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4-1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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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독일 여행을 시작하는 첫날이다. 긴 여행에 지쳐 일찍 잠들었는데 서울에서 온 전화에 눈을 떠보니 3시 반이었다. 처음 보는 일반 전화번호인데다가 신호가 한참동안 이어지는 것을 보면 자동으로 발신되는 스팸번호일 것이다. 시차 때문에 생기는 일인데, 여행을 피곤하게 만드는 범인 가운데 하나다.

식당의 아침 차림이 푸짐했다. 첫날은 8시에 숙소를 나설 예정으로 시간도 넉넉해 욕심을 부리다보니 너무 많이 먹었다. 은연중에 ‘여행은 밥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나보다. 짐을 챙겨 로비로 내려가는데 보니 엘리베이터 옆에 알 만한 사람의 모습이 붙어있었다.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2시간 반을 달려 쾰른까지 이동해야하는데 쾌청한 것은 아니지만 구름이 얇아져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여행에서 날씨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비라도 내리면 모든 일정이 불편하다.

숙소를 떠난 버스는 이내 아우토반(Autobahn)에 올라섰다. 공식적으로는 ‘연방고속도로’로 옮길 수 있는 분데스아우토반(Bundesautobahn)이라고 하는 아우토반은 연방정부가 통제하는 고속도로다. 2017년 기준으로 아우토반의 총연장 길이는 1만2996㎞에 이른다. 

우리가 흔히 아우토반에서는 속도제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우토반에서 무제한 속도를 낼 수 있는 차는 자가 승용차에 한한다. 화물차나 버스는 속도제한이 있다. 뿐만 아니라 도시지역, 사고다발지역, 공사 중인 구간 등에서는 속도를 제한하고 있다. 자가용의 경우 고속주행이 불법은 아니지만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는 상황에 따라 고속주행에 따른 책임이 커질 수 있다.

아우토반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인 1920년대에 처음 검토가 시작됐으며 1932년 개통된 쾰론과 본을 연결하는 도로를 효시로 본다. 특히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들어선 뒤에 고용창출을 목적으로 아우토반 건설이 박차를 가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일부 아우토반의 중앙분리대를 포장해 임시 활주로로 활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도 한 때 같은 목적의 구간이 있었다. 2005년 12톤 이상의 중량 트럭에 대해 통행료를 징수한 이후 아우토반 유료사용의 시작됐다. 일반 사용자의 경우 1㎞ 당 0.15유로의 통행료를 내지만, 비상차량이나 버스와 같은 특정차량은 통행료가 면제된다. 

중부 유럽에 위치한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을 줄여서 독일(Deutschland)이라고 부른다. 35만7386㎢의 영토를 차지하며, 북쪽으로 북해, 발트해가 있고, 그 사이에 위치한 덴마크와 국경을 짓고 있다.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는 2018년 기준으로 8300만 명으로 추산돼 유럽연합에서 가장 많다. 일인당 GDP(명목)는 2019년 기준으로 4만9692달러로 추정되며 세계 17위에 올라있다. 독일어가 공용어다.

독일 사람들은 자국을 도이칠란트(Deutschland)라고 하는데, 영어권에서는 저머니(Germany), 프랑스 사람들은 알마뉴(Allemagne), 폴란드 사람들은 니엠치(Niemcy), 중국 사람들은 더궈(德国)라고 한다. 영어이름은 카이사르 이후에 라인강 동쪽에 살던 사람들을 일컫던 라틴어, 게르마니아(Germania)에서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독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일본이 도이쓰(独逸)라고 부르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받아들인 것이 굳어졌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덕국이라고 한 적도 있다. 독일어의 도이칠란트(Deutschland)는 독일 남부의 고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고대독일어에서 ‘민중’을 의미하는 ‘diutisciu’에서 유래한 도이치와 땅 혹은 나라를 의미하는 란트(Land)가 결합한 것이다.

고속도로의 양편으로는 누렇게 익어가는 밀밭이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형이 7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것과는 달리 독일은 거꾸로 30%에 머문다. 독일의 지형은 남쪽의 알프스 산맥 북쪽 사면에 해당하는 지역과 중부의 구릉지역 그리고 북쪽의 평야지대로 구분된다. 알프스 지역에는 빙하의 퇴적물이 덮여있고, 중부의 구릉지역에는 산지와 분지가 교차하며, 북부 평야지역은 빙하로 덮여 있던 시절 쌓인 퇴적물이 남아 있거나, 이탄이 쌓인 지형과 소택지가 흩어져 있다. 북서부 지역은 해양성 기후를 그리고 남동부는 대륙성 기후다. 겨울은 춥고 건조하며, 여름은 온화하지만 변덕스럽다.

