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판사님 딸이 피해자여도 이런 판결 내릴 겁니까”

“판사님 딸이 피해자여도 이런 판결 내릴 겁니까”

기사승인 2019-06-19 0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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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쿡기자] “판사님 딸이 피해자여도 이런 판결 내릴 겁니까”10살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30대 보습학원 원장의 형량이 항소심에서 대폭 감형됐습니다.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서울고법 형사 9부(부장판사 한규현)은 지난 13일 학원장 이모(35)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1심 징역 8년에 비해 형량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씨는 지난해 4월 채팅앱으로 만난 10살 A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소주 2잔을 마시게 했습니다. 이후 피해자의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누른 뒤 성폭행한 혐의를 받습니다. 이씨는 피해자 A양이 초등학생인 줄 몰랐고 합의 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하며 혐의를 전면 부인 중입니다. 

1심은 이씨가 폭행·협박으로 A양을 억압했다고 봤지만, 2심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씨가 A양을 폭행·협박했다는 직접증거는 A양의 진술이 유일하지만, 여러 상황을 살펴봐도 진술만으로는 폭행·협박으로 간음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판결이 나오자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대한민국 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난 1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아동 성폭행범을 감형한 *** 판사 파면하라’는 청원글이 올라왔습니다. 청원글은 9만명이 넘는 시민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비판 여론이 거세자 항소심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해명에 나섰습니다. 서울고법 형사9부는 17일 자료를 내고 피해자 영상 녹화 진술만으로는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 및 협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피고인으로부터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고, 조사관이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는 취지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라면서 “이를 통해서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몸을 누른 경위, 누른 부위, 행사한 유형력의 정도, 피해자가 느낀 감정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해 원칙적으로 ‘강간죄 무죄’가 선고돼야 하지만, 직권으로 ‘미성년자 의제 강간죄 유죄’ 판단을 내렸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무죄가 선고될 수도 있었다”는 부분이 불에 기름 부은 격이 된 겁니다. 30대 남성이 10살 아이를 유인해 성관계를 가진 것 자체가 죄질이 좋지 않은데,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럼 두 사람이 합의라도 했다는 뜻이냐는 겁니다. 10살에 불과한 피해자의 입장을 간과했다는 타당한 지적이 나옵니다. 최근 법조계 인식은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증거가 없더라고 처벌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이와 동떨어졌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많은 국민이 “판사 자신의 딸이 피해자라도 이런 판결을 내릴 수 있냐”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법조계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한국여성변호사(회장 조현욱)는 지난 14일 성명을 내 “징역 3년형 선고는 법정형 중 가장 낮은 형량으로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며 “(법원이) 사실관계와 법리검토에 충실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양형 단계에서 일반인 상식에 수렴하는 노력을 통해 법과 사회와의 괴리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이 같은 결과를 매우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에서의 성인지 감수성은 “성범죄 사건 등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지난해 4월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성폭행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판례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재판부도 국민이 생각하는 ‘상식’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상황, 맥락에 대한 이해와 피해자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채 기계적 논리에만 치중한다면 국민 법 감정과 괴리 있는 판결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판결이 거래 수단으로 전락한 사법농단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습니다. 사법부는 높아진 국민 불신과 외면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걸까요.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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