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08 07: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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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크트 제발두스 교회에서 뉘른베르크 성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년)의 동상이 서 있는 작은 광장이 나온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럽이 사랑한 독일 화가’라는 평판이 붙은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목판화, 동판화 그리고 수채화 등에서 독창적 경지의 작품을 남겼다.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고, 전성기를 보냈을 뿐 아니라, 뉘른베르크에서 죽었으니, 진정한 뉘른베르크 사람이라고 하겠다. 1828년 그의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바리아의 왕세자 루트비히가 초석을 놓고 동상제작을 주문했다. 뒤러의 동상은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Christian Daniel Rauch)가 초벌을 만들고 야콥 다니엘 부르크쉬미트(Jacob Daniel Burgschmiet)가 주물을 제작해 이곳에 세웠다. 뒤러의 동상은 독일에 세워진 최초의 공공 예술가 기념물이다.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난 뒤러는 처음에 부친으로부터 금세공을 배웠고,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19살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북유럽을 편력했다. 여정은 분명치 않으나, 처음에는 네덜란드나 라인 중부지역에 머물다가 나중에는 알자스 지역에 머물렀던 것 같다. 스물셋이 되던 1494년 고향에 돌아와 아그네스 프라이(Agnes Frey)와 결혼했는데, 3개월 뒤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다시 여행을 떠났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조르조네(Giorgione), 팔마 베키오(Palma Vecchio) 등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뒤러는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1496년 베네치아 시위원회가 영구거주를 제안했지만 거절하고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뒤러는 시위원회 소속 미술가로 도시예술 계획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작은 크기의 동판화와 목판화 그리고 중요한 목판화 연작을 제작했다. 뒤러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로 평가된다.

뒤러의 동상이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 광장의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뉘른베르크성의 티어개르트너문(Tiergärtnertor)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있는 4층 건물이 알브레히트 뒤러의 집(Albrecht-Dürer-Haus)이다. 1420년 무렵 지은 건물로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9년부터 1528년까지 작업장으로 사용했다. 아래 2개 층은 사암으로 지었고, 그 위에 목재 골조로 2개 층을 얹었다. 

뒤러의 사망 300주년을 앞둔 1826년 뉘른베르크 시가 이 집을 인수했고, 1871년 알브레히트 뒤러 하우스 협회에 이관해 기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공습의 피해를 입었지만 뉘른베르크의 구시가지가 완전히 파괴된 것에 비하면 놀랄 만큼 폭격을 견딘 셈이다. 전후 복원을 거쳐 1949년에 일반에 다시 공개됐다. 

2층 작업장으로 통하는 1층의 복도에는 19세기의 프리드리히 방랑자(Friedrich Wanderer)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 집에서 가장 큰 방이 2층에 있는데,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가 작업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다양한 장비와 그림 도구 그리고 재료 등은 뒤러 시대에 사용되던 것들이다. 더해 뒤러 시대에 목판화와 동판화를 제작하는 과정도 전시돼있다. 다락방에 조성된 갤러리에는 뒤러의 주요 작품들이 전시돼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광장의 지하에는 그 유명한 바위굴(Felsengängen)이 있다. 바위굴의 입구는 뒤러의 동상 뒤편에 있다. 뉘른베르크의 지하 바위굴은 지하수를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뚫거나, 맥주를 발효시키거나 저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1303년의 뉘른베르크 맥주순수령에서는 밀과 호밀은 제빵에만 사용하고 맥주 제조에는 보리 맥아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1380년 뉘른베르크 시의회는 맥주를 상업적으로 양조하려면 지하저장시설을 갖추도록 법률로 정했다. 바위 동굴은 섭씨 8~12도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초기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뉘른베르크에는 많게는 42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따라서 각 양조장들은 집 아래 사암을 뚫어 지하 동굴을 건설하게 됐다. 4층 깊이로 바위를 파고 이웃의 허락을 얻어 옆으로 확장시켰다. 

지하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2만5000㎢ 면적의 사암지형에 미로 형태의 굴을 팠다. 그리고 환기체계를 개발해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도록 했다. 오늘날 알려진 지하 바위동굴은 주로 뉘른베르크 구시가의 북쪽에 몰려있지만, 구시가의 남쪽에도 많은 양조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은 지하 동굴이나 저장소가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뉘른베르크의 지하 동굴은 공습대피소로 활용됐다. 1945년 1월 2일 저녁의 대대적인 공습은 구시가의 90%를 파괴하는 가공할 수준이었지만, 비슷한 규모의 공습이 이뤄진 드레스덴, 쾰른, 카셀, 도르트문트, 함부르크 등의 도시에 비해 뉘른베르크의 주민들의 사망자수는 월등이 낮았다. 뿐만 아니라 지하통로와 저장시설은 교회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작품을 대피시키는 장소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 국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특히 1945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미국과 영국의 항공기 800대가 출격해 무려 3900톤의 폭탄을 퍼부은 드레스덴에서는 무려 13만명이 죽고 아름다운 도시가 초토화됐다. 미국의 풍자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는 21살이 되던 해 벌지 전투에서 포로가 돼 드레스덴 인근에 있는 ‘제5 도살장’이라는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동안 이 폭격을 겪었다. 다행히 지하에 있는 고기저장고에 들어갈 수 있어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경험이 소설 ‘제5 도살장’에 담겨있다.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 옆 광장에서 알베르히트 뒤러의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는 모리츠 예배당이 있던 자리라는 현판이 있다. 모리츠예배당은 1313년 뉘른베르크의 유대인 지역에 있었다고 처음 언급됐었다. 새로운 모리츠 예배당은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의 묘지 자리에 세워졌다. 

