여행지를 고르는 특별한 기준은 없지만 독일은 젊어서부터 가보고 싶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예과시절 읽었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한스 카로사의 자전적 소설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시골에서 자란 청년이 대도시 뮌헨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 그리고 사랑과 실연 등을 그리고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부를 하던 필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포의 기능적이고 형태학적 변화를 연구해야 한다”는 세포병리학을 주창해 현대 병리학의 초대를 세운 루돌프 루트비히 카를 비르효(Rudolf Ludwig Karl Virchow), 탄저균, 결핵균 그리고 콜레라균을 발견하고 전염병의 세균감염설을 역설해 역시 현대 세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로베르트 코흐(Robert Heinrich Herman Koch), 그리고 우리나라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치매의 원인질환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알츠하이머병의 형태학적 변화를 처음 밝힌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등이 모두 독일 학자임을 생각하면 필자가 먹고 사는 일에도 깊은 연관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국립독성연구원(지금은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이 됐다)에 근무할 당시 WHO가 주관한 독성유전체 관련 연구자들의 연구모임에 참석하느라, 그리고 의사협회에 근무할 때는 전염병 신고체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베를린에서 관련된 업무만 처리했을 뿐 구경할 여유는 없었다.

이런 이유들이 독일로 발길을 향하게 했던 모양이다. 독일을 구경하는 여행사 상품들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동유럽 혹은 발칸을 여행하면서 맛보기로 하는 여행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생각에 독일일주 여행상품을 골라 비교했고, 그 가운데 롯데관광에서 내놓은 ‘프로이센왕국의 영광을 꿈꾸다’라는 상품을 골라 2018년 7월 11일 인천을 떠나 7월 19일에 돌아오는 9일짜리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사에서 요약한 이 상품의 특징은 1) 독일 사람들이 아버지의 강이라고 부르는 라인강변과 독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로맨틱 가도에 흩어져 있는 작은 도시들, 2) 루트비히 2세와 연관이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린더호프, 헤렌켐제 성, 3) 통일 전 동독의 자취를 볼 수 있는 드레스덴, 베를린, 포츠담 등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번 여행의 이름을 나름대로는 ‘검은 숲을 가다’로 정한 것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남쪽으로 바덴바덴, 프라이부르크에 이르는 검은 숲(Schwarzbald, 슈바르츠발트)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헨젤과 그레텔이 빵조각을 흘렸지만 길을 잃어버렸던 바로 그 신비로운 숲이다. 거대한 나무가 빼곡하니 들어차 한 줌의 햇살마저도 들이지 않는 어둠의 숲으로 밖에서 보아도 검은 색을 띈다고 했다.

인천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다음에 버스를 타고 독일 서쪽으로 출발해 오스트리아 국경 가까이 남쪽을 돌아 동쪽으로 이동한 후 베를린에 이르러 이체(ICE)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귀국길에 오르는 경로다. 북해와 발트해에 연한 독일의 북부지역이 빠지는 아쉬움이 있다.

휴가철을 앞둔 시기였던 탓에 직원들도 정리할 일들이 많았나 보다. 회의, 설명회 자료준비, 인터넷신문 인터뷰까지, 두어 주일을 매일 시간단위로 쪼개 잡은 일정을 치러냈다. 그 가운데 3월에 쓰기 시작한 새 책 ‘우리 일상에 숨어있는 유해물질’의 원고를 일찍 마감하고 초교까지 끝내야 했던 일이 가장 중요했다. 

출판사 지식서재의 요청에 따라서 한국출판진흥원에서 공모 중인 우수콘텐츠 지원사업에 응모하기 위해서였다. 원고쓰기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계약한 마감일보다 두어 달은 일찍 끝낼 수 있었다. 결과를 말하자면 지원사업에 최종 선정돼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떻든 여행에 대해 생각할 시간조차도 낼 수 없었고, 여행간 짐도 출발 전날 저녁에 쌌는데, 아내가 미리 준비해둔 덕에 1시간 만에 끝냈다. 여행이 늘어가면서 일정한 행동방식이 생기는 것 같다. 여권은 분명히 챙겼으니 나머지 것들은 빠트려도 어쩔 수 없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조금 불편한 것을 참으면 될 터다.

12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아시아나 항공사의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인솔자는 9시에 만나기로 했다. 언제처럼 인솔자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늦으면 서로 불편한 점이 생길 수 있어 조금 일찍 집을 나서기로 했다. 대치동에서 인천공항 1여객터미널까지는 1시간 반이면 충분하지만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넉넉하게 계산할 필요가 있다. 

덕분에 우산을 꺼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 있었다. 전날 밤새도록 내리던 장맛비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힘을 내야겠다는 듯 버스정류장이 저만치 보이는 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작부터 비에 젖은 우산을 챙기지 않아도 됐으니 이번 여행도 행운이 이어질 듯하다. 

7시 2분에 대치동을 출발한 차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양재대로, 강남대로를 지나 올림픽대로에 진입하는데 40분이 걸렸다. 가는 길에 보니 출근시간으로는 일러 보이는데도 우산을 쓰고 종종 걸음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비가 오기 때문인가? 부지런하게 사는 서울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올림픽도로에 들어선 버스는 출근시간 정체 때문인지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더니 여의도를 지나면서 속도가 붙는다. 며칠 동안 내린 장맛비 탓인지 한강물도 하늘처럼 우중충한 잿빛이다. 하지만 도로변 나무들은 비를 머금어서일까 싱싱해 보인다. 버스가 대교를 지나 영종도로 들어섰다. 바닷물이 써는 시간인 듯 갯벌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바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 가까운 섬이 흐릿해 보인다.

