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낯선 풍경이 일상이 되다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두 번째

기사승인 2019-07-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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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이 2년에서 1년 앞으로 다가왔는데 나는 여전히 퇴직 후 구체적인 계획 없이 두 가지 원칙만 세웠다.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든 서울을 떠나서 살기로 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막연했다. 서예와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몇 년 전부터 작가 등단을 목표로 서예 수업을 받아왔지만 어디 가서든 내 이름 석 자 자신 있게 쓸 수 있을 만한 수준까지도 아직도 멀었다. 여행에 대해서는 어디를 어떻게 왜 여행하고 비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는 그냥 미정이었다.

돌이켜보면 평생을 두고 작은 일에도 걱정과 생각만 많아서 결정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며 살아왔다.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거나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 길을 향해 매진한 적도 없다. 참으로 한 세상 살아내기 어려운 성격인데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했다.

믿는 것은 그저 열심히 살다보니 언제나 길이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기회는 언제나 우연한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 우연의 기회에 기대어 내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여기까지 왔다.

첫 번째의 우연한 기회는 물론 국립 철도고등학교 입학이었다.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고등학교 진학의 꿈이 가물가물할 때 우연히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신입생모집 공고가 눈에 띄었고 얼떨결에 합격을 했던 것이다.

두 번째의 우연한 기회는 군 복무 후 다시 철도공무원으로 복귀하고 1년쯤 지났을 때 안개처럼 다가왔다. 열차 승무원이었으니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퇴근해서 집에서 지내는 날이 일주일에 2-3일 정도인 불규칙한 생활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그날이 그날인 듯 이어지다보면 직급 오르고 오른 직급에서 또 그러한 생활이 이어지다보면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 속에 살았다.

어느 날 야간열차 승무를 마치고 아침에 집에 들어와 한 잠 자고 일어났는데 딱히 할 일이 없었다. TV의 프로야구 중계도 시들했다. 내 나이 스물다섯이 지나가고 있는데 이렇게 재미없이 사는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내게 주어진 현실인 것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생각마저 심드렁해 다시 눕는데 책상 아래 먼지 앉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막내 동생이 쓰던 입시용 영어 교재였다. 그저 심심풀이로 50 문항의 그 문제집을 읽으며 답을 표시해 나갔다. 서너 문항 빼고는 다 틀렸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전을 찾고 해설을 읽으며 틀린 문제들을 확인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 과정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겨울 주변 사람들이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함께 근무하던 친구가 대학입시 학력고사를 마치고 와서는 ‘너도 공부해 보라’고 지나가듯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6년 째 되던 그해 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던 고등학교 동기 중 둘은 직장을 그만두고 입시에 결사적으로 매달리더니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다른 한 친구는 근무하며 공부해 한의과 대학에 들어갔다. 군 입대 전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에 입학한 친구까지 그들은 늘 앞장서서 내게 손짓을 했다.

어느 추운 날 저녁 늦은 시간엔 지하철역에서 중학교 때 ‘4당5락’을 주문했던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그날 화물열차 승무를 위해 석탄 때가 묻기 시작한 두툼한 나일론 점퍼를 입고 화물열차 출발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했는데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 하신다. “너도 대학에 가야지.”

졸업 후 10여년 만에 이십대 중반이 되어 지하철 승강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너도 대학에 가야지’라니. 아직도 그때의 표정이 어제 일인 듯 선하다. 그 한 마디가 내게 얼마나 큰 충격과 용기를 주었는지.

나는 그 때 공부가 재미있었다. 대학을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무료하게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며 출근을 기다리거나 지방의 승무원숙소에서 다시 다음 열차 승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남아 있는 시간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집이든 지방의 승무원 숙소든 아니면 지나가다 정차해서 출발을 기다리던 정거장에서든 늘 대학입시용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그 해 입시에서 전국 석차 1만등을 약간 벗어나는 성적을 거두었다. 때마침 전년도부터 대학교 졸업정원제가 시행되고 입학정원이 늘어난 후 대학들은 경쟁적으로 후한 장학금 조건을 내걸었다. 4년간의 전액 장학금을 주는 성균관대학교를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4년 동안 밥은 먹여 줄테니.’

그렇게 27살에 철도공무원을 그만두고 다른 일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 땐 직장을 떠나면서 기댈 곳이 있었다. 그러나 60살에 직장을 떠날 때 내가 기댈 곳은 전혀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퇴직금과 지방에 누추한 집을 마련할 정도이니 어떻게든 노년을 살아낼 수는 있을 듯했다.

평생 부모님께도, 아이들에게도 내가 최후의 보루였으니 모험은 꿈도 꿀 수 없는 삶이었다. 대안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현재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연금을 포기하고 일시금으로 수령해 어디에든 투자를 하거나 이를 종자돈 삼아 새로운 소득을 얻을 재주도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최소한도의 기댈 곳을 마련하기 위해 연금을 선택했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 천안에 집을 마련했다. 여러 번 가본 적이 있어서 고창이나 강진 어디쯤으로 가고 싶었으나 독립해 살고 있는 아이들의 생활이 서울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너무 멀리 가기는 어려워 결국 타협을 한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집값이 많이 하락한 덕에 천안에서 올망졸망한 방이 5개나 되는 큰 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나는 장남이었으므로 어쩌다 가족 모임이라도 가지려면 가능한 큰 집을 구해야 했다. 퇴직해 몇 달 살아보니 관리와 청소, 각종 공과금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부부만 둘이 사는 집이라도 작은 집보다는 큰 집이 살기엔 편했다.

퇴직 초기엔 매일 크고 작은 일이 새로 생긴다. 이미 퇴직한 친구가 농담 삼아 ‘백수가 더 바쁘다’고 한 말의 뜻을 알 듯했다. 그러나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시간 여유가 많으니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이사한 뒤 생활이 조금 더 한가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무료함이 찾아왔다. 제주도에 가서 1년만 살고 오자고 했다. 매일 어디든 찾아가서 보고 걷자고 했다.

4년 전 제주도에 정착한 지인과 통화하며 결정한 거주지가 함덕이었다. 최근 제주도 유입 인구가 크게 감소하면서 미분양 주택이 꽤 많이 남아 있어서 예상보다 낮은 비용으로 새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집값 하락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집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은 갖추고 있었지만 식탁, 소파, 책상 등 기본적인 가구와 집기는 필요했다. 중고가구 파는 곳을 찾아가 1년 후 그냥 두고 가도 부담이 없을 정도의 금액으로 꽤 쓸 만한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며칠 지내보니 자잘하게 필요한 물품들이 끝없이 나타났지만 불편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로소 제주도 생활을 위한 마음의 준비까지 끝났다.

날이 밝아 잠에서 깨면 간단한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이곳저곳을 걸으며 낯선 풍경을 눈에 익히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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