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초점] ‘프로듀스X101’이 보여준 K팝의 암면

‘프로듀스X101’이 보여준 K팝의 암면

기사승인 2019-10-16 13: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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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만난 여성 아이돌 가수는 음반 활동을 할 땐 하루 종일 에너지바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체중 관리를 위해서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인데, 새 음반 콘셉트를 위해 살을 더 뺐다고도 했다. 활동이 끝나면 어머니가 족발을 사주기로 약속했다면서 그는 웃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인 걸그룹 멤버도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방송서 민소매를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충격받았다”며 다이어트 일화를 전했다. 하루에 탄산수 두 병만 마실 정도로 혹독하게 살을 뺐다는 것이다.

아이돌 스타들의 다이어트 일화를 적으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가수는 물론 연습생들도 기획사가 ‘지시한’ 몸무게에 도달하기 위해 식욕을 억누른다. 눌러야 하는 욕구가 그것뿐이랴. 이들은 계획된 스케줄대로 기대되는 완성도를 채우기 위해 잠도 마다해야 한다. 자신의 몸이지만, 그에 대한 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만인의 ‘우상’(아이돌)이 되는 과정은 인권을 포기하는 일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열정’과 ‘노력’의 상징으로 치환된다.

Mnet ‘프로듀스X101’과 ‘아이돌학교’를 둘러싼 잡음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MBC ‘PD수첩’이 15일 두 프로그램의 조작 정황을 보도하면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된 투표 조작 의혹 외에 연습생들의 인격과 인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와 충격을 더한다. ‘아이돌학교’의 출연자들은 생리불순이나 하혈을 겪었다고 입을 모은다. 충분한 식사와 수면이 보장되지 않는 데다 스트레스가 극심해서다. 휴대폰은 압수당했고, 합숙 시설이 열악해 피부병이 걸리는 출연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창문을 깨고 탈출하려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쿡초점] ‘프로듀스X101’이 보여준 K팝의 암면‘프로듀스X101’도 마찬가지다. 연습생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화장실도 제때 가지 못했다고 한다. 부상을 입은 채로 연습에 임한 이들도 많았다. 자신들을 신경질적으로 깨우는 제작진에게 항의한 연습생이 다음 편부터 통편집되다시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출연자들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강요된 극복은, 카메라를 거치면서 ‘꿈을 향한 열정’으로 포장된다. 방송사는 연습생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 자신들의 혐의를 교묘히 감춘다.

비단 ‘아이돌학교’과 ‘프로듀스X101’만의 문제가 아니다. 태초에 Mnet ‘슈퍼스타K’가 있었다. 출연자들은 늘 빠듯한 일정으로 인한 피로감을 토로했다. 식단조절과 운동을 강요당했고, ‘소울닥터’를 통해 미용 시술도 받아야 했다. 제작진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통제했다. 꿈을 위한 여정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일들이다.

‘PD수첩’을 통해 드러난 Mnet 오디션 프로그램의 여러 의혹들은 K팝의 어두운 이면을 집약해 보여준다. 연습생이나 가수들은 기본적인 욕구조차 제한받는 상황을 감수한다. 거대 기업은 자사 플랫폼을 이용해 방송, 음반 제작, 매니지먼트, 공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수익을 가져간다. 기획사들은 ‘을’이고 연습생은 ‘병’이나 ‘정’도 못 된다. 기획사가 대기업과 결탁했다는 의혹도 나온다. 불공정한 시스템에서 연습생의 목소리는 지워진다. 

‘프로듀스101’ 시리즈의 조작 의혹을 수사 중인 경찰이 관련자들의 금품거래 의혹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현재 기획사 5곳을 수사 중이며, 그간 기획사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아이돌학교’ 관련자들도 앞서 압수수색으로 얻은 자료 분석이 끝나면 차례로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다. 잘못이 있다면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 이번 사건을 개인 혹은 일부 집단의 일탈 혹은 과실로 볼 것이 아니라, K팝 시장 전체에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걷어내야 한다. 빤한 말이지만 가요계를 구성하는 모두의 자성과 쇄신이 필요한 때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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