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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1년…서귀포자연휴양림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_열한 번째

기자입력 : 2019.09.28 00:00:00 | 수정 : 2019.09.28 09:59:38

9월 21일과 22일 제17호 태풍 타파가 제주를 지났다.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들의 뿌리를 뽑고 제주를 물로 덮을 기세로 이틀 밤을 몰아치던 비바람이 지나고 난 아침에 북쪽 수평선 위로 뭍 가까이 있는 섬들이 보였다.


9월에만 두 번째 태풍을 겪었다. 이제야 제주에 부는 바람의 위력이 보인다. 태풍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아침 뉴스를 듣고 나서 바람과 함께 퍼붓기 시작한 비는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중창을 굳게 닫았는데도 밤새 바람 지나가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이 되어 내다보니 멀리 함덕 해변의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아름드리 곰솔이 흔들리고, 작은 나무들은 곧 꺾어질 듯 이리 휘고 저리 휘었다. 어둠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는 잦아들었다. 그래도 바람은 여전히 드셌다.

아직 숲에 들기에는 비바람이 걱정되어 집에 머물다 해질녘에 함덕 해변을 걸었다. 아직도 바닷물에 들어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호텔은 물론 다양한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인지 휴가철이 지났음에도 함덕 해변엔 여전히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태풍이 아니더라도 비는 늘 바람과 함께 내렸다. 아니 날렸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엔 집에서 소리를 듣고 흔들리는 나무와 날아가는 빗줄기를 보며 귀와 눈으로 그 힘을 느낀다. 우산과 우비는 물론이고 차를 타고 나가도 어차피 이 비바람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니, 이런 날엔 가만히 앉아 책 읽고, 비바람 그치면 가볼 곳을 찾아보고, 먼저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함덕 해변 근처의 헌책방에서 사온 책은 제법 읽을 만하고 아직 거기에 많이 있으니 비바람이 몇 날이고 그치지 않은들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며칠 일정의 여행이나 한 달 살기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여유를 1년 살기를 통해 누린다.

서귀포자연휴양림 (서귀포시 대포동 산 1-1)엔 오른쪽의 숲길산책로(최장 6Km), 중앙의 숲속 자동차길(3.8Km) 그리고 왼쪽의 휠체어와 유모차까지 다닐 수 있는 어울림숲길(2.2 Km)이 조성되어 있다.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 마지막 면접 후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갔디?’하고 물어왔을 때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예.’라 답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20대 초반부터 뼈가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온갖 험한 일을 다 헤치며 살아온 내 부모님의 건강에 문제라도 생기면 이곳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곳은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숲길산책로는 자동차 숲길을 가로지르기도 하지만 좌측 또는 우측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2.8 킬로미터 지점에서 왕복 1.2 킬로미터의 법정악전망대 길과 만난다. 법정악전망대에 서면 제주도의 남쪽 바다와 한라산 자락의 웅장한 숲과 봉우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11월 중순 첫 출근하던 날 나름 서둘러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사무실에 들어서기도 전 알아본 여직원들이 인사를 한다. 내가 일하게 될 책상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내 앞에 커피 한 잔이 놓였다. 직장에서 누군가 준비해 주는 커피는 이날 처음 받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여기엔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시고 싶을 때 내가 편안히 준비해서 마시겠다고 말을 했다. 점심 식사 후 인스턴트 커피를 찾아 마실 준비를 하는데 이번엔 여직원들이 당혹해 한다. 보름쯤 지나서야 서로 익숙해질 수 있었다.

숲길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나무와 풀을 살피다 보면 서귀포자연휴양림 숲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소나무는 대부분 그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 고목이다. 반면 활엽수들은 상대적으로 젊다. 오랜 세월 이곳의 주인이었던 소나무들이 하나 둘 스러지며 그 자리를 활엽수에 내주고 있는 듯하다.


