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05 16: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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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뉘른베르크 시로 들어가면서 작은 개울을 따라 달린다. 뉘른베르크시를 관통하는 페그니츠(Pegnitz) 강이다. 강 건너편으론 성벽이 이어진다.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를 따라간 곳은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Sankt Sebaldus Kirche)다. 뉘른베르크의 수호성인인 제발두스 성인을 기리는 교회다. 성모 교회와 로렌츠 교회 등과 함께 중세 무렵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였다.

제발두스 성인은 뉘른베르크에 은둔해 선교에 힘쓴 수도사로 1425년 뉘른베르크 공의회의 요청에 따라 교황 마르티노 5세(Papa Martino V)에 의해 시성됐다. 제발두스 성인의 삶에 대해 다양한 전설이 전해진다. 1280년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코니아 출신인 제발두스 성인은 1056년에 사망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 시절에 활동했다. 이탈리아 순례를 마치고 뉘른베르크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프랑크왕국의 고귀한 신분인 제발두스 성인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바바리아의 아이히쉬타트(Eichstätt)의 주교 빌리발트(Willibald)와 형제인 비니발트(Winibald)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빌리발트와 비니발트는 8세기에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어 제발두스 성인이 8세기 사람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제발두스 성인은 나중에 그의 이름과 관련된 제발더 제국의 숲(Sebalder Reichswald)의 선교사가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제발두스 성인은 프랑스의 공주와 결혼한 덴마크왕의 아들이었다는 설인데, 결혼식을 치룬 밤에 공주를 버리고 로마로 순례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제발두스 성인이 로마에서 교황을 만났을 때, 교황은 뉘른베르크의 숲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줬다고 한다.

뉘른베르크의 제국의 숲(Reichswald)은 페그니츠 강을 경계로 남쪽의 로렌츠 제국의 숲과 북쪽의 제발더 제국의 숲으로 이루어진다. 제발더 제국의 숲은 1만 헥타르(ha)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인데 720년 무렵 이곳을 점령한 프랑크왕국의 왕이 재조림을 명해 소나무를 심고 출입을 금한 것에서 시작해 울창한 숲을 이르게 됐다.

성모 교회(Frauenkirche), 장크트 로렌츠(St. Lorenz) 교회와 함께 뉘른베르크에서 중요한 3대 중세교회로 꼽히는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는 122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기 시작해 1275년에 완공됐다.  1309~1345년 사이에 측면 통로를 넓히고, 첨탑을 높이는 한편 고딕 양식의 홀을 만들었다. 15세기에 두 개의 탑을 추가로 건설했다. 

17세기 중반에 갤러리를 추가하면서 내부 장식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것을 전후에 복원했다. 내부의 장식 가운데 제발두스 성인의 무덤과 바이트 스토스(Veit Stoss)의 작품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일부는 예전의 것이다.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에서 보면 왼쪽 언덕 위로 뉘른베르크 성이 있었지만, 짧은 자유 시간으로는 다녀올 상황이 되지 않았다. 뉘른베르크성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거처하던 곳이다. 신성로마제국(라틴어: Sacrum Romanum Imperium)은 중세 초 무렵 중앙 유럽을 중심으로 성립한 다민족 영토복합체이다. 그 가운데 독일왕국이 가장 컸으며,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 등을 비롯해 작은 공국 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 샤를마뉴 대제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하면서 3세기 전에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선언한 것에서 출발한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카롤링거 왕조의 신성로마제국은 924년에 끝나고 말았다. 

한편 독일왕국의 오토 대제는 936년 부왕 하인리히 1세에 이어 독일왕으로 선출됐다. 961년에는 베렝가리오 2세의 이탈리아왕국을 격파하고, 이듬해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됐다. 역사학자에 따라서 오토대제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이 시작됐다고도 한다. 오토왕조의 서로마제국은 1024년 하인리히 2세의 죽음으로 끝났다.

독일왕국 내의 여러 귀족들이 논의한 끝에 잘리어가의 콘라트 2세를 독일왕으로 선출해 잘리어왕조가 시작됐다. 잘리어왕조 시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주교 서임권을 두고 충돌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파문을 철회 받을 수 있었지만 잘리어왕조의 신성로마제국의 왕위계승 관례가 흔들리게 됐다. 

