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여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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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병원에 붙어 있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7시 무렵 숙소로 떠났다. 페그니츠 강의 남쪽 도로를 지나면서 복원된 뉘른베르크 구시가의 예스런 모습을 감상하려는데 경적을 울리면서 도로를 달리는 차들로 소란스럽다. 그리고 보니 길가에도 사람들이 몰려있고 도로상황을 정리하는 경찰이 나와 있다. 

사람들은 크로아티아 국기를 몸에 감고 있고, 대형 크로아티아국기를 내젓기도 한다. (처음에는 청색, 흰색, 빨간색 띠로 되어 있어 프랑스 국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프랑스 국기는 세로로 배열돼있고 아무런 표지가 없는데 반해, 크로아티아국기는 가로로 배열돼있고 가운데 크로아티아 국장이 들어있다.) 

알고 보니 이날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프랑스와 크로아티아가 결승전을 치른 날이었다. 우리가 숙소로 돌아갈 무렵 경기가 마무리됐는데 프랑스가 크로아티아를 4:2로 꺾고 우승을 했던 것이다. 도로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크로아티아 사람들이었다. 안타깝게 우승을 놓쳤지만, 사상 처음 결승전에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한 것을 축하하고 즐기는 모습이었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독일을 2:0으로 꺾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날 묵은 숙소는 두첸트테이히(Dutzendteich, ‘한 다스의 호수’라는 의미) 호숫가에 있는 콩그레스 호텔 메르쿠어 뉘른베르크(Congress Hotel Mercure Nürnberg an der Messe)였다. 호텔 가까이에 독일 철도노선의 중심이 되고 있는 뉘른베르크 조차역이 있다. 숙소주변에 도토리나무들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어 호젓한 분위기가 난다. 

가을에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떨어지는 도토리를 보면서 안타까워한단다.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 텐데, 독일 사람들은 참 뭘 모른다고’ 나무가 우거진 탓인지 근처에 호수가 있는 줄 몰랐다. 호수 건너편에는 나치전당대회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가 있다. 뉘른베르크는 1843/1854년에 걸쳐 루트비히 남북철도(Ludwig-Süd-Nord-Bahn)가 개통되면서 중요한 철도교차점이 됐다. 

밤베르크, 베이로트, 슈반도르프, 레겐스부르크, 트로이크트링겐, 르레일쉐임, 퓌르트와 뷔르츠부르크 등으로 가는 노선이 별모양을 하고 있다. 1847년에 개설된 중앙역에서 출발하던 기차들이 포화상태를 넘어서자 1900~1907년 사이 새로운 뉘른베르크 조차역(Nürnberg Rangierbahnhof)을 건설하게 됐다. 뉘른베르크 남쪽 외곽에 자리한 조차역은 폭이 2.5㎞, 길이가 5.2㎞로서 면적이 340헥타르에 달한다. 물동량도 대단해서  2003년에는 매일 100개 이상의 열차가 40곳이 넘는 목적지 사이를 운행했다. 

나치전당대회장 및 역사전시관(Dokumentationszentrum Reichsparteitagsgelände)은 종전 후 러시아군이 폭파한 의사당의 북동쪽 건물을 복원해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려는 기념비적 건물이다. 나치당은 1923년 뮌헨에서 제1차 전당대회를 시작으로 1926년에는 바이마르에서, 그리고 1927년부터 1938년까지는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1934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부터는 지지자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모아 나치에 대한 적극적인 선전의 장소로 활용했다. 

1945년 소련군이 이곳을 함락했고 종전 후에는 이곳에서 대독 승전일 축제를 열기도 했다. 원래 이 장소는 1906년 이래로 바바리아의 루이폴드 왕자의 이름을 딴 루이폴드하인(Luitpoldhain, 루이폴드 숲)이라는 공원이 있었다. 1930년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전사한 9855명의 뉘른베르크 출신 군인을 기념하기 위한 명예의 전당(Ehrenhalle)을 프리츠 메이어(Fritz Mayer)의 설계로 짓기 시작했지만, 히틀러의 집권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1933년, 히틀러는 루이폴드 공원을 포함한 8만4000m² 면적의 지역을 루이폴드아레나(Luitpoldarena)로 지정해 정당집회를 열도록 했다. 나치당은 바이에른 전시회에 사용할 목적으로 1906년에 지은 루이폴드홀(Luitpoldhalle)을 전당대회장으로 사용했다. 180m × 50m 크기의 루이폴드 홀은 76개의 대형 스피커와 42개의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독일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갖추고 1만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일부를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의사당(Kongresshalle)은 뉘른베르크 건축가 루드비히(Ludwig)와 프란츠 러프 (Franz Ruff)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한 것으로 직경 250m에 높이는 39m에 달한다(높이는 70m로 계획됐었다). 의사당 서쪽을 감싸고 너비 40m의 그로세(Große Straße)가 지난다. 이 길이 뉘른베르크 성을 향하고 있는 것은 제3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호수 남쪽 끝에 있는 독일 운동장(Deutsches Stadion) 앞에는 관람석을 설치해 그로세 대로를 지나는 행렬이 관람석에 앉아있는 요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세계의 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를 염두에 두었던 알베르트 스페르(Albert Speer)가 설계한 독일경기장은 길이 800m, 너비 450m로 연면적이 35만m²에 달하는 것으로 40만 명이 동시에 입장 가능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으로 설계됐다. 

아테네의 판아테나 경기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1938년 굴착을 시작했지만 1939년에 중단되었고, 구덩이의 남쪽 부분은 전후 파괴된 건물의 잔해로 매립됐고, 북쪽 구덩이에는 물이 고여 호수가 되는 바람에 실베르제(Silbersee, 은 호수)라고 부른다. 호수의 남동쪽에는 비행선 정박장(Zeppelinfeld)이 있었다. 폭 360m인 큰 것과 작은 것 2개가 있었다. 

