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한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02 18: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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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렌킴제 궁전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에는 헤렌킴제 성의 방을 장식하는데 사용된 아름다운 집기들은 물론 루트비히 2세가 추진했던 건설사업의 모형과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환상적인 모습이 눈길을 끈다. 

뮌헨의 이자르 강변에 지을 예정으로 1865년 고트프리드 셈페르(Gottfried Semper)가 설계한 리하르트 바그너 페스티벌 극장(Richard-Wagner-Festspielhaus)의 모형도 보인다. 곳곳에 마이센에서 만든 다양한 도자기들이 전시돼있다.

헤렌킴제 성을 건설하는데 들어간 자금은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린더호프 성을 건설하는데 든 자금을 합친 것보다 많았기 때문에 이 성을 지으면서 겪은 재정적 어려움이 루트비히 2세의 운명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9일을 지낸 다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헤렌킴제 성을 구경하고는 부지런히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12시에 떠나는 배를 타야 약속한 시간에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체여행은 때로 여유 있게, 때론 시간에 쫓기듯 움직여야 한다. 헤렌인셀에서 나와 프리엔 암 킴제에서 섬을 바라보니 손에 잡힐 듯하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면 너끈히 건너갈 수도 있겠다. 

갑자기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 있는 청령포 생각이 났다. 세조의 명에 따라 단종을 유폐한 곳으로 깎아지른 육육봉의 절벽 아래 동강이 휘돌아가는 곳에 생긴 좁은 땅으로 섬도 아니면서 섬 같은 장소다. 군사를 둬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고 하는데 삼족을 멸한다는 선조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엄홍도는 밤마다 강을 건너 단종의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생뚱맞아 보이지만 헤렌킴제에서 청령포를 떠올린 것은 단종과 루트비히 2세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종은 세조의 명에 의해 유폐됐지만 루트비히 2세는 스스로를 유폐시켰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단종의 처소는 왕이 머물기에는 지나치게 소략했는데 루트비히의 처소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것도 차이겠다.

프리엔 암 킴제의 선착장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날 점심도 돼지고기 요리였다. 유럽에선 고기가 가진 원래의 풍미를 잘 살리는 요리가 주목받는다고 한다. 우리처럼 냄새를 잡기위해 양념을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쉽게 익숙해질 수 없었다. 프리엔 암 킴제에서 먹은 돼지고기 요리는 양념이 넉넉한 편이라 그나마 모두 먹을 수 있었다.

킴제의 호안에서 가장 큰 마을인 프리엔 암 킴제는 앞서 적은 것처럼 킴제로 흘러드는 프리엔 강 유역에 형성된 마을이다. 프리엔(Prien)이란 강 이름은 ‘산으로부터 오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켈트어, ‘브리게나(Brigenna)’에서 왔다. 팔켄스타인(Falkenstein) 백작이 영지를 다스리는 중심 마을로 1158년 무렵 설립됐다. 

이 마을이 설립되기 수세기 전부터 서쪽에 있는 키엠가우(Chiemgau) 계곡에는 로마인과 켈트족의 정착촌이 들어서있었다. 19세기 초에 300명 정도 살던 이곳이 오늘날 1만 명이 사는 곳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1860년에 뮌헨과 잘츠부르크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된 덕이다. 헤렌인셀에 헤렌킴제 성이 지어지고 일반에 공개되면서 성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한 몫 했다. 킴제 철도는 크라우스(Krauss)사가 1887년에 설치한 협궤열차로 설치 당시의 기관차가 지금도 운행된다.

킴제 안의 섬으로 운항하는 10척의 보트를 운영하는 킴제 쉬프파르트(Chiemsee-Schifffahrt)는 1926년에 패들 바퀴를 단 살롱 기선을 취항하면서 출범했다. 현재 여름에는 매 20분마다, 겨울철에는 매 시간마다 운항한다.

식사를 마치고 1시 반에 뉘른베르크(Nürnberg)를 향해 출발했다. 뉘른베르크까지는 3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고 하는데,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정도 가자 속도가 떨어진다. 주말을 휴양지에서 보낸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느라 고속도로 정체가 시작된 것이다. 

2시간쯤 지나자 이번에는 하늘이 온통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이면서 바람까지 거세게 불더니 드디어 비가 쏟아진다. 눈에 서리까지 더해진 꼴이다. 고속도로에서 현대의 i30과 기아 소렌토를 볼 수 있었던 것도 고속도로 정체 덕분일 수 있다. 세상사는 새옹지마인 것이다. 도로변에 호프밭이 이어지는 것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출발하고서 3시간 정도 지났을까 이번에는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도 엷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2시간 정도를 강한 비구름이 덮고 있는 지역을 뚫고 온 것이다. 얼마를 더 가서 뉘른베르크에 도착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보석상자라고 부르던 곳이다.

뉘른베르크는 2016년 기준 인구 51만1628명으로 바이에른 주에서는 뮌헨에 이어 두 번째 큰 도시이며, 독일 전체에서는 14번째다. 뉘른베르크는 동북쪽에 있는 바이로트 남쪽, 해발 425m에 있는 마을 페그니츠(Pegnitz)에서 기원하는 페그니츠 강변에 세운 도시이다. 

