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8-29 13: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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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문을 구경하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베를린 시내구경에 나섰다. 하지만 곳곳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어서 길을 찾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지난 회에서 설명한 베를린 시청과 베를린 텔레비전 송신탑 부근까지 올라갔던 버스가 박물관 섬의 가운데쯤에 있는 베를린 대성당(Berliner Dom)에 도착했다. 

베를린 교구 및 돔교회(Oberpfarr- und Domkirche zu Berlin)가 공식명칭인 베를린 대성당은 베를린-부란덴부르크-실레지안 오베르라우시츠(Berlin-Brandenburg-schlesische Oberlausitz)의 복음주의 교구의 최고 교회이며 호엔촐레른 왕가의 종묘이기도 하다.

베를린 대성당은 15세기에 설립된 로마 가톨릭교회를 뿌리로 한다. 145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는 지금의 박물관섬 남쪽에 도시궁전을 새로 짓고, 가톨릭 예배당을 뒀다. 이 교회는 뒷날 에라스무스에게 헌정됐다. 1465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의 요청에 따라 바오로 2세 교황은 에라스무스 예배당에 성당교회(Domkirche)라는 이름을 내렸다. 

1535년 선제후가 된 요하킴 2세는 1297년에 창설한 도미니크수도원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벽돌로 고딕양식의 교회를 짓도록 했다. 1536년 완공된 교회는 성모와 성 십자가 교회로 봉헌됐다. 

1539년 요아킴 2세가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베를린 대성당은 가톨릭성당에서 개신교 성당으로 바뀌었다. 17세기 초반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 선제후의 개혁신앙고백이 있은 뒤 루터파와 캘빈파가 충돌하는 가운데, 캘빈파의 약탈을 받은 교회는 황폐되기 시작했다. 

1747년 캘빈파는 성당교회를 철거하고 요한 보우만(Johann Boumann)이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한 새로운 교회를 짓게 됐다. 1817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왕의 주도로 프로이센의 칼빈파와 루터파를 아우르는 프로이센 복음주의 교회연합을 구성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20~1822년 사이에 카를 프리드리히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작업으로 교회의 내부와 외관을 신고전 양식으로 개축했다. 19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새로운 교회를 짓고자 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와 1848~1849년 사이에 일어난 독일혁명의 영향으로 계획을 중단했다. 

보불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독일제국이 성립된 뒤에 새로운 교회의 건설이 논의됐다. 제단, 그림, 석관 등을 해체해 옮긴 다음 1893년 보우만이 설계한 성당교회를 철거했다. 초석은 1894년에 놓았지만, 건축은 1900년에 시작해 1905년에 마무리했다. 

새로운 베를린 돔은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공과대학의 건축가 율리우스 라슈도르프(Julius Raschdorff) 교수와 그의 아들 오토 라슈도르프(Otto Raschdorff)가 맡아 화려한 신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했다. 길이 114m, 너비 73m, 높이 116m 규모의 새 교회는 이전 건물보다 훨씬 크며, 바티칸 시티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맞먹는 개신교 교회로의 위상을 나타내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베를린 대성당은 큰 피해를 입었다. 모든 제단 창문은 인근 도로에 떨어진 연합군 공습으로 깨졌고, 모퉁이 탑의 돔에도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결정적인 타격은 1944년 5월 24일 베를린공습에서 랜턴이 있는 돔에 떨어진 폭탄으로 인한 화재다. 진화작업이 불가능했고, 결국 돔 전체가 성당 내부로 추락하고 말았다.

전후 대성당은 임시로 복원돼 사용되다가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 1971년 사용을 중지했다. 복원작업은 1975년에 완료됐다. 하지만 대성당의 북쪽 날개에 있던 기념교회(Denkmalskirche)는 철거됐다. 호엔촐레른 왕조의 명예의 전당이 들어있던 이 장소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중앙 돔과 4개의 꼭대기 탑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지 않고 크게 단순화했기 때문에 높이가 16m 정도 낮아졌다. 돔에 있던 모든 등을 제거하고 1983년 새로운 돔을 설치했다. 복원된 대성당은 길이 90m, 높이 98m이며 지름 33m의 돔을 올렸다.

베를린 대성당 앞에는 루스트가르텐(Lustgarten)이 펼쳐지고, 정원북쪽으로는 역사박물관(Altes Museum)이 자리한다. 이 건물은 프로이센 왕가가 수집한 미술품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카를 프리드리히 쉰켈의 설계로 1823~1830년 사이에 건설됐다. 1945년까지는 왕립 박물관(Königliches Museum)이라고 했다. 

19세기 초반, 독일 사회는 자신감이 고조되면서 엘리트 계층은 예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예술이 대중에게 공개돼야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시민들은 포괄적인 문화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훔볼트의 새로운 교육개념이 사회에 퍼졌다. 왕실에서도 수집한 예술품을 일반에 공개해 같이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 이에 박물관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쉰켈은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잡아준 초안에 따라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신전을 닮은 건물을 설계했다. 받침대 위에 세운 2층 건물의 길이는 87m, 폭은 55m이다. 

옛 박물관 건설에는 엘베강의 미텔쿠아더(Mittelquader)라는 계곡에서 나는 백악기의 사암을 비롯해 작센주의 라인하르트스도러(Reinhardtsdorfer) 마을에서 캔 사암 등, 독일 각지에서 나는 각종 사암이 사용됐다. 

