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캐나다 입양인 김한숙 씨 "생모 찾아 전주에 왔어요"

입력 2019-07-19 19:11:13
- + 인쇄
한국 이름 김한숙. 캐나다인 안젤라 메리 리-팍(50)씨가 한국인 어머니를 찾고 있다.
유창한 영어와 ‘안녕하세요’ 정도의 서툰 한국말은 매우 이국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캐나다로 입양된지 48년이란다. 하지만 엄마를 찾는 모습에서 영락없는 한국인임을 확인했다.
최근 익산 미륵사 방문길목을 지켰다가 만난 김한숙 씨로부터 애타는 사연을 들어 봤다. 충청도가 고향인 빈센트(임성우)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다.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자료를 묻자 그녀는 가방을 뒤적였다. 여행가방에서 내놓은 종이에는 두 살적 사진과 ‘Looking for my birth mother(생모를 찾습니다)’란 문구가 선명했다. 뿐만 아니라 birth place(태어난 곳)에는 Jeon Ju, Korea(전주)라고 적었다. 1969년 3월 15일생이며 e메일 주소도 있었다.

전주에서 입양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도 제시했다. 홀트 양자회에 ‘아동의 장래를 위해 귀하의 알선으로 입양이민하는 것을 승낙하며 아동에 대한 모든 권리를 무조건 포기한다’는 최완섭(전주시 덕진동 2가)씨의 승낙서도 제시했다. 최 씨는 서명란에 ‘원장’이라고 적어, 당시 덕진동에 있던 고아원에서 입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김 씨가 생모 찾기에 나선 것은 지난 2000년. 
김 씨는 당시 해외입양인회가 있고 이들이 모국 투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국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나 한 자매가 이를 통해 부모를 찾고 있다는 소식은 생부모 얼굴을 그려보는 계기가 됐다.

그 전까지는 혈육의 나라 한국을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 세월이었다.
2000년 이후 그러나 그에게 고향 소식을 전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한국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고 방법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손에는 단지 두 살적 사진 한 장만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김 씨는 50살이 된 올 생일에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에 나서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그는 “직장을 한 달 비워 놓고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인터뷰]캐나다 입양인 김한숙 씨 중국계 남편은 아내의 엄마찾기 활동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성장하고 자리를 잡는 데는 남편의 도움이 컸다는 말부터 했다.
김 씨는 15살 때 두 번째 양부모 가정에서 나와 파트타이머로 일을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중국계인 스코트 브래들리 리-팍씨다. 리-팍씨는 김씨가 10대이던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자처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김 씨에게 남편은 큰 믿음을 줬다. 스무살 무렵부터 교제를 하다 8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고, 남편은 아내에게 공부를 권했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당시만 해도 지금의 안정된 삶의 원천이 될 줄 알았을까. 세네카 칼리지에서 법무사 과정을 전공했고 2년 과정을 1년만에 졸업하는 열정을 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김 씨는 법무사로 일하다 2008년부터는 직접 법률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부동산 전문 법무사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에도 탄탄한 뿌리를 내렸다.

김 씨는 자신의 입양기관인 홀트에서는 2010년 5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남편이 한국 태생의 주택 경비원에게 아내의 사정을 이야기 한지 얼마되지 않아 홀트로부터 정보를 얻게 됐다.
김 씨는 “남편은 한국인만 보면 '아내가 생모를 찾는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캐나다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전단지를 뿌렸다.
그녀는 양부모로 부터 받았던 사진과 정보를 홀트에 제공했고 전주에서 입양된 사실도 그 때 알았다고 했다.
김 씨는 “나는 너무 약하고 그래서 남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가 만약 부모형제를 만나면 어떤 말로 말문을 틀지 궁금했다. 그녀는 “나는 건강하게 살아 있고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면서 “(고아원에 보낸 것에 대해서는)'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랬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고 용서한다고 말할 것이다”고 했다. 그녀는 태어난 지 넉달 보름만에 고아원에 보내졌지만 서로 잘 살고 있다는 확인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김 씨는 “50살이라서 이제는 화가 나는 감정은 다 지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린시절은? 하고 물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많이 부모에 화가 나고 속상한 감정을 갖고 살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한국문화를 많이 알게 됐고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혈육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긴 세월, 향수를 어떻게 달랬을까. 그녀는 웃으며 “너무 할 말이 많지만 이제야 만족하고 있다”면서 “2주간 한국을 머물고 있는데, 매우 편안한 마음을 찾았고 ‘내가 한국인이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국인’으로 돌아 온 것이다.

김 씨는 한국 활동에 대해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DNA 샘플을 맡겼고 전북경찰청에도 이야기를 해놨지만 자료가 없어서 찾기가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고 갑갑한 심정을 토로했다.

소인섭 기자 isso2002@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