뉘른베르크하면 우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들의 죄과를 따진 전범재판소가 설치된 도시라고 기억한다. 나치의 전범 재판 가운데 의사재판이 있었다. 12건의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피고인 가운데 의사가 20명이었다. 이들은 의학 연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행한 반인류적인 의학실험(특히 범죄적인 약물실험 및 강압적인 여성 불임시술)을 했다고 기소됐다. 

그 가운데 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사재판 이후에 의학 및 심리학 분야에서 생체실험을 준비하고 진행함에 있어 지켜야할 핵심적인 윤리 법칙을 정한 것이 뉘른베르크 강령이다. 실험대상인 사람의 자발적 동의가 절대 필수라고 규정하는 등, 10조항의 뉘른베르크 강령은 오늘날 의학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고 있다. 

독일 구경에 나선지 다섯 번째 날이다. 독일여행이 어제로 절반을 넘어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해외여행이 조금씩 힘이 드나보다. 전날 아침 일어나면서 허리가 뻐근하다는 느낌이 들더니 숙소에 들어와서는 허리를 굽히는 것도 힘들다. 동전파스를 붙이고, 일찍 잠을 청했던 탓인지 조금 낫다. 이날은 조금 이르게 8시에 숙소를 나섰다.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한밤중에 스마트폰이 울려 잠을 깨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와 시차가 맞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문제는 광고성 전화가 오는 경우에는 물론 받지는 않지만 곤한 잠에서 깨어나게 되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 자정 무렵 이런 전화에 잠을 깼지만 많이 피곤했기 때문인지 금세 다시 잠들었다. 

3시 반 경에 눈을 뜬 것은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 때문이었던가 보다. 아니면 꿈길이었을까? 내일이면 개이겠지 생각하면서 잠들었던 것 같다. 일정이 다소 힘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모닝콜에 눈을 뜨고 보니 비는 내리지 않지만 나뭇잎이 젖어있는 것을 보면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늘 일정은 밤베르크에서 시작한다. 8시가 안 돼 밤베르크를 향해 출발했는데, 고속도로에 차가 밀린다. 월요일에다 출근시간대라서 일까? 아니면 공사를 하는 구간을 지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독일에서는 주로 추운 겨울을 피해 여름철에 고속도로 공사를 한다는데, 비오는 날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밤베르크(Bamberg)는 바이에른주의 최북단에 상부 프랑코니아(Oberfranken) 구역에 위치한 도시이다. 2017년말 기준으로 7만7179명이 거주한다. 상부 프랑코니아에는 200개 이상의 독립 양조장에서 1000종류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어, 주민 1인당 양조장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 밤베르크의 남서쪽을 흐르는 레그니츠(Regnitz)이 도시의 북서쪽 외곽에서 마인강과 합류한다. 

밤베르크는 대성당언덕(Domberg), 미카엘언덕(Michaelsberg), 카울언덕/오베르 파레(Kaulberg/Obere Pfarre), 스테판언덕(Stefansberg), 야곱언덕(Jakobsberg), 알텐언덕(Altenburger) 그리고 아브츠언덕(Abtsberg) 등 7개의 언덕이 있고, 그 언덕 마다 교회 혹은 수도원이 있다. 그래서 하인리히 2세는 밤베르크를 프랑코니아의 로마에 비유했고, 그 비유가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밤베르크는 또한 훈제맥주(Rauchbier)가 유명하다. 훈제맥주는 가마 속에서 나무가 타는 불꽃으로 건조시킨 보리를 사용하여 만든다. 건조과정에서 나무가 타면서 내는 연기의 특유한 향이 보리에 배어 맥주 맛을 내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훈제맥주를 만들지만 밤베르크의 쉔컬라(Schlenkerla)가 잘 알려져 있다. 

기왕 맥주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맥주 이야기도 조금 해보자. 우리나라 맥주의 시장을 나누고 있는 하이트맥주와 오비맥주의 뿌리를 더듬어 가면 일제 식민지시절이던 1933년 일본의 대일본맥주 주식회사가 세운 조선맥주 주식회사와 같은 해 일본의 기린맥주 주식회사가 세운 쇼화기린맥주 주식회사에 닿는다. 

광복 후 미군정이 관리하던 두 회사를 1951년 민간에 불하했는데, 하이트의 전신인 조선맥주가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오비맥주의 전신인 동양맥주가 쇼화기린맥주 주식회사를 불하받았던 것이다. 조선맥주 주식회사에서는 크라운을 동양맥주 주식회사에서는 OB맥주를 생산했다. 그러니까 OB맥주는 기린맥주와 연이 닿는다고 할 수 있고, 크라운맥주는 삿포로 혹은 아사히 맥주와도 연이 닿는다고 할 수 있다. 해방을 전후해 대일본맥주회사 역시 통합되거나 분리됐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의 맥주는 체코의 플젠(Plzeň)에 있는 필스너 맥주의 기술을 도입한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는데, 찾아보면 삿포로맥주는 독일에서 기술을 도입한 것이고, 노르웨이계 미국인 윌리엄 코플랜드(William Copeland)가 세운 기린맥주 역시 원천 기술이 독일맥주에 닿고 있다. 다만 기린맥주가 1990년에 출시한 이치방시보리맥주가 필스너류로 분류되지만 스타일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결국 일본맥주나 우리나라 맥주 모두 독일맥주에 뿌리가 닿는 셈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여섯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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