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아홉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5-15 19:00:00
- + 인쇄

네카르강을 따라 가다가 구시가의 동쪽 끝 하이델베르크 성 아래에서 버스를 내렸다. 조그만 공원이 있고, 그 한 귀퉁이에 카를스토르(Karlstor)가 서있다. 1742년 팔라틴 선제후가 된 카를 테오도르의 치적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이 헌정한 것이다. 

건축가 니콜라스 데 피게(Nicolas de Pigage)가 로마제국의 개선문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하여 1775년부터 1781년 사이에 지었다. 외부의 장식은 페터 시몬 라미네(Peter Simon Lamine)가 맡았다. 문의 위에는 팔라틴 선제후의 상징인 4마리의 사자를 세웠고, 구시가를 향한 서쪽에는 선제후인 카를 테오도르와 아내의 초상을 새겼다.

카를스토르에서 서쪽으로 향한 도로가 구시가의 중앙로인 하우프트스트라세(Hauptstraße)이다. 하우프트스트라세는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는 듯 깊이 파헤쳐져 있었다. 가다보면 북쪽, 그러니까 네카르 강 쪽으로 붉은 황소(Zum Roten Ochsen) 카페가 있다. 원래 동쪽 건물은 1703년에 그리고 서쪽 건물은 1724년에 각각 지은 2개의 건물로 1839년에 알브레히트 스펭겔(Albrecht Spengel)이 인수하해 음식점이 딸린 여관, 붉은 황소(Gasthaus zum Roten Ochsen)를 열었다. 

인솔자는 붉은 황소 카페가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가 됐던 곳이라고 했지만, 붉은 황소 여관(Gasthaus zum Roten Ochsen) 관련 자료에서는 그런 사실이 없었다. 하지만 붉은 황소 여관의 식당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도 2014년부터 붉은 황소 여관에 관한 학생들의 사진과 증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마리오 란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Drink! Drink! Drink!’라고 권주가를 부르던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 이야기를 해보자. 이 영화는 리차드 쏘프(Richard Thorpe)감독의 1954년 작품으로 에드먼드 퍼덤(Edmund Purdom)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유학 온 칼스베르크(Karlsburg)왕국의 황태자 칼(Karl) 역을 맡고, 앤 블리스(Ann Blyth)가 여관집 딸 캐시(Kathie) 역을 맡았다. 

원래는 미국의 테너가수 마리오 란자(Mario Lanza)가 칼 역을 맡기로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빌헬름 마이어-포스터(Wilhelm Meyer-Förster)가 1898년에 발표한 소설 ‘칼 하인리히(Karl Heinrich)’를 각색해 1901년 베를린 극장에 올린 연극, ‘알트 하이델베르크(Alt Heidelberg)’이다. 이 희곡은 독일과 미국에서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지그문트 롬버그(Sigmund Romberg)는 1924년에 ‘학생왕자(The Student Prince)’라는 제목의 오페레타로 작곡하기도 했다.

독일에 있는 가상의 작은 왕국 칼스베르크(Karlsberg)의 황태자 칼은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페르디난드(Ferdinand)왕 아래서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키워졌다. 황태자 칼에게 인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개인교수의 권유에 따라 칼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되고, 300여년에 걸쳐 유럽 왕족들이 머물렀다는 루데르의 작은 여관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여관에 딸린 주점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캐시는 루데르의 조카로 대학생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칼은 황태자인 자신조차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캐시 덕분에 왕족의 권위를 버릴 수 있게 되고, 평민대학생들로 구성된 웨스트 벨리언스 합창단에도 가입한다. 칼 황태자가 합창단에 가입하던 날, 주점에서 열린 통과의례에서 커다란 잔에 채워진 맥주를 단숨에 마시는데, 이 장면에서 마리오란자의 유명한 권주가(일명 Drink Song)가 울려 퍼진다.