게르트라우드(Gertraud)와 에버하르트 멘델(Eberhard Mendel)의 발원으로 모리츠(Mauritius) 성인과 벤젤(Wenzel) 성인(보헤미아 공작인 바츨라프 1세(Wenceslaus I)를 말한다)을 기리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하지만 1482년에는 교회의 주인인 세발드 쉬라이어(Sebald Schreyer)가 교회를 곡물 저장고로 사용하면서 예배당으로서 기능을 잃었다. 1576년에는 인근의 와인가게에서 와인통을 저장하기도 했다.

1806년 뉘른베르크가 바바리아 왕국에 합병된 다음 다른 교회와는 달리 파괴를 면하고 군대의 건초와 재목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됐다. 1828년 루트비히 1세가 뉘른베르크를 방문했을 때 예배당을 국립전시장으로 사용토록 했다. 1852년 국립 뉘른베르크 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전시물을 옮기면서 특별한 용도 없이 방치되다가 1882년부터는 다시 예배당으로 사용됐다. 

20세기 들어 몇 차례 개조공사가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공사가 이어졌는데, 1944년 10월 연합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때 예배당 이웃에 있던 브랏부어스트글뢰크라인(Bratwurstglöcklein)이라는 식당도 같이 무너졌다. 이 식당은 1313년 예배당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던 건물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15세기 후반에 문을 연 것으로 추정된다. 

1608년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의 제발두스 광장에 작은 주점이 있었다. 이 주점에 대한 공식기록은 1729년의 매매문서에 나온다. 문서에 기록된 주점의 이름은 ‘푸른 요령으로(Zum blaue Glöcklein)’였다. 여인숙과 마굿간이 딸린 주점을 50굴덴의 대출을 안고 2900굴덴에 매각했다는 내용이다. 제발두스 교회의 남쪽에 있는 시장의 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주점의 이름은 뉘른베르크가 발전을 거듭하던 시기에 바뀌었을 것이다. 

주점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는데, 1804년에는 4000굴덴에 매매됐고, 1836년에는 1만254굴덴이 됐다. 1878년 가르텐라우베(Gartenlaube) 신문의 기사에 이렇게 언급됐다. “주방설비나 지하창고의 가격에 실비집이라는 명성이 더해져 쉽게 값을 정할 수 없다. 굳이 가격을 매긴다면 2만4000굴덴으로 추산된다.”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삭스(Hans Sachs), 빌리발드 피어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 등이 이 주점의 단골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충분히 가능하다 할 것이다. 프리츠 트라고트 슐츠(Fritz Traugott Schulz)는 뉘른베르크의 연감에 이렇게 적었다. “브랏부어스트글뢰크라인은 다른 어느 가게보다 오래 됐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돼지를 도살하고 맥주와 함께 고기와 구운 소시지를 내놓은 주점 가운데 하나였으며, 특히 구운 소시지는 언제나 특별한 명물이었다.”

오랜 세월을 단골과 함께 했던 이 주점은 모리츠 예배당과 함께 1944년 10월 3일의 공습으로 무너져 내렸다. 모리츠 예배당이 복원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브랏부어스트글뢰크라인의 복원 역시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다만 1971년부터 뉘른베르크 중앙역 맞은편 한트베르커호프에 동명의 식당이 운영되고 있다. 

브랏부어스트는 옛 고지독일어(Althochdeutsch)의 브랫부어스트(Brätwurst)에서 유래했다. 브랫은 잘게 자른 고기를 의미하며 부어스트는 소시지를 말한다. 소시지의 조리법에 대한 기록은 서기 22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독일에서 처음 발견된 브랏부어스트에 관한 기록은 1313년 뉘른베르크에서 처음 발견됐다. 

브랏부어스트는 40여종이나 된다. 그 가운데 전통적인 뉘른베르크 브랏부어스트는, 돼지고기를 곱게 갈아서 신선한 마조람(marjoram)으로 독특한 맛을 낸 소시지이다. 길이 7~9cm, 무게는 20~25g 정도의  소시지를 너도밤나무의 불에서 구어 낸다. 3~6개의 소시지를 으깬 감자 혹은 소금에 절인 양배추와 고추냉이 혹은 겨자 등을 곁들인다. 

브랏부어스트 가운데 ‘오리지널 뉘른베르크 로스트브랏부어스트(Original Nürnberger Rostbratwurst)’와 ‘뉘른베르크 브랏부어스트(Nürnberger Bratwurst)’ 2종의 브랏부어스트는 2003년부터 EU의 ‘보호된 지리적 표시(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s, PGI) 제도의 보호를 받고 있다. 1998년 3월 18일 발효된 뉘른베르크시의 법률, 경제 및 노동위원회가 결정한 제조방식에 따라 뉘른베르크 안에서만 제조된 브랏부어스트에만 상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조치가 반영된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세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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