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열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5-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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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성의 재건은 오랜 논란거리였다. 1868년 시인 볼프강 뮐러 폰 쾨니히스뷘터(Wolfgang Müller von Königswinter)가 성의 원상복구를 강력히 주장한 것을 계기로 바덴 대공국은 성건축사무소(Schloßbaubüro)를 설치해 복원을 추진했다. 1890년 독일 전역에서 모인 전문가들은 성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복구하는 것보다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화재로 내부가 손상됐지만 건물은 온전한 프리드리히건물(Friedrichsbau)만을 복원키로 해 1897년부터 1900년 사이에 복원작업이 마무리됐다. 

마크 트웨인이 1880년에 발표한 여행기 ‘해외방랑기(A Tramp Abroad)’는 여행을 통해 자신이 겪은 일과 허구를 섞어 쓴 여행문학작품인데, 하이델베르크 성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유적이 유적다우려면 제 모습을 해야 하는데, 이곳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 자연은 유적을 제대로 장식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오래된 탑은 가운데로 갈라졌고, 한쪽이 옆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절묘한 모습을 만들어냈습니다. (…) 탑의 뒤쪽에도 반짝이는 아이비가 감싸고 있어 시간의 상처와 얼룩을 감추고 있습니다. (…) 불행이 인간에게 한 것처럼 이 오래된 탑에게도 덮쳤지만, 그것은 극복되었던 것입니다.”

1528년에 세워진 하이델베르크 성의 안뜰로 들어가는 정문은 야트막한 도랑에 걸쳐놓은 돌다리를 건너서 들어갈 수 있다. 원래 세웠던 감시탑은 팔라틴 계승전쟁(Pfälzischen Erbfolgekrieg) 중에 파괴됐고, 1718년에 둥근 아치형의 입구로 교체됐다.

하이델베르크 성의 정원은 ‘마법의 정원’ 혹은 ‘밀폐된 정원’ 이라는 의미의 호르투스 팔라티누스(Hortus Palatinus) 혹은 팔라틴 정원이라고도 한다. 팔라틴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부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를 위해 1616년 착공해 1619년 완공한 바로크 양식의 정원이다. 조경기술이나 원예기술이 뛰어나 당시 ‘세계의 8번째 불가사의’로 알려졌고, 이후에도 독일에서 가장 훌륭한 르네상스 정원으로 꼽고 있다. 30년 전쟁 기간 동안 반복된 공성(攻城)으로 피폐해지고 말았다.

부서진 새장의 벽에서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75세의 생일을 맞아 연모하던 마리안 폰 빌레머스(Marianne von Willemers) 부인을 위해 지은 시를 새긴 석판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을 받으며 행복했노라.”

하이델베르크 성의 지하에는 1751년,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시기에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큰 포도주 술통이 있다. 높이가 약 7m, 폭은 약 8.5m에 달하며, 약 22만1726ℓ(리터)의 술을 보관할 수 있다. 술통의 맞은편에는 하루에 18ℓ의 포도주를 15년 동안 마셨다는 페르케오(Perkeo)의 목상이 서있다. 페르케오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음에도 80세까지 장수했다. 하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금주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은 다음날 숨졌다고 한다.

오토하인리히 관(Ottheinrichsbau)에는 독일 약학박물관(Deutsches Apotheken-Museum)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조제실이나 실험실, 가정용 약품 저장용기, 응급처치 키트, 약전 등이 비치돼있어 약품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또한 17–19세기 약학을 대표하는 1000가지 원료 의약품이 전시돼있다.

코른마르크트의 북쪽에 있는 건물이 시청사다. 중앙로를 따라가다 시청사건물이 끝나는 곳에 시장광장(Marktplatz)이 있다. 동쪽으로 시청 건물의 주출입구가 있고, 서쪽으로는 성령교회가 있다. 시장광장은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의 심장이라 할 것이다. 중세 이후에 시장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고, 시민에게 공개돼야 하는 절차가 수행되기도 했다. 마녀와 이교도들에 대한 화형이 이곳에서 이뤄졌고, 사소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새장에 매달려 형벌을 받는 장소도 이 곳이었다.

시장광장 가운데에는 붉은색 원주 위에 헤라클레스 상을 세운 분수가 있다. 프랑스와 팔라틴 사이에 벌어진 왕위계승 전쟁은 하이델베르크를 폐허로 만들었다.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됐고 주민들도 전투 중에 사망하거나 살해됐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타지로 추방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행정기능이 뒤셀도르프로 이전됐고, 주민은 150명에 불과했다.

요한 빌헬름 선제후는 하이델베르크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기념물의 건립하기로 했다. 1703년 하이델베르크 시는 조각가 요한 마르틴 라우브(Johann Martin Laub)에게 분수대를 건설하도록 했고, 조각가 하인리히카라스키(Heinrich Charrasky)에게 헤라클레스를 조각하도록 했다. 분수대는 1705년에 시작해 1706년에 완공됐다. 

시청 맞은편에 있는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다. 성령교회는 원래 성 베드로 교회의 예배당이었다. 성령에게 헌정된 이 교회는 1239년에 작성된 쇤나우(Schönau) 수도원의 문서에 처음 언급됐다. 문서에 따르면 당시의 교회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였는데, 1936년에 그 후진(apse)이 출토됐다. 