붉은 황소 카페를 지나면 왼쪽으로 널찍한 광장이 나타난다. 하이델베르크 성이 잘 보이는 이 장소는 카를광장(Karlsplatz)이다. 1805년 파괴된 프란체스코 수도원(Barfüsserklosters) 자리를 정리해 만들었다. 바덴의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Karl Friedrich)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광장 북쪽으로는 팔레 보이스레(Palais Boisserée)와 하이델베르크 과학 아카데미 건물이 있다. 

팔레 보이스레(Palais Boisserée)는 팔라틴 법원장 프란츠 폰 지킹엔이 1703년부터 1705년 사이에 지었다. 1810년 보이스레 가문의 술피츠(Sulpiz)와 멜키오르(Melchior) 형제가 회화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고, 1826년 바덴주가 인수해 행정건물로 썼다. 오늘날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독일학과가 사용하고 있다. 

광장 가운데 있는 분수대는 1978년 미카엘 숀홀츠(Michael Schoenholtz)가 제작한 세바스티안 뮌스터(Sebastian Münster) 분수대다. 16세기 초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일한 세바스티안 뮌스터에게 헌정된 것이다.

카를광장 다음에는 ‘옥수수 시장’이라는 의미의 코른마르크트(Kornmarkt)다. 13세기에는 성령병원(Heilig-Geist-Spital)이 있던 곳으로, 1557년 시의회가 주도하여 병원건물을 부수고 낙농장과 허브 시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시장’이라는 의미의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라고 부르던 것이 언젠가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장 가운데 페테르 반 덴 브란덴 (Peter van den Branden)이 1718년에 제작한 코른마트-마돈나(Kornmarkt-Madonna)라는 이름의 분수가 있다. 마리아 주상(柱像)과 성모 마리아 분수(Mariensäule und Muttergottesbrunnen)라고도 부른다.

인솔자는 중세 무렵 유럽을 휩쓴 페스트를 종식시켜달라는 염원을 담아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분수대는 대부분 신교를 믿는 하이델베르크 시민과 가톨릭 신자인 선제후 카를 필립(Karl Philipp) 사이의 갈등을 나타낸다. 예수회가 세운 이 동상은 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동기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예수회는 동상을 세우는 이외에도 성모 마리아의 다른 조각상도 세우고 성지순례를 조직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런 예수회의 노력이나 선제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이델베르크의 신교도들은 개종보다 가까운 만하임 등으로의 이주를 선택했다. 

동상은 중세시대로부터 내려온 ‘성모의 승리(Maria vom Siege)’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상징화됐다. 금빛 번개가 치는 구름 위에 선 4명의 아기 천사가 뱀이 둘러싼 지구본을 받치고 있고, 12개의 별로 된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가 왼손으로 아기 예수를 안은 채 지구본 위에 서있다. 아기 예수는 손에 든 백합문양의 왕홀로 뱀의 머리를 누르고 있다. 

받침대에는 “NON STATUAM AUT SAXUM SED QUAM DESIGNAT HONORA”라는 비문이 새겨져있다. ‘우리가 공경하는 성모자는 바위에, 그림에, 여기 주상(柱像)에 아직도 계십니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문장이다. 아마도 ‘도심에 있는 작은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다’라고 존 버거가 이야기한 것처럼 콘마르크트에 모여드는 신교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카를 광장과 코른마르크트 사이에 있는 길을 남쪽으로 따라가면 하이델베르크 성에 이르게 된다. 또한 코론마르크트 남쪽에 있는 하이델베르크 등산철도(Bergbahn Heidelberg)역에서 기차를 타면 하이델베르크 성을 거쳐 ‘왕좌’라는 이름의 쾨니히스툴(Königstuhl)산 정상까지 갈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남쪽에 있는 쾨니히스툴은 오덴발트(Odenwald) 산맥에 속하는 해발 567.8m 높이의 산이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쾨니히스툴의 남쪽 기슭 80m 높이에 있다. 쾨니히스툴 정상에서는 네카 강이 하이델베르크를 감싸고 흐르는 아름다운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쾨니히스툴 정상 부근에는 1898년에 설립된 막스 프랑크(Max Planck) 천문연구소가 있다. 1912년부터 1957년까지 이 연구소에서 근무한 카를 빌헬름 라인무스(Karl Wilhelm Reinmuth)는 400여개의 소행성을 발견했다. 

