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네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4-19 08: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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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을 보고 나와서는 대성당 주변을 돌아봤다. 1884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는 대성당의 종탑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성당 앞 광장에서도 트롤리가 다니는 부르그마우어(Burgmauer)거리를 따라 한참을 뒤로 물러나야 했다. 

성당 앞 광장으로 가는 계단 아래에는 일본에서 자금을 지원해 만들었다는 첨탑 끝부분의 모사품이 놓여있었다. 대성당 서쪽현관 앞으로 펼쳐진 광장의 왼편구석에는 바윗돌을 어설프게 쌓아 문의 형상을 만들어놨다. 로마시대의 북문(Roman's Northern Gate)이라고 한다. 

쾰른이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독일지역의 중심이 됐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기원전 54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라인강 부근까지 진출해 유비(Ubii)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게르만부족과 동맹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됐다. 서기 48년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는 로마장군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딸, 율리아 아그리피나(Julia Agrippina)와 결혼했다. 서기 50년에 황제는 황비가 태어난 쾰른에 로마 도시의 권리를 부여했다. 쾰른은 아그리피나의 클라우디아 식민지[Colonia Claudia Ara Agrippinensium (CCAA)]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쾰른은 400년에 걸친 번영을 구가하게 됐다.

쾰른을 중심으로 한 라인란트(Rhineland)에서는 로마제국 시절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대성당 앞 광장 구석에 서있는 로마 북문은 라인란트를 둘러싼 1㎞길이의 사각형 형태의 성벽에 있던 것이다. 로마제국 시절 라인란트의 성곽 북문에는 폭 5.6m, 높이 8.6m의 중앙 통로와 너비 1.9m인 측면통로 두 개가 있었다. 그밖에도 쾰른 인근의 아이펠 (Eifel) 언덕의 수원(水源)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가 있었고, 하수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로마에서 대서양을 경유해 벨기에를 거쳐 라인란트로 접근하는 비아 벨기카(Via Belgica)와 트리어(Trier)의 아그리파 (Agrippa)를 거치는 제국의 도로망이 쾰른에 연결돼있다. 본(Bonn), 노이스(Neuss), 도르마겐(Dormagen) 그리고 레마겐(Remagen) 등 라인강을 따라 건설된 도시들은 로마군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쾰른에는 이들 지역의 로마군대를 지휘하는 로마 총독의 거주지 프라토리움(Praetorium)이 있었다.

쾰른대성당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남쪽 현관 앞에 로마노 게르만 박물관(Römisch-Germanisches Museum)이 있다. 아그리피나의 클라우디아 식민지(CCAA)의 로마정착지에서 발굴된 로마의 유물을 소장해 전시하고 있다. 1974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3세기 별장이 있던 장소이다. 로마시대의 별장은 1941년 공습 대피소 건설공사를 하던 중 발견됐다. 

별장의 큰방 바닥에는 서기 220년에서 230년 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니소스 모자이크(Dionysos Mosaik)가 발견됐는데, 모자이크를 제자리에 두고 박물관을 짓기로 했다. 클라우스 렌너 (Klaus Renner)와 하인츠 뢰케 (Heinz Röcke)가 설계한 박물관은 고대 별장의 배치를 고려했다. 

박물관에는 서기 40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클로디우스 포블리쿠스(Clodius Poblicius)의 무덤이 있다. 그밖에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그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의 초상화를 비롯해, 로마시대의 유리제품과 보석, 비문, 도자기 및 건축 조각 등을 소장하고 있다.

로마노 게르만 박물관을 지나 라인강 쪽으로 루드비히 박물관 (Museum Ludwig)이 있다. 팝 아트 , 추상주의 및 초현실주의의 작품 등 현대 미술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900여점의 피카소 컬렉션이며, 앤디 워홀(Andy Warhol)과 로이 리히텐스타인(Roy Lichtenstein)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1976년 초콜릿업계의 거물 페터 루드비히(Peter Ludwig)가 소장하던 350점의 현대미술작품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짓게 됐다. 

박물관의 핵심 소장품 가운데는 1914년부터 1939년 사이에 그려진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카를 쉬미트-로트루프(Karl Schmidt-Rottluff),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오토 뮐러(Otto Mueller) 등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오토 딕스(Otto Dix) 등 현대 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 등을 수집한 요세프 하우브리치(Josef Haubrich) 변호사가 기증한 하우브리치 수집품도 있다.

루드비히 박물관을 지나면 길이 라인강 위에 놓인 호헨졸렌 다리(Hohenzollernbrücke)로 이어진다. 1907년에서 1911년 사이에 건설된 409.19m 길이의 다리로 3개의 인접한 교량으로 구성됐다. 각각 4개의 철도 선로와 도로를 수용하기 위해 강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3개의 철제 트러스 아치를 설치했다. 

1859년에 건설된 2차선의 대성당 다리(Dombrücke)가 늘어난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대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호헬졸렌 다리는 하루에 1200대 이상의 열차가 지난다. 쾰른 지역의 물류이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주요 폭격목표의 하나였지만 종전될 때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은 다리기도 하다.

호헨졸렌 다리의 양쪽에는 프로이센왕국과 독일제국의 왕과 황제의 기마상이 서있다. 쾰른 대성당이 있는 라인강 서쪽 제방의 남쪽에는 빌헬름 2세(Wilhelm II)의 기마상이, 그리고 북쪽에는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기마상이 각각 서 있다. 두 기마상은 조각가 루이 투이옹(Louis Tuaillon)이 제작한 것이다. 동쪽 제방의 남쪽에는 프리드리히 드레이크(Friedrich Drake)가 제작한 빌헬름 1세(Wilhelm I)의 기마상이, 그리고 북쪽에는 구스타프 브래저(Gustav Blaeser)가 제작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의 기마상이 있다.

