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기생충’ 봉준호 감독 “실낱같은 희망, 그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봉준호 감독 “실낱같은 희망, 그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기사승인 2019-05-30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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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실낱같고 어렵게 넣으려고 해요. 그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영화 ‘기생충’ 이야기를 하던 도중 너무 어둡지 않느냐는 얘기에 봉준호 감독이 반색했다. 자신의 전작인 영화 ‘설국열차’와 ‘옥자’ 모두 희망적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과거 ‘설국열차’를 함께 본 배우 김혜자가 “북극곰이 희망을 의미하죠?”라고 말했다는 상황을 직접 연기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지난 29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일곱 번째 영화 ‘기생충’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직접 기자들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스포일러를 제외하면 말이다. 가끔 자신이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며 보도 자제를 부탁했지만, 그 외에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은 거침없이 답변을 이어갔다. 다음은 봉준호 감독과의 일문일답.


Q. ‘설국열차’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수평적 이미지로 보여준 영화라면, ‘기생충’은 수직적으로 보여준 영화 같아요.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질 법한 이야기와 실제 볼 수 있을 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족 얘기인데 영화를 보면 먼 세상 얘기 같은 느낌이 있죠. 수직적인 느낌도 있어요. 카메라도 첫 장면부터 하강하잖아요. 이곳이 ‘반지하’라는 걸 웅변하면서 영화가 시작해요. 영화가 수직적이다 보니 계단이 중요했어요. 연출팀이나 미술팀이 ‘이 영화는 계단 영화야, 스테어 시네마’라고 하면서 농담도 했고, 재미로 콘테스트도 했어요. 각자 가장 좋아하는 계단 장면을 제출해서 뽑힌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거죠. 멋진 계단 장면이 있는 영화가 많더라고요.”


Q. ‘기생충’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집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그 집이 건축가 남궁현자의 집이잖아요. 이름도 정말 이상해요. 실제 인물은 안 나오지만 이상해야 기억이 잘 되니까 각인시키려고 그렇게 지었어요. 실제로 영화 속 집과 비슷한 스타일로 건축하시는 분이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 속 이선균 씨 캐릭터처럼 잘나가는 부자들이 세련되게 짓는 집이죠. 대리석과 황금장식 싫어하는 젊은 부자들의 취향인 거예요. 시나리오 쓸 때 구체적인 동선이 다 나왔어요. 이쪽에서 얘기하면 이렇게 엿듣고, 여기선 여기가 안보여야 하는 식이에요. 영화가 계속 감추고 숨기고 엿듣고 엿보죠. 그 상황들을 성립시키는 구조를 정리해서 미술감독에게 요구사항을 줬어요. 실제 건축가와 의논을 해봤는데 그는 누구도 이렇게 집을 짓지 않는다, 말이 안 된다고 하셨죠. 하지만 전 이렇게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영화를 못 찍는다고 했고요. 그래서 이하준 미술감독도 고민이 많았을 건데 제 요구사항을 100% 다 들어줬어요. 건축 전문가들이 볼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 관객들이 봤을 땐 집처럼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나온 것 같아요.”



Q. 집을 통해서 빈부 격차도 많이 드러난 것 같아요.

“빈부의 차이는 공간의 크기 차이도 있겠고 빛의 차이도 있어요. 햇빛의 빈부 격차가 있는 거죠. 영화에서 부잣집을 보면 서너 군데 정도 햇빛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장면이 있어요.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거예요. 홍경표 촬영감독과 세트로 들어오는 실제 자연광을 기다려서 찍은 장면이 많아요. 반대로 반지하는 햇빛이 드는 시간이 제한돼 있죠. 반지하용 조명판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만큼 햇빛이 아쉬운 거잖아요. 영화 도입부를 보면 최우식의 머리카락 끝에 살짝 햇빛이 걸쳐 있어요. 하루에 몇 번 없는 한 조각의 햇빛인 거죠.”


Q. 굳이 반지하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요.

“묘하잖아요. 한국적이기도 하고요. 영어 자막을 번역할 때 세미 베이스먼트(Semi-Basement)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없는 표현이에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주택형태더라고요. 칸 영화제에서 딱 한 분 봤어요. 동유럽 기자 분이 손을 들고 반지하가 자기네 나라에도 있다고, 너무 반갑다고 하셨죠.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는 없는 주거 형태인 거죠. 그 느낌이 정말 묘하지 않나요. 완전 지하는 아니고, 지상이라고 믿고 싶기도 하잖아요, 안에서 밖을 보면 사람과 자동차 바퀴도 보이고요. 거창하게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직은 지상에 걸치고 있지만 더 상황이 안 좋아지면 더 밑으로 꺼져서 내려갈 것 같은 계급적 불안감을 주는 것 같아요. 그 느낌이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처지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해요.”



Q. 전작에서는 지역의 고유명사가 많이 등장하는데, 혹시 어느 지역을 염두에 두고 찍으신 건가요.

“혜화역이 나오잖아요. 부잣집은 아마 성북동일 것으로 추측돼요. 집은 세트로 만들었지만 부잣집 앞 골목은 성북동 주택가에서 일부 찍었어요. 집 내부와 마당, 정원, 대문은 다 만든 거고요. 실제 성북동과 전주 세트가 접합된 부분이 있어요. 영화에 보이지 않는 CG가 많은데 아마 못 찾아내실 거예요. 우주선이나 슈퍼돼지면 생색이라도 낼 수 있는데 이건 살신성인의 CG죠. 그런 장면이 많아요. 차량 장면도 대부분 다 CG예요. 달리면서 찍은 장면이 거의 없고, 다 블루스크린을 앞에 세워놓고 찍었어요. 실제 도로에서 달리면 촬영하기 어려움이 많거든요.”