멀리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성은 그야말로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비운의 성이라 할만하다.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이자 알프스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르네상스 건축물의 하나로 지목되는 하이델베르크 성이지만 사실을 폐허라고 함이 옳다. 

하이델베르크성이 처음 언급된 것은 1214년으로 바이에른공작 루드비히 1세(Ludwig I)가 호헨슈타우펜(Hohenstaufen)의 프레드리히 2세로부터 이 성을 받았다는 라틴어 기록(‘castrum in Heidelberg cum burgo ipsius castri’)에서다. 그러니까 이 성은 1214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1294년에는 두 개의 성으로 확장됐다. 위쪽 성은 1537년 벼락을 맞아 파괴됐다. 

마트호이스 메리안(Matthäus Merian)이 1615년에 쓴 ‘라인 팔라틴 왕국의 지리학(Topographia Palatinatus Rheni)’에서 ‘새로운 성 한 채를 100년 넘게 짓고 있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파괴된 위쪽 성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해왔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라진 위쪽 성은 지금의 호텔 몰켄쿠르(Hotel Molkenkur) 부근의 클라이네 가이스베르크(Kleiner Gaisberg) 산에 있었다.

지금의 하이델베르크성은 예텐뷜(Jettenbühl)이라는 낮은 쪽 성이다. 예텐뷜 역시 17세기 초반 벌어진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1622년 틸리백작이 이끄는 가톨릭연합군이 루터를 지지하는 하이델베르크를 침공했을 때 하이델베르크성이 주요 공격목표가 됐다. 틸리백작이 하이델베르크 성을 점령한 1633년 스웨덴왕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틸리백작은 하이델베르크성을 내줘야 했다. 

결국 베스트팔렌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마무리된 1649년에서야 카를 루드비히(Karl Ludwig)가 다시 팔라틴 선제후로 돌아왔지만 부서진 하이델베르크성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1650년 하이델베르크 성을 확장해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89년과 1693년에 일어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764년 벼락까지 맞아 일부 재건된 부분까지도 파괴되고 말았다. 

1838년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한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하이델베르크 성터 유적 사이를 즐겨 산책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편지에는 “이 성은 유럽을 뒤흔든 모든 사건의 피해자가 돼왔으며, 지금은 그 무게로 무너져 내렸다”면서, 특히 ‘루이 14세가 그것에 큰 타격을 입혔다’라고 적었다. 

선제후 카를 필리프(Karl Phillip)의 뒤를 이은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가 궁전을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옮기려던 1764년 떨어진 벼락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심지어 하늘이 개입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카를 테오도르가 성으로 들어가 30년을 보냈다면 큰 재앙이었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성은 아마도 퐁파두르부인(루이 15세의 정부) 식으로 꾸며졌을 것이다. 선제후의 가구들이 성령교회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8각형의 탑을 치고 지붕으로 옮겨가 순식간에 500년 된 성을 파괴하고 말았다.”

이런 정황이 되자 하이델베르크 성은 더 이상 재건을 포기한 상태로 버려지고 말았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아홉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기사모아보기
친절한 쿡기자 타이틀
모아타운 갈등을 바라보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역점을 둔 도시 정비 사업 중 하나인 ‘모아타운’을 두고, 서울 곳곳이 찬반 문제로 떠들썩합니다. 모아타운 선정지는 물론 일부 예상지는 주민 간, 원주민·외지인 간 갈등으로 동네가 두 쪽이 난 상황입니다. 지난 13일 찾은 모아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