길이 113㎞의 페그니츠 강은 뉘른베르크의 북서쪽에 있는 퓌르트(Fürth)에서 레드니츠(Rednitz) 강에 합류하고, 레드니츠 강은 밤베르크 서쪽에서 마인 강에 합류한다. 라인-마인-도나우 운하(Rhein-Main-Donau-Kanal)가 뉘른베르크의 외곽지역을 서쪽에서 남쪽으로 감싸며 지난다.

북해로 흘러드는 라인 강과 흑해로 흘러드는 도나우 강을 연결해 유럽대륙을 관통하는 수로를 개설하려는 노력은 상당한 역사를 가진다. 독일의 중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라인 강에 합류하는 마인 강과, 독일의 남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도나우 강을 연결하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라인강 수계와 도나우강 수계의 간격이 가장 가까운 곳은 바이에른의 바이센부르크(Weißenburg) 지역을 흐르는 라인 강 수계의 슈바비안 레자트(Swabian Rezat) 강과  트로이히트링겐(Treuchtlingen) 지역을 흐르는 도나우 강 수계의 알트묄(Altmühl) 강이다. 두 강 사이는 불과 2㎞정도 거리인데다 평평한 지형으로 돼있다. 

793년 샤를마뉴 대제의 명으로 두 강을 연결하는 카를스그라벤(Karlsgraben, 카를 배수로)이 건설됐다. 길이 3㎞, 폭 5~6m인 수로도 깊이는 7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샤를마뉴 대제가 직접 감독에 나섰지만 지형적 특성과 강우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설에는 여러 개의 연못을 제방과 둑으로 연결해 배가 운행할 수 있는 운하가 완공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샤를마뉴가 운하를 건설하게 된 이유는 라인 수계와 바이에른 사이의 상품 수송체계를 개선하기 위함이라는 주장과 전쟁물자를 도나우 수계에서 라인 수계로 옮기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연결하는 운하건설은 19세기에 들어와 바바리아 왕국의 루트비히 1세에게 영감을 줬고, 1836~1846년 사이에 밤베르크(Bamberg) 지역의 마인 강을 켈하임(Kelheim) 지역의 다뉴브 강과 연결하는 루트비히 운하(Ludwig-Donau-Main-Kanal 또는 Ludwigskanal)가 됐다. 수로의 폭은 좁았지만 많은 수문을 세워 통행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물이 부족해 항행의 경제성이 떨어졌다.

특히 남부 독일의 시골지역에 빠르게 확산되는 철도망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날 루트비히 운하는 뉘른베르크(Nuremberg)와 베르칭(Berching)을 연결하는 약 60km의 구간이 남아있으며, 수문도 여전히 작동하는 등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운하 주변의 견인 경로의 일부는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전환됐다.

현재의 마인-도나우 운하는 밤베르크의 마인 강에서 뉘른베르크를 거쳐 켈하임의 도나우 강에 이르는 171㎞구간의 공사를 1960년 착공돼 1992년 완공됐다. 수로의 단면을 보면 전반적으로 사다리꼴을 이루는데, 바닥에서의 폭은 31m, 수면에서는 55m, 수심은 4m를 유지한다. 항행이 가능한 최대 크기의 선박은 길이 190m, 너비 11.45m에 달한다.

운하의 구간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17㎞ 길이의 샤이텔할퉁(Scheitelhaltung)으로, 해발 406m 높이로 상업용 선박이 도달할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밤베르크에서 이 구간 사이의 표고차는 175m다. 전체 구간에 25m 높이의 수문이 16개가 있다. 이들 수문은 4개 센터에서 원격조정 된다. 운하를 통해 운송된 화물은 2010년 기준, 521만톤에 달했다.

뉘른베르크는 1050년 ‘동프랑크와 바바리아 사이에 제국의 성이 있는 곳’이라는 내용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 무렵부터 1192년까지는 오스트리아의 랍스(Raabs) 가문이 다스렸지만, 마지막 성주 콘라드 2세(Conrad II)가 남자자손이 없이 사망하자 사위인 호엔졸레른(Hohenzollern) 가문의 프레데릭 1세(Frederick I)가 성주를 이어받았다. 1218년 프레데릭 1세의 아들 콘라드 3세가 성주가 되면서 독일 왕이 됐다. 

뉘른베르크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의회와 법원이 있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비공식적 수도라고도 했다. 1346년 보헤미아의 카를 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뉘른베르크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15세기와 16세기를 지나면서 뉘른베르크는 독일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1525년에는 신교의 개혁을 받아들였다. 1632년 스웨덴의 구스타프(Gustavus Adolphus) 왕의 군사에 점령되는 사건 이후에 뉘른베르크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쇠퇴되어 갔다. 19세기에 산업의 중심이 되면서 활기를 되찾게 됐다.

나치당은 뉘른베르크가 독일제국의 중심에 위치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던 점을 고려해 뉘른베르크에서 나치당대회를 개최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뉘른베르크 군중집회는 나치이념을 전파하는 선전 이벤트의 핵심이 됐다. 또한 이런 연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나치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이곳에서 열리게 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한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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