1125년 하인리히 5세 사후에 귀족들은 잘리어가 대신 작센 공작 로타르를 왕으로 선출했고, 1933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해 로타르 3세가 됐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죽자 하인리히 5세의 조카인 호엔슈타우펜가의 콘라트 3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 시절 신성로마제국은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해 번영을 누렸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 사후에 독일왕국은 분열됐고, 귀족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왕이 선출되지 못하는 대공위시대가 있었다. 1273년에서야 합스부르크 백작가문의 루돌프가 만장일치로 독일 왕에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시작됐다. 대공위시대를 거치면서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독일 왕을 선출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1356년에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왕을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선제후의 구성과 선거절차에 관한 규정을 둔 금인칙서를 정하게 됐다. 선제후(選帝侯, 라틴어: Princeps Elector)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뽑는 권한을 가진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이다. 

초기에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 등 3명의 성직제후와, 보헤미아 국왕(뒤에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됨), 브란덴브르크 변경백(뒷날 프로이센의 왕이 됨), 라인 궁중백과 작센공 등 4명의 세속제후로 구성됐다. 뒤에 바이에른공과 하노버공이 추가됐으며, 7년 전쟁(1756~1763년) 이후에는 라인 궁중백이 빠지고, 잘츠부르크 공, 바덴 변경백, 뷔르템베르크 공, 헤센-카셀 방백 등이 추가됐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프리드리히 3세는 헝가리와 전쟁을 하느라 필요한 전비를 귀족들에게 빌렸는데, 그의 아들 막시밀리언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귀족들은 궁정정치에 참여를 요구받게 됐다. 그리해 1489년에 제국의회(Reichstag)가 시작됐다.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이 참여하는 제국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의 입법기관이자 자문기관이다. 불규칙하게 열리던 제국의회는 1663년 도입된 레겐스부르크 영구의회부터 정해진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열리게 됐다.

161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는 종교개혁에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을 강제했다. 제국 북쪽의 개신교에 찬동하는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보장받은 종교선택의 권리가 부정되는데 반발해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해 대항하게 됐다. 

이렇게 시작한 신성로마제국의 내전에 스페인,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 주변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됐고, 종내에는 종교적 색채가 엷어지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국의 대결로 치달았다. 전쟁터가 됐던 신성로마제국은 황폐화됐고, 이어진 오스만튀르크의 침입을 겨우 막았지만 지원에 나섰던 강대국들에게 영토를 떼어줘야 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로마제국은 에스파냐 계승전쟁, 폴란드 계승전쟁,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등에 휘말렸고, 1740년 이후에는 급부상한 프로이센과의 세력다툼이 이어졌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불똥이 튈 것을 걱정한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연방들은 프랑스 혁명정부와 간헐적인 전투가 이어졌고, 1805년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에게 대패한 끝에 1806년 8월 6일 제국이 해체됐다.

뉘른베르크 성은 11세기 초부터 12세기 초에 건설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살리안 왕조의 성(salische Königsburg), 12세기 초부터 13세기 중반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된 호엔슈타우펜 왕성(Hohenstaufen Kaiserburg), 그리고 15세기 무렵 고딕양식으로 지은 궁전과 도시의 건축물 등으로 이뤄진다. 뉘른베르크성은 사암으로 된 언덕마루에 세워졌다. 천국의 문(Himmelstor)을 지나면 하셈부르그(Hashemburg) 탑에 이르는 정원이 나온다.

13세기에 지은 원통형의 신웰(Sinwell)탑이 중요한 건물이다. 정원 가운데에 깊은 우물(Tiefer Brunnen)이 있다. 뉘른베르크성의 유일한 수원이었던 만큼 성이 처음 건설될 무렵부터 있었을 것이다. 수면까지의 깊이가 무려 50m에 달하며, 우물의 깊이는 3m 정도이다. 성주의 집(Kastellansgebäude), 부속실(Sekretariatsgebäude) 그리고 재무부서 건물(Finanzstadel) 등이 정원을 둘러싸고 들어서있다.

중문(Innner Tor) 안에는 궁성과 이교도탑(Heidenturm)이 있는 황제예배당(Kaiserkapelle) 그리고 규방 등으로 둘러싸인 안뜰이 있다. 이곳에서 살리안 왕조의 유물을 볼 수 있다. 1455년에 심었다는 하인리히 2세의 후견인인 쿠니군데(Cunigunde) 성인을 기리는 라임나무가 있다. 1984년에 다시 심은 것이다.

북쪽 바위면 위에 서있는 오각형탑이 영주의 성과 관련해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이다. 신웰탑과 망루(Luginsland) 사이에 위치한다. 망루는 성 내부를 정찰하기 위해 1377년 영주 성 정문 부근에 지었다. 베스트너(Vestner) 문은 성 북쪽으로 난 유일 통로였다. 30년 전쟁에서도 큰 손상을 입지 않았던 뉘른베르크 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제국예배당과 신웰 탑만 온전하게 남았을 뿐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전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두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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