팔라틴의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Ruprecht III)는 팔라틴의 위상을 걸맞은 교회를 하이델베르크에 세우기로 해, 1398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 있던 장소에 공사를 시작하게 됐다. 후기 고딕양식으로 된 교회 건물은 빨간색의 네카계곡(Neckartäler)의 사암으로 지었다. 합창단석이 1411년에 축성됐고 1427년에는 본당이 완성됐다. 같은 해 첨탑이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1508년까지 중단됐다가 1544년에 완성됐다. 이때 완성된 첨탑은 1709년 프랑스와의 왕위계승 전쟁에서 불타고 나서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것이다.

교회 건설은 150여년이 걸린 1515년 마무리됐다. 교회 건설에 관여한 건축가들 가운데 알려진 이들은 1426년까지 일한 한스 막스(Hans Marx)와 1439년까지 일한 조르그(Jorg)뿐이다. 마인츠의 교회탑 건축전문가 니클라우스 에셀러(Niclaus Eseler)도 참여했을 것이나, 첨탑을 완성한 것은 로렌츠 레흐러(Lorenz Lechler)다.

14세기 성령교회는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에서 교구 교회로 넘어갔다가 하이델베르크 대학(Universid Heidelberg)의 대학교회가 됐다. 성령교회에는 팔라틴 선제후들의 무덤이 봉안됐지만 프랑스와의 왕위계승전쟁기간 동안 파괴되고 교회를 세운 루프레히트 3세의 무덤만이 보존되고 있다.

교회에는 독일 르네상스의 중요한 도서관인 팔라티나 도서관(Bibliotheca Palatina)이 있었다. 팔라티나 도서관에는 약 5000권의 책과 3524개의 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 바바리아의 선제후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교황에게 바쳤다. 1816년에 이 가운데 885편을 돌려받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게 됐으며, 나머지는 여전히 바티칸에 보관돼있다.

종교개혁에 이후 성령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같이 사용하게 됐다. 1706년부터는 두 파가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벽을 설치했다. 그런데 1720년 카를 3세 필립(Karl III Philip) 선제후가 교회를 가톨릭에 완전히 넘기면서 충돌을 빚었고, 프러시아, 네덜란드, 스웨덴 등의 개입을 부르게 되어 다시 벽을 설치했다. 1936년부터 교회는 개신교가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장광장에서 성령교회의 오른편을 돌아서 오른쪽 골목을 빠져나가면 네카르 강에 닿고, 오른편으로 붉은 네카르 사암으로 지은 아치형의 옛 다리(Alte Brücke, 알테 브뤼케)를 볼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이기도 한 카를 테오도르 다리(Karl-Theodor-Brücke)다. 

옛 도시와 노이엔하임(Neuenheim)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1788년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 의해 건설됐는데, 같은 자리에 건설된 9번째 다리이다. 옛 다리라고 부르게 된 것은 1877년 이 다리 서쪽에 프리드리히 다리[Friedrichsbrücke, 오늘날에는 테오도르 호이스 대교(Theodor-Heuss-Brücke)라고 부른다]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의 네카르강에 다리를 처음 건설한 것은 서기 1세기 무렵의 로마인들이다. 나무로 만든 첫 번째 다리는 노이엔하임(Neuenheim)과 베르그하임(Bergheim)을 연결했다. 나무다리는 서기 200년경 돌로 재건됐다. 돌로 된 다리가 언제 무너졌는지는 모르나 하이델베르크에는 거의 천년 동안 다리가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네카르 강의 다리에 대한 언급이 1284년에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에 하이델베르크시가 성립한 직후 건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옛 다리가 있는 곳에 서 쇤나우(Schönau) 수도원과 마을을 연결했던 것이다. 이 다리는 1288년 유빙이 충돌해 무너졌다. 

두 번째 다리는 1308년에, 세 번째 다리는 1340년에, 네 번째 다리는 1400년에, 다섯 번째 다리는 1470년에 각각 유빙의 충돌로 무너졌다. 여섯 번째 다리는 뮌스터(Münster) 다리라고 불렀다. 세바스찬 뮌스터(Sebastian Münster)가 1527년에 제작한 작고 둥근 목판화에서 유래했다. 

칼렌달리움 헤브라이쿰(Calendarium Hebraicum)에 있는 목판화에는 당시의 하이델베르크와 옛 다리의 간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8개의 돌기둥이 있는 나무다리로 남쪽에 두 개의 탑이 세워져있었고, 북쪽으로 일곱 번째 기둥에는 원숭이탑(Affenturm)이 있었다. 이 다리 역시 1565년에 유빙에 희생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돌기둥 위에 지은 일곱 번째 다리는 1620년 마트호이스 메리안(Matthäus Merian)이 도시의 상징을 조각했기 때문에 메리안 다리(Merian-Brücke)라고 불렀다. 30년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일곱 번째 다리는 1689년 프랑스와의 왕위계승전쟁에서 부서져 철거됐다.

여덟 번째 다리는 1706년에 공사를 시작해 1714년에 완공됐다. 1738년에 네포묵(Nepomuk)의 요한 성인의 동상을 신시가지쪽에 세웠기 때문에 여덟 번째 다리는 네포묵 다리(Nepomuk Brücke)라고 불렀다. 여덟 번째 다리는 1784년의 역사적인 대홍수로 파괴되었고,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에 의하여 아홉 번째 다리가 지어진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열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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