Q. 정재일 음악감독이 ‘옥자’에 이어서 ‘기생충’에서도 호흡을 맞췄어요.

“‘옥자’ 때는 다양성이 중요했어요. 공간이 자연에서 서울, 서울에서 뉴욕으로 계속 변하는 것처럼 여러 장르의 음악이 다양하게 펼쳐졌다면, 이번엔 전반적으로 집중력이 중요했어요. 정통적인 방법이요. 음악의 모티프가 소개되고 변주하면서 쌓아나가는 방식이었어요. 바로크 음악 비슷한 것도 나와요.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서술하면, 바로크 음악 특유의 점잖은 척 하는 느낌이나 시치미 뚝 떼는 느낌이 이 영화의 상황과 잘 맞았어요. 등장인물들도 번듯한 부잣집에 가서 시치미 뚝 떼고 있잖아요. 정재일 감독과 같이 지휘하는 느낌으로 공을 많이 들여서 편집했어요. 편집의 템포와 미세한 박자들까지 계산해서 맞춘 거예요. 정재일 씨와 참 재밌게 작업했어요.”



Q. 이번엔 2.35:1의 화면비를 쓰셨어요. 인물들의 불안감을 표현하신 건가요.

“전 그렇게 느껴요. 2.35:1에서 클로즈업을 하면 얼굴 위아래가 잘리게 되잖아요. 양옆 공간이 많이 비고, 빈 공간은 포커스가 안 맞아서 뿌옇게 되어 있죠. 그 뿌연 면적이 화면을 넓게 차지할 때 주는 이상한 느낌이 있어요. 큰 고민 없이 4인 가족이 나오니까 2.35:1로 했어요. 홍경표 촬영감독도 그렇고 서로 그 비율로 전제돼 있었던 것 같아요.”


Q. ‘옥자’에 이어 또 최우식 씨를 섭외한 이유도 궁금해요.

“시나리오를 다 완성해놓고 캐스팅하는 배우들이 있고,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이미 배우를 전제해놓고 쓰는 경우가 있어요. 둘 다 장단점이 있지만 항상 두 그룹으로 나뉘죠. ‘기생충’에선 송강호와 최우식을 두 기둥으로 박아놓고 시나리오를 썼어요. 거의 다 쓸 때쯤 박소담을 떠올렸어요. 우식씨와 얼굴이 비슷해서 너무 남매 같은 거예요. 사진을 붙여보기도 했어요. 그래서 최초 공개된 스틸 사진에서도 둘이 비슷한 얼굴로 쪼그려 앉아 있잖아요. 그 이미지 자체가 출발점이었어요. 연기는 두 사람 다 너무 잘하잖아요. 가족이라면 시각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자 돌림이라고 가족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가족사진 액자만 봐도 가족이란 느낌을 어느 한 쌍 정도는 주는 게 좋을 것 같았죠.”


[쿠키인터뷰] ‘기생충’ 봉준호 감독 “실낱같은 희망, 그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Q.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배우 엘르 패닝이 조여정을 극찬하기도 했어요.

“엘르 패닝이 여배우라 그런지 ‘기생충’의 여배우들에게 많은 찬사를 보냈어요. 그러면서 연기 리듬이 절묘하다는 얘기도 나왔고요. 영화에서 여정 씨가 기습적으로 영어하는 느낌이 웃기잖아요. 제가 여정 씨에 부탁한 건 이런 거예요. 대사를 마무리하지 말고 출발하라고 했어요. 말을 다 못 끝냈는데 슥 가버리는 그 리듬감이 있거든요. 여정 씨가 센스가 탁월해서 이후에 일일이 짚어주지 않아도 그 패턴을 두세 번 더 반복했어요. 진짜 감각이 좋아요.”


Q. 영화를 보면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에 은근한 성적 긴장감이 있어요.

“은은하게 있죠. 평범한 대사일 뿐인데 성적 긴장이 느껴지는 장면도 있고요. ‘기생충’은 우리가 평소에 볼 수 없는 누군가의 사적인 영역을 현미경으로 보듯이 아주 가까이서 보게 되는 영화예요. 지하철 타는 분들을 언급하는 그런 대사는 결코 공적인 자리에서 입 밖에 담을 얘기는 아니죠. 하지만 사적 공간에선 악의가 없어도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어요. 그걸 도덕적으로 비난하긴 쉽지 않아요. 내밀하고 사적인 타인의 사생활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는 느낌이 정말 중요한 영화예요. 가깝고 밀착된 거리로 좁혀지면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잖아요. 사실 타인의 냄새를 맡는 건 부부가 아니면 흔치 않아요. 그 냄새가 중요한 영화고 그게 영화 후반부를 관통하게 되죠.” 


Q. 감독님 영화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희망을 실낱같고 어렵게 넣으려고 해요. 그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기생충’에서 최우식이 갖는 희망도 슬픈 희망이죠. 희망을 품는 것에 대한 슬픔이 있어요. 희망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너무 실낱같다보니 그걸 화면 밖에서 보는 우리 마음도 슬픈 거예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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