20세기 초의 독일 표현주의 시인 에른스트 슈타들러(Ernst Maria Richard Stadler)는 1913년에 발표한 시 ‘쾰른 라인강 다리 위의 야간 운행(Fahrt über die Kölner Rheinbrücke bei Nacht)’은 “급행열차는 어둠을 따라 물결 모양으로 부딪힙니다. / 별은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은 좁은 밤의 광산 일뿐입니다. (Der Schnellzug tastet sich und stöoßst die Dunkelheit entlang. / Kein Stern will vor. Die ganze Welt ist nur ein enger, nachtumschienter Minengang,)”라고 시작한다. 

시인은 한밤에 운행하는 급행열차가 쾰른의 다리를 지나는 모습에서 기술의 진보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냈다. ‘순간적으로 촉발되는 연상과 감정의 충동성에 의지해 인간내면의 순간적 격정을 강렬한 방법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특히 자극적이고 유사한 의미의 말들의 반복을 통해 강한 정서적 효과를 얻으려 했다’는 설명이다. 독일은 1903년 베를린 근처에 있는 시험트랙에서 206㎞/h의 속도를 낸 특급열차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철로와 보도를 구분하는 철조망에는 열쇠가 촘촘하게 매달려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사랑의 열쇠 채우기(Love Lock)가 2008년부터 허용이 됐는데, 2015년 6월까지 50만개의 자물쇠가 걸려있을 것으로 추산됐다. 분명치는 않으나 피렌체에 있는 산 조르지오 의과대학(San Giorgio Medical Academy)의 졸업생이 수습기간이 끝나고 사물함의 자물쇠를 베키오 다리의 격자에 채웠던 것을 시작으로 본다고 한다. 

이탈리아 작가 페데리코 모치아의 소설 ‘하늘 위 3미터(Tre metri sopra il cielo)’가 영화화되면서, 피렌체의 열쇠채우기를 인용해, 영화의 남녀 주인공들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로마의 밀비오 다리(Ponte Milvio)에 자물쇠를 걸어 잠근 후 열쇠를 티베르 강에 던진 것에서 선풍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렇게 맹세한 사랑이 끝나 두 사람이 헤어지면 누군가 현장에 가서 자물쇠를 풀어야 할 터인데 강물에 던진 열쇠를 되찾을 수 없어 의미 없는 사랑을 이어가야 할까 싶다.

호헬졸렌 다리에서 라인강 서안의 남쪽을 바라보면 강가로 첨탑이 우뚝 솟은 성당이 보인다. 위대한 성 마틴(Groß St. Martin) 성당이다. 1150년부터 1250년 사이에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가톨릭성당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심하게 손상 됐던 것을 1985년에 재건했다. 성당이 있는 장소는 로마제국의 총독관저(Praetorium)의 동쪽에 있던 라인강 안에 있던 섬이었던 곳으로 1세기 무렵에 지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방향으로 76m 길이에 너비가 71.5m의 벽에 둘러싸인 55.7×43.8m 면적의 약간 움푹 파인 지역에 건물이 들어있었고, 34.0×17.2m 크기에 깊이가 1.7m인 풀이 있었던 것 같다. 2세기 중반 이 지역은 1.5~2m 정도의 높이였고, 남쪽과 동쪽 그리고 서쪽으로 3개의 통로를 가진 4개의 홀이 세워져있었다. 아마도 라인강을 통해 들어오는 상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됐을 것이다.

7세기 말에 예배당이 처음 세워졌다가 8세기 중반에 수도원으로 사용됐다는 주장이 있지만, 근거가 분명치 않다고 한다. 다만 10세기 후반 쾰른의 부른(Brun) 대주교가 투르의 마틴(Martin von Tours)을 기념하기 위해 수도원을 설립했다고 믿어져온다. 11세기에는 베네딕토 수도회에 속하게 됐다. 

1150년에 발생한 쾰른의 대화재로 수도회 건물이 크게 손상을 입었다. 1172년에 쾰른의 하인스베르그의 필리프 1세(Philipp I. von Heinsberg) 대주교는 새로이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그 뒤로도 1185년과 1378년의 화재, 1434년의 폭풍 등으로 손상을 입고 재건되기가 반복됐다. 

1707년에는 아보트 하인리히 오브라덴(Abbot Heinrich Obladen)이 황폐해진 수도원 건물을 무너트리고 바로크 양식의 새로운 성당을 건설했다. 2009년 쾰른의 대주교는 위대한 성 마틴 성당을 파리의 예루살렘 공동체 (Fraternité de Jérusalem)의 베네딕토 수도회에 넘겼다.

호헨졸렌 다리에서 되돌아와 쾰른대성당의 동쪽을 감아 돌아나가면 쾰른 중앙역(Köln Hauptbahnhof)이 보인다. 쾰른 중앙역은 유럽의 장거리교통의 허브 가운데 하나다. 중앙역 아래에는 도시 경전철역이 있어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쾰른으로 와 시내로 이동하기에 편리하다. 중앙역과 대성당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있지만, 별도의 이름이 없을뿐더러 특별한 역사적 사건도 없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네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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