이런 기후적, 지형적 특성 때문에 주로 밀을 심어 주식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밀이 익는 초여름이 수확의 계절이라 할 수 있다. 밀은 유럽 사람들의 주식인 빵을 만드는 원료가 되며, 독일에서는 바이젠비어(Weizenbier)라고도 하는 밀맥주의 원료로도 쓴다. 가끔 보이는 노란색 꽃으로 뒤덮인 밭은 유채밭이다. 유채밭은 꿀벌이 꿀을 모으는 밀원이 되며, 콩기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카놀라유라는 식용유는 개량된 품종의 유채 씨에서 얻는다. 

쾰른으로 향하는 아우토반에서 눈에 띈 것은 도로변에 서 있는 거대한 풍력발전기였다. 풍력발전기는 독일을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독일의 신에너지정책의 상징이다. 독일은 1970년대의 석유파동과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 있는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사고를 계기로 원자력발전을 폐지하는 대신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해 대체하는 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독일 국내에서 가동 중이던 17기의 원전을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주도한 신에너지 정책은 전기요금의 급등을 가져와 소비자 부담이 연간 30조원에 이르고 있으며, 대체에너지의 확대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으며 석탄에 의존하는 발전의 비중이 43%나 된다고 했다. 풍력을 비롯해 태양광, 바이오 에너지 등 다양한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한 발전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나라 역시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제시한 원자력발전 비중을 줄이는 정책도 신재생발전시설의 확대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고 있어 결국 석탄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2016년도 발전 전력량은 52만8838GWh였고, 2017년에는 55만3905GWh였다. 원자력발전의 비중은 2016년의 30.7%에서 2017년의 26.8%로 축소됐지만, 신재생발전은 3.7%에서 5.6%로 석탄은 36.4%에서 43.1%로 늘었다. 최근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미세먼지, 초미세먼지의 발생이 이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

프랑크푸르트의 숙소를 떠나 1시간쯤 달렸을까? 갑자기 버스 앞창에 달린 와이퍼가 작동한다. 언제 몰려들었는지 하늘을 온통 뒤덮은 비구름이 비를 뿌린다. 시계조차 흐릿해서 운전이 어렵겠다.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의 날씨는 참 종잡을 수가 없다. 밭이 펼쳐지던 창밖 풍경도 바뀌어 나무숲이 이어진다. 

일부러 심었는지 아니면 제멋대로 자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숲에 들어설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 서있다. 도로변이 이럴진대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원시림, 검은 숲은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솟을 것 같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고2때, 내장산의 숲에 들었다가 길을 잃어 하루 종일 헤맸던 일이 기억의 심연에 숨어있었나 보다. 

10시에 가까워질 무렵 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난다. 고속도로에서 내리면서 보니 멀리 2개의 첨탑이 보인다. 높이가 157m라는 쾰른대성당 첨탑이다. 쾰른(Köln)은 독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베를린, 함부르크 그리고 뮌헨에 이어 독일에서 4번째 큰 도시다. 

쾰른 지역에 처음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시스라인계 게르만부족인 우비족으로 기원전 38년에 오피둠 우비오룸(Oppidum Ubiorum)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 서기 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에 호의적이던 게르만의 유비(Ubii) 부족의 근거지이던 라인강 동쪽 지역에 로만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센시움(Roman Colonia Claudia Ara Agrippinensium)이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세웠다. 프랑스어로 콜롱(Cologne)이라고 하는 이름도 고대 로마의 도시이름과 연관이 있다. 쾰른은 260년에서 271년까지 포스투무스, 마리우스, 빅토리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갈리아 제국의 수도였다. 

쾰른은 서기 462년 프랑크가 점령할 때까지 로마제국의 속주인 게르마니아 운데르레이오르(Germania Underferior)의 주도였고, 로마군이 주둔했다. 중세시기에는 유럽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로 전성기를 누렸다. 쾰른은 한자동맹의 일원이었고, 중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시기 동안, 쾰른의 대주교는 일곱 선제후 중 한 명이자 세 명의 교회 선제후 중 한 명이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2년 5월 31일, 영국 공군의 아더 T 해리스 장군 휘하의 폭격기 1080여대가 쾰른시에 폭격을 감행한 일명 ‘밀레니엄 작전’을 실행했다. 불과 20분 만에 시는 괴멸됐고, 6만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때 쾰른 대성당은 문화유산이라는 명목 덕에 폭격의 목표에서 제외됐지만 심하게 그을리는 등 피해를 입었다.

버스가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쾰른 시내로 들어가 대성당 앞에서 차선을 바꾸는 순간 버스 뒤에서 요란한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번 울리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반복해서 눌러대는 바람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독일 사람들이 의외로 참을성이 별로 없으며, 자신의 권익이 침해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의외였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두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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