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8-11 15: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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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대성당 앞에 성광장(Schlossplatz)이 있다. 북쪽으로는 아우구스투스 다리가 걸려 있는 엘베 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드레스덴 대성당, 남쪽으로는 드레스덴성, 그리고 동쪽으로는 드레스덴 고등지방법원과 작센주 기념물관리청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드레스덴의 유서 깊은 광장 가운데 하나로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표지로,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이 많이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성광장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드레스덴성의 일부인 하우스만스트룸(Hausmannsturm)이다. 드레스덴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1400년경 지은 건물로부터 시작됐다. 1674~1676년 사이에 요한 게오르그 2세의 위임으로 건축가 볼프 카스파르 폰 크렌겔(Wolf Caspar von Klengel)이 97m 높이의 탑을 바로크 양식으로 완성했다. 

팔각형으로 지은 탑 위에 구리로 만든 웨일즈 양식의 돔을 올리고 개방형의 등을 설치했다. 1775년 드레스덴 최초로 피뢰침을 설치함에 따라 탑은 현재 높이인 100.27m로 높아졌고, 1945년까지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 1945년 공습으로 꼭대기 부분이 무너졌고, 1991년에 이르러서야 복원이 완성됐다.

드레스덴 고등법원 건물 앞에는 언스트 리이첼(Ernst Rietschel)이 1843년에 제작한 작센왕국의 정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Friedrich August I. den Gerechten)의 기념비가 있다. 처음에는 즈빙거 궁전에 설치됐던 것을 엘베 강 북쪽에 있는 일본 정원으로 옮겼다가, 2008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봉헌식에서는 리하르트 와그너가 작곡한 송가가 연주됐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요한 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알베르트(Albert) 왕의 청동기마상이 있었다. 1906년에 막스 바움바크(Max Baumbach)가 제작해 세운 알베르트 왕의 기마상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1951년 들어선 공산정권이 철거했다.

드레스덴 대성당의 정문 앞의 도로를 덮고 있는 포장석들 가운데 ‘N’자가 새겨진 것이 있다. 1813년 8월 26일 라이프치히 전투를 앞두고 열린 출정식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서있던 장소라고 한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1778~1779년간에 벌어진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에서부터 프로이센을 지지해왔다. 1792년부터 벌어진 대 프랑스 전쟁에서도 프로이센 측에 가담하였지만 패전을 거듭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크게 패했지만 평화협상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에게 작센 왕의 칭호를 부여했고, 이어서 1807년에는 바르샤바 공국을 준 것을 계기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나폴레옹을 지지하게 됐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동맹자로 남았는데,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게 됐고 1815년 빈에서 열린 강화회담에서 프로이센에게 국토의 3/5를 잃었다. 

성광장에서 드레스덴 고등법원 건물의 왼쪽으로 돌아가면 엘베강변을 굽어볼 수 있는 뷜테라스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뷜테라스의 풍경은 앞서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드레스덴 미술학교 근처에서 구시가로 내려가는 계단 가까이에 있는 행성기념물(Planetendenkmal)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뮌즈가세(Münzgasse)로 내려가는 계단 가까이 놓인 이 기념물은 빈첸츠 바니츠커(Vinzenz Wanitschke)가 제작해 1988년에 설치한 ‘지구와 행성(Erde und Planeten)’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돌출된 결정체를 가진 청동 공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표현하며, 청동공 주변의 바닥에 그려진 원 위에는 지구를 제외한 행성을 나타내는 원형부조가 늘어서 있는데, 원의 중심에서 비껴 앉아 있는 청동 공으로 부터의 거리는 지구에서부터 행성까지 거리에 비례하도록 조정돼있다. 

흥미로운 점은 원 위에 늘어서 있는 행성에는 달을 포함해서 7개만 표시돼있다는 점이다. 자료에 따르면 1721년까지 발견된 행성과 위성을 표시한 것이다. 천왕성은 윌리엄 허셜경이 1781년에 발견하였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해왕성은 1846년에 요한 고트프리트 갈레가 처음 관측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빠져있다.

행성기념물에서 계단을 내려가 뮌즈가세(Münzgasse)를 따라 한 구간을 가면 성모교회(Frauenkirche)를 만난다. 노이마르크트(Neumarkt, 새시장)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성모교회는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석조 돔 교회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사암교회이다. 1726~1748년 사이에 드레스덴의 건축가 게오르게 배아(George Bähr)가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해 지은 루터파 개신교 교회이다. 1945년 2월 13일과 14일에 걸친 연합군의 융단폭격으로 무너져 내렸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동독정부는 전쟁과 파괴에 대한 기념물로 삼아 파괴된 채로 보존했지만, 1994년부터 재건이 시작돼 2005년에 완료됐다. 