12월 1일 비서실장 겸 홍보실장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한 달에 한 번 발행하는 타블로이드판 4 페이지의 병원소식지와 일 년에 4번 발행하는 학술지 발행이 당장 시작해야 할 업무였다. 그 외엔 시간 나는 대로 1970년대 중반부터 발행했던 옛날 소식지와 1960년대부터 모아둔 백병원 관련 신문기사를 꺼내서 읽으며 백병원을 알아가고 있었다.

숲속에서 물이 마른 개천을 만났다. 중산간지대여서 큰 비가 내릴 때마다 순식간에 많은 물이 쏟아져 흐르면서 돌들이 서로 모난 곳을 비비며 마치 바닷가의 몽돌처럼 둥글둥글해졌다.


연말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이사장실에 들어가 간단한 보고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잠시 앉아보라 한다.
“오 실장, 왼손 한 번 내밀어 봐요.”
이사장이 내 손목을 만져보고는 말을 잇는다.
“그렇군. 이 시계 차고 다녀요.”
“예. 감사합니다.”
고 백낙조 이사장은 마음 씀씀이가 깊은 분이었다. 아마도 내가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는지 여러 번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한 시계를 준비하고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인지 손목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연말 선물이라며 내게 주었다.
“미스터 맥파슨이라고 알아요?”
“예. 대학교 다닐 때 4년 동안 그 교수님께 영어를 배웠습니다.”
“우리 집에 사는 것도 알겠네?”
그때서야 내가 백병원 비서실에 오게 된 계기를 어렴풋 짐작했다. 우리네 삶은 늘 준비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을 했다.

비자나무는 제주도 숲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나무다. 잘 알려진 비자림엔 최고 수령 800년의 거목들이 2,900여 그루나 모여 있고 인근 길엔 비자나무 가로수까지 있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의 비자나무는 대부분 매우 어리다. 앞으로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지금의 젊은 활엽수들은 이미 고목이 된 소나무에 이어 이 숲의 주인이 될 것이며 다시 그 자리는 살아남은 이 어린 비자나무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추석 후에 제주로 돌아오니 주말 태풍 소식이 들여온다. 겨우 열흘이었는데 그간 다녔던 제주의 숲이 보고 싶었다. 더구나 이 태풍이 지난 뒤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어느 숲이든 일단 가 보기로 했다.

주목은 비자나무와 구별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잎을 슬쩍 만져보니 주목은 부드러운 반면 비자나무는 잎 끝에 가시가 느껴진다. 주목은 고산지대에 주로 서식하는데 어렸을 때는 자라는 속도가 매우 느려 다른 나무들 그늘 속에서 크지만 10년 정도 후에는 자라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점차 산의 주인이 된다. 어린 주목과 비자나무가 이 숲의 주인으로 자라나면 서귀포자연휴양림은 비자림의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침에 채비를 하면서 이미 가보았던 휴양림 숲길을 생각하다가 아직 가보지 않은 서귀포자연휴양림으로 일정을 잡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서쪽 산간지대에 있어 함덕에서는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린다. 아직은 제주의 도로에 익숙하지 않아 가까운 곳의 숲과 오름만 다니다 보니 1시간의 운전이 부담스럽기는 했다.

고사리삼은 제주에 와서 생전 처음 본 식물이다. 고사리로 알고 무심코 지나치다가 윤기 나는 잎과 그 잎 위로 자라 오른 홀씨주머니를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다른 식물임을 알았다. 뿌리가 달린 고사리삼 전체를 음지궐 (陰地蕨)이라는 약재로 쓴다고 한다. 이미 좋은 약이 많이 개발되어 있으므로 굳이 캐어 어렵게 약효를 얻으려 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 이 숲을 더욱 풍요롭게 했으면 좋겠다.


제주도 북쪽에서 한라산 동쪽의 등줄기를 넘었다. 출발할 때는 구름이 낮았는데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중산간지대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가했다. 서귀포 앞바다는 맑게 보이지 않았지만 햇빛은 좋았다.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고 쌀쌀함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숲속을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듯했다.

