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강지환 집까지 갔냐” 반복되는 여성 피해자 ‘청문회’

기사승인 2019-07-1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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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아내 폭행사건 피해 여성에게 한국 국적을 주지 말아주세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지난 10일 올라온 글이다. 작성자는 가정폭력 피해자인 베트남 여성이 “불륜에 빠져 혼외자를 낳아 가정을 파탄낸 상간녀”라며 “이번 사건 역시 국적취득을 목표로한 저의가 의심된다”고 적었다. 해당 청원은 15일 오후 5시 기준 2만7356명이 서명했다.

한국인 남편이 베트남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영상을 본 네티즌은 분노했다.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하고, 피해자와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와 내연 관계였다는 주장이 나오자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여론은 술렁였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폭행 영상 촬영도 한국에 머물려고 계획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등장했다. 

여성 범죄 피해자의 무결성을 검증하는 2차 가해가 반복되고 있다. 범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비방하는 것이 2차 가해다. 범죄 원인을 피해자의 처신에서 찾는 오류다.

배우 강지환(42·본명 조태규)은 지난 9일 여성 2명을 성폭행·성추행 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 사건 피해자들은 이들의 처신을 문제삼는 여론에 직면해야 했다. 사건 당일 피해자 중 한 명은 “강지환 집에 갇혀 있다”는 메시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일부 네티즌은 “정말 감금된 상황이면 경찰에 신고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 피해 여성들이 강지환의 집까지 따라간 게 잘못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안희정(54)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34·여)씨도 2차 가해를 겪었다. 안 전 지사의 부인 민주원(55·여)씨가 김씨의 '피해자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다. 민씨는 안 전 지사가 2017년 9월 4일 스위스 출장 중 김씨와 나눈 메시지를 SNS에 공개했다. 민씨가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현지 시각 새벽 1시쯤 안 전 지사가 ''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김씨가 '넹'이라고 답장했다. 대화 직후 김씨가 슬립 차림으로 안 전 지사 객실로 갔다는 게 민씨 주장이다. 김씨가 자발적으로 안 전 지사를 찾아갔으니 성폭력이 아닌 연애 관계라는 것이다. 민씨는 “미투가 아니라 불륜”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5월 비공개 촬영회 성폭력을 고발한 유튜버 양예원(25·여)씨도 꽃뱀 낙인으로 곤욕을 치렀다. 사건이 발생한 지난 2015년 당시 스튜디오 실장과 양씨가 나눈 카카오톡 대화가 논란이 됐다. 양씨는 "다음주 평일에 시간이 된다"며 "몇 번 더 하려고 한다"고 말 했다. 해당 대화가 공개되자 양씨는 “촬영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피해자 답지 않다”는 공격을 받았다. “왜 강지환 집까지 갔냐” 반복되는 여성 피해자 ‘청문회’

피해자 검증은 사이버 공간 밖에서도 되풀이 된다. 피해 여성들은 사건 신고부터 종결까지 2차 가해를 마주한다. 피해 여성들은 경찰 혹은 검찰에 피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 상황 판단, 과거 이력들을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 “모텔 가는 것 자체가 동의 아니냐” “왜 처음부터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받기도 한다.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간 변호사와 상담사가 2차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의 지난 2017년 상담 통계분석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한 대상은 가족과 주변인(44.5%), 직장(18%)에 이어 수사기관이 17.5%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측은 “성폭력 피해 신고율이 1.9%밖에 되지 않아 수사기관에 도달하는 피해자가 소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비중”이라고 분석했다.

여성 피해자의 사생활과 범죄 피해 사실은 관련이 없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피해지원국장은 ‘순결한 피해자 프레임’을 지적했다. “여성을 순결한 성녀와 창녀로 양분하는 남성중심 문화에서 나타나는 문제”라며 “2차 가해는 피해 여성이 성녀인지 창녀인지 구분하는 과정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 국장은 “성녀에게만 피해자 자격이 허락된다. 그러나 성녀의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조 활동가는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을 과거 이력과 사생활에 묶어둔다”면서 “여성이 피해자의 위치에 놓이면 사회는 가부장적 잣대를 들이민다”고 말했다. 이어서 “일명 ‘정조 관념’에 위배되는 여성에게는 피해자가 아닌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고 지적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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