전면의 회랑에는 골이 파인 이오니아식 기둥 18개를 세웠다. 사암으로 조각한 18마리의 독수리가 회랑의 기둥마다 돌림띠 위에 앉아 있다. 독수리가 앉아 있는 아래 돌림띠에는 “프리드리히 3세는 다양한 고대유물과 교양 예술을 연구하도록 이 박물관을 기부했습니다. 1828.(FRIDERICVS GVILHELMV III. STVDIO ANTIQVITATIS OMNIGENAE ET ARTIVM LIBERALIVM MVSEVM CONSTITVIT MDCCCXXVIII)”라는 내용을 로마자로 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발생한 공습과 1945년 5월 8일의 폭발사고로 손상을 받았으며, 1951~1966년 사이에 복원됐다. 박물관의 전시실들은 2개의 안뜰 주위로 모여 있다. 가운데에는 옛 박물관의 심장이라 할 높이 23m의 원형 홀이 있는데,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한 것이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 20개로 지지되는 갤러리 링이 있다. 설립 초기에는 옛 거장들의 그림, 인쇄물 등 도시의 모든 예술품을 수용하기로 했지만, 1904년 이후에는 주로 골동품을 수집하고 전시하고 있다.

역사박물관 북쪽에 있는 건물이 새 박물관(Neues Museum)이다. 박물관 섬에 세워진 두 번째 박물관이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인 왕립 박물관에서 수용할 수 없는 유물들을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다.

석고로 뜬 고대 유물을 비롯해 고대 이집트 유물 및 선사시대로부터 초기 역사시대의 유물을 비롯하여 민족지 수집품, 인쇄 및 그림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소장품들은 이집트 박물관과 파피루스 컬렉션, 선사시대 초기 역사박물관, 유물 컬렉션 등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소장 유물가운데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의 흉상이 유명하다.

카를 프리드리히 쉰켈의 제자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스튈러(Friedrich August Stüler)의 설계로 1843~1855년 사이에 지었다. 새 박물관은 그 소장품이 가진 의미도 중요하지만 건물 자체가 가지는 의미 역시 중요하다. 새 박물관은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새롭게 개발된 건축기술과 새로운 건축소재인 철 구조물을 사용해 건축기술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슈프레 강의 연약한 지반을 다지기 위하여 말뚝을 박는 작업에 증기기관을 처음 사용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 전체 건물의 아래에는 6.9~18.2m 길이의 나무 2344개를 박아 넣었는데, 파일을 박는데 5마력(3.7kW)을 내는 증기기관이 사용됐다.

개관당시 1층에는 이집트 유물과 민족지적 유물, 고대와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및 고전 예술 작품을 비롯해 그리스와 로마조각품의 석고 수집품 등이 전시됐다. 2층에는 식각 및 조각 모음과 미술품, 건축 모형, 가구, 점토, 도자기 및 유리 용기 및 교회 장식품 등을 전시했다. 

이들 가운데 민족지적 유물과 예술실의 전시품 가운데 일부는 1886년에 개관한 민족학 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예술실에 남아있던 7000점의 작품들은 1875년에 설립된 쿤스트게베르베 박물관(Kunstgewerbemuseum)으로 옮겨졌다. 1층 전시실에는 골동품 박물관의 꽃병 수집품과 이집트 박물관의 파피루스 수집품이 전시됐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박물관의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43년 11월 23일의 공습으로 중앙 계단과 프레스코 화가 인류 역사의 다른 위대한 보물과 함께 불태워졌다. 그리고 1945년 2월 연합군 폭격으로 새 박물관의 북서쪽 날개와 역사박물관과 연결되는 부분이 파괴됐고, 남서쪽 날개와 남동쪽 전면을 손상시켰다.

역사박물관이나 새 박물관에는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걸어서 밖의 모습이라도 찬찬히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 박물관 북쪽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은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것으로 끝이었다. 사실 페르가몬 박물관은 꼭 들어가 보고 싶었다. 독일의 대표적 환상문학 작가 랄프 이자우의 소설 ‘잊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성서에 기록된 전설의 도시 바빌로니아를 찾아 나선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18년의 발굴 끝에 발견한 마루두크 신전의 기단과 이슈타르문 등이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돼있다고 한다. 이자우는 페르가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바빌로니아의 유적을 소재로 삼아, 사람들이 그 존재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망각해버린 것들이 미래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도 박물관 섬에 있다. 알프레드 메셀(Alfred Messel)과 루드비히 호프만(Ludwig Hoffmann)의 설계로 1910~1930년 사이에 지어졌다. 페르가몬 박물관에는 페르가몬 제단, 바빌론의 이쉬타르 문 (das Ischtar-Tor aus Babylon), 밀레투스 시장 문 (das Markttor von Milet) 등 바빌론의 유물이 복원돼있다.

이 외에도 아나톨리아에서 발굴한 유물과 요르단의 카스르 알 음샤타(Qasr Al-Mshatta)에서 발굴한 우마이아 왕조의 여름궁전의 전면 등도 있다. 페르가몬 박물관은 고대 컬렉션, 중동 박물관 및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세분화돼있다.

1904년 박물관 섬에 북쪽 끝에 있는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Kaiser-Friedrich-Museum, 지금은 보데박물관, Bodemuseum으로 부른다)이 개관했을 때, 독일이 주관해 발굴한 많은 예술품과 고고학적 보물을 수용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한 박물관장 빌헬름 폰 보데(Wilhelm von Bode)는 고대 건축, 독일의 고대 유물 예술, 중동 및 이슬람 예술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박물관을 건설할 계획을 수립한 것이 페르가몬박물관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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