나나벌이난초 역시 책에서만 보았던 야생난이다. 5월~7월에 꽃이 피는 난초인데 두 달이 훌쩍 지났는데도 꽃대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내년 꽃철에 다시 와서 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제주도 동쪽 중산간지대의 절물자연휴양림, 교래자연휴양림, 붉은오름자연휴양림과는 숲의 성격이 다르다. 절물자연휴양림은 인공조림된 삼나무 숲이 인상적이고 교래자연휴양림은 덤불과 활엽수가 엉클어진 야생의 곶자왈 특징이 강하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은 방문자 편의공간이 매우 넓을 뿐 아니라 우아하게 자란 곰솔 숲과 인공조림 삼나무 숲 그리고 활엽수 숲을 다 갖추고 있어 잘 계획된 공원의 느낌이 강하다.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빛을 받은 덜꿩나무 열매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봄에 피는 꽃도 예쁜 이 나무는 관상용으로도 많이 심는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한라산 남서쪽 해발 800 미터 지대에 있다. 숲엔 활엽수가 울창하며 덩굴은 상대적으로 적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간혹 보이고 어린 주목과 비자나무가 곳곳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숲의 경사면이 비교적 가파르다보니 주차장과 기타 편의시설을 위한 면적은 다른 자연휴양림들과 비교해 넓지는 않으나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아이를 낳은 엄마의 튼 뱃살을 연상시키는 무늬의 이 나무이름은 서어나무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다양한 숲길을 마련해두고 있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휴양림 안쪽으로 차를 운전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용료를 지불하고 서귀포 방향에서 제주시 방향으로 일방통행인 이 도로를 천천히 통과하며 숲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통행 차량이 많지 않으니 숲속 산책로가 불편하다면 이 길로 걸어도 불편함 없다. 휠체어나 유모차도 다닐 수 있는 어울림숲길은 약 2.2 킬로미터 정도의 건강산책로와 생태관찰로로 구성되어 있다.

제피 (초피)나무는 산초나무와 구별이 매우 어렵다. 가시가 마주보고 있는 제피나무는 잎 가장자리의 톱니 사이에 있는 작은 점에서 특유의 매운 향을 낸다. 모기가 싫어하는 향이라고 한다.


숲속 산책로는 전 구간 야자매트가 깔려 있고 때로 자동차 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나란히 이어지기도 하니 숲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하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도중에 법정악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왕복 1.2킬로미터 거리인데 이곳 전망대에서는 앞쪽으로는 제주도 남쪽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눈을 돌려 숲을 보면 한라산 남쪽 경사면의 웅장한 숲이 보이고 그 끝에 백록담을 품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다. 법정악전망대 왕복까지 포함해 최대한 길게 선택해도 산책로는 6 킬로미터 정도이며 경사가 급격하게 가파를 곳도 없어서 크게 힘든 구간도 없다. 도로 중간에 차 세우고 큰 소리의 음악을 즐기는 사람만 만나지 않는다면 몇 시간은 세상일 다 잊고 이 호젓한 숲길을 만끽할 수 있다.

숲길을 걷다가 법정악전망대 길안내 표지판을 보고 가보니 한라산 봉우리와 흘러내리는 숲의 전망이 일품이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의 숲길은 비록 흙이 많은 길이고 산책길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야자매트가 깔려 있지만 도시의 매끈한 길에 길들여진 도시사람에게는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무엇보다 울퉁불퉁한 지면 때문에 서너 시간 걷고 나면 발과 발목에 많은 피로를 느낀다. 도시에서처럼 빨리 걸을 필요는 없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야 나무와 풀이 보이고 숲이 보인다. 그래야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소리가 들린다. 

서귀포자연휴양림 숲속에서 다섯 시간을 보내고 돌아 나와 잠깐 내려오면 길이 급히 굽어지는 곳에 거린사슴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의 제주 남쪽바다 전망도 서귀포자연휴양림의 법정악전망대만큼 일품이다. 억새꽃이 피고 있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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