8시 40분 공항 도착 후 가이드를 만나 일정을 받고 안내를 받았다. 9시에 탁송화물을 부치고 나서 3만3000원으로 1G(기가바이트)까지 이용할 수 있는 해외로밍서비스도 신청했다. 국적기를 타기 때문에 귀국할 때 휴대전화로 탑승수속을 하기 위해서다. 덤으로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는데도 유용하다. 

출국심사도 순조롭게 마치고 탑승구로 이동했다. 가이드 말로는 독일 입국심사는 까다로울 수 있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2018 러시아 월드컵’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이 독일 대표팀을 2:0으로 물리쳐 독일이 예선에서 탈락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냐는 농담이 오갔다. 

12시 5분 비행기가 탑승구를 물러났다. 프랑크푸르트까지는 5641마일로 10시간 40분가량 비행할 예정이다. 비행기가 항로에 들어서자 점심이 제공된 다음 시차적응을 위해 잠을 청하도록 기내등을 끄는 바람에 책읽기를 접고 영화를 봤다. 몇 편이나 봤는지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출발하고서 8시간쯤 지났을까 의사를 찾는 기내방송이 있었다. 

아픈 환자가 있었나 보다. 멀지 않은 좌석에서 승무원들과 사람들이 둘러서 있고 의사를 찾는 방송이 이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어떤 의사인지가 나서서 수습이 된 듯하다. 사실 비행기 안에 의사가 한 명도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병리의사인 필자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지 시각으로 3시 36분,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닿은 탑승구에서 입국 신고하는 곳까지, 그리고 다시 짐 찾는 곳까지 한참을 걸어야 했다. 입국 신고하는 창구는 여러 곳이었는데, 대부분의 공항처럼 한 줄로 세웠다가 마지막에 자리가 생기는 창구를 찾아가는 식이 아니었다. 창구마다 줄을 서는 식이라서 눈치껏 창구를 골라서야 했다. 

런던 히스로공항, 파리 드골 공항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공항치고는 합리적이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것도 독일에서…. 줄이 좀처럼 줄지 앓아 입국심사가 정말 까다로운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받아보니 별 게 아니다. 갑자기 생각해낸 구텐 탁(guten Tag)이라는 독일어 인사말을 건넨 덕일까. 고등학교에서 3년, 대학에서 2년을 들여 독일어를 배웠으면서 생각나는 문장이 겨우 짧은 인사말 한 줄이라는 게 조금은 슬픈 기분이 들었다.

일행 모두 무사히 짐을 찾아 출국장을 빠져나가 현지 가이드를 만나 버스로 이동했다. 날이 훤하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는 탓인지 여유가 넘친다. 버스를 타러 가는 사이에 쏟아지는 비를 잠시 맞았다. 기온은 섭씨 19도, 반팔셔츠로는 조금 서늘하다는 느낌이지만 남의 시선에는 무관심해서 소신껏 입고 다닌다는 독일 사람들이라니 다행이다. 뉴스에는 서울의 기온이 32도로 치솟고 열대야까지 더해진 폭염이라고 한다. 지난해 여름에 이어 안성 맞춤한 피서여행이 된 듯해서 다행이다. 

5시에 공항을 출발해 우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성상박물관(Ikonen Museum) 부근 주택가에 있는 한식당 불고기(Bulgogi)에서 저녁을 먹었다. 여행 첫날은 한식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하지 않아 음식 맛 평가에 인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식당 불고기에서 먹은 된장찌개와 제육볶음, 그리고 몇 가지 반찬들은 깔끔하고 맛있었다. 

식당이 주택가라서 버스를 댈 수 없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했지만 덕분에 프랑크푸르트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차는 적지 않은데 오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미국에서 공부할 때 도와주던 과비서 쉐론이 떠오른다. 독일계라던 그녀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도 셌다. 물론 성품은 아주 세심하고 여성적이었지만 말이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도심을 끼고 흐르는 마임강가의 강변에는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도심에도 고층 건물이 별로 보이지 않아 소박한 인상이다. 숙소가 공항 부근에 있는 NH 프랑크푸르트 에어포트 웨스트였으니 저녁을 먹으러 30분 정도 떨어진 식당까지 왕복한 셈이다. 숙소는 3층에 있는 632호다. 한 층에 짝수와 홀수로 된 방들을 각각 나눠 놓았다. 재미있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성상박물관은 헤센주의 쾨니히슈타인(Königstein)에서 심장전문의로 활동하던 요르겐 슈미트-보이트(Jörgen Schmidt-Voigt)가 평생 모았던 기독교 성상을 그가 태어난 프랑크푸르트시에 기증하면서 건립된 것이다. 건물은 쾰른에서 활동하는 독일 건축가 오스발트 마티아스 웅거스(Oswald Mathias Ungers)가 설계한 것으로 페인트를 칠한 나무에서 보는 전례적 인상과 건물 자체의 고조된 관계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반영됐다고 한다. 

성상박물관의 소장품을 통해 러시아 북부에서 중동을 거쳐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의 정교 교회 세계에서 15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만들어낸 성상들의 예술적, 전례적 차이를 볼 수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첫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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