성모교회가 있는 장소는 드레스덴 성벽 밖의 무덤들로 둘러싸인 공터였다고 한다. 11세기 초에 목조로 된 선교교회가 들어섰다가, 12세기 들어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교회를 세워 성모께 헌정했다. 14세기 무렵 교회를 새로운 고딕양식으로 다시 지었고, 1477년에는 후기 고딕양식으로 개축했다. 1722년 드레스덴 시의회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게오르게 배아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성모교회의 독특한 특징은 96m 높이의 석조돔이다. 석종(die Steinerne Glocke)이라고 할 수 있는 성모교회의 돔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돔에 필적하는 공학적 기술이 적용됐다. 처음에는 나무로 구조를 만들고 구리로 덮을 계획이었지만 배아는 석조돔을 제안했다. 

작센에서 나는 사암으로 만든 1만2000톤 무게의 석조돔을 8개의 날씬한 지주 위에 올렸는데, 초반에는 안전성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7년 전쟁 중이던 176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발사한 100개 이상의 대포알이 석조돔을 가격했지만,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 안전성이 입증된 셈이다.

성모교회의 규모를 보면, 폭은 41.96m, 길이는 50.02m 이며, 실내의 천장 높이는 36.65m에 이른다. 탑에 세운 십자가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91.23m이다. 약 40m 높이의 원주기둥 위에 올린 돔의 높이는 24m이며 아래쪽 외부 직경은 26.15m, 상단의 외부직경은 약 10m이다. 벽두께는 아래 부분은 2.3m 윗부분은 1.3m이다. 돔 위에 등탑을 올렸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방문객은 높이 67.06m에 있는 등탑까지 올라갈 수 있다. 

1989년부터 작센주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성모교회의 복원을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루트비히 호흐(Karl-Ludwig Hoch) 목사는 “드레스덴에서의 부름(Ruf aus Dresden)”을 발표하고, “드레스덴 시민들은 독일이 전쟁을 발발한 참담함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통해 유럽에 ‘평화의 집’이 가능하도록 하자”라고 제안했다. 전 세계에 걸친 시민운동의 힘으로 재건비용 1억8000만유로 가운데 약 1억1500만 유로를 전 세계에서 답지한 기부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고, 나머지 6500만 유로는 드레스덴 시, 작센 자유연방 및 연방정부가 분담했다. 

성모교회에 가보니 일부는 검은 색 돌로 돼있지만, 대부분은 하얀색을 띠고 있어 새롭게 복원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겠다. 복원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폐허가 된 성모교회를 복원한다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기념비를 잃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라진 역사적 건축물을 재건하는 것은 처음 지을 때의 문화적 배경을 되살린다는 의의는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성모교회처럼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하는 기념비로서의 의미 또한 중요하겠다는 생각이다. 생각해보니 일제가 경복궁의 일부를 허물고 총독부 건물을 지었는데, 이를 허물고 경복궁을 복원한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충분히 논의해야 했던 것 아닌가 싶다.

교회 앞에 서 있는 건물잔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잔해에 붙어 있는 명판에는 독일어로 된 설명이 붙어있어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같이 명판을 읽고 있던 외국남자에게 명판의 내용을 물었더니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의 잔해라고 한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을 지켜보던 남자 분이 우리말로 한국에서 왔냐고 묻더니 돌덩이에 얽힌 사연을 설명해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회에 폭탄을 투하했던 영국 조종사가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복원 비용에 보태 쓰도록 자식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조종사가 남긴 일기의 내용을 동판에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성모교회의 앞에 놓여있는 돌덩어리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성모교회의 돔의 일부라고 한다. 

성모교회가 파손되기 전에 종탑에 세워졌던 오래된 십자가는 요한 게오르게 쉬미트(Johann George Schmidt)가 제작한 것이었다. 재건과정에서 보니 손상이 너무 심해 새로운 십자가를 제작해야 했다. 성모교회를 폭격했던 영국 조종사의 아들인 앨런 스미스(Alan Smith)는 런던에서 대장장이로 활동하고 있는데, 50만유로가 드는 8m 높이의 십자가를 만들었다. 제작비용은 영국의 드레스덴 신탁(Dresden Trust)의 기부금으로 충당됐다. 2004년 6월 22일 6만명의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영국과 독일 간의 우호를 상징하는 “화해의 십자가(Versöhnungskreuz)”를 등탑 위에 세웠다.

노이마르크트 광장 가운데에서 성모교회를 등지고 서있는 동상을 만나게 된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동상이다. 마르틴 루터(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 교수이자, 사제이며 수도자였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권위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내부적으로 부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5617년 루터는 죄지은 자가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죄를 덮을 수 있다고 하는 가톨릭교회의 결정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비판하는 95의 논제를 제시했다. 이로서 종교개혁이 시작됐다고 본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부터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1521년 교황의 파문조치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무법자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루터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에 전한 지식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 구어체로 번역해 평신도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종교개혁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두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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