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비껴간 팔레스타인 깨어난 여성인권 포스

[김양균의 현장보고] 팔레스타인 르포… 분리된 삶, 부서진 꿈-2부 거부된 권리③

기사승인 2019-11-08 0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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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 세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히잡 거부로 대표되는 여성인권 운동은 강력한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 정서에 반하는 것으로 치부돼 혹독한 시련을 맞고 있다. 그렇지만 이슬람 여성의 권익증진이라는 새싹은 남성 중심의 이슬람 문화에 작게나마 균열을 만들고 있다. 이는 전 세계를 휩쓴 미투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우린 미투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팔레스타인문화교류연합 소속 라마 활동가의 말. 지난 8월19일 팔레스타인 라말라 내 여성 지원 활동가를 만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동석한 팔레스타인여성위원회의 마날 활동가도 같은 취지의 말을 들려주었다. 이슬람 문화의 특성을 감안해 관련 질문을 자제했던 기자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점령 70여 년 동안 풀뿌리 자립운동이 자리매김하면서 여성인권 운동도 싹을 피웠을 터.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 중 일부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것들이었다. 비록 미투 운동이 비껴간 팔레스타인이었지만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활동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이빙앤크레딧도 그러한 활동의 일환이다.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은행

지난 1983년 방글라데시에 그라민 은행이 문을 열었다. 은행의 주 고객은 극빈층. 설립자는 무함마드 유누스로, 은행가이자 사회기업가였던 그는 빈곤퇴치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적 약자에게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줬다. 자립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유누스 회장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후 ‘마이크로크레딧’, 즉 무담보 소액 대출의 모델은 전 세계 개발도상국으로 확산됐다. 

오늘날 이 모델이 얼마나 빈곤퇴치에 기여했는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지만, 적어도 라말라 여성들에게는 톡톡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마이크로크레딧을 표방한 ‘세이빙앤크레딧(Saving and Credit)’은 현지 여성들의 금융활동과 자립을 돕는 수단이 됐다. 이사로서 관련 활동을 겸하고 있던 마날 활동가의 말을 들어보자. “팔레스타인에서 여성의 위치는 취약합니다. 세이빙앤크레딧은 작은 은행의 역할을 합니다. 여성, 아이들, 청년층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있죠.”

참여자들은 매달 돈을 모아 일정 투자금을 채우면, 대출 요청을 할 수 있다. 이후 상환기간 동안 소액의 이자를 포함한 원금을 조금씩 갚아나가면 된다. 모인 이자는 참여자들에게 똑같이 배분된다. 대출의 이유야 교육, 결혼, 치료 등 우리나라 서민들과 다를 게 없다. 현재까지 조합원은 600명. 이들이 십시일반 모은 투자금은 10만 달러(한화 1억 원) 가량이다. 은행이 없는 라말라에서 빈곤층에게 세이빙앤크레딧은 일종의 보험 역할도 한다. 

세이빙앤크레딧과 같은 자발적 금융 활동은 이스라엘 점령과 관련이 깊다. 인티파다(민중봉기) 이후 상당수 팔레스타인 남성들이 이스라엘 당국에 체포되었고, 졸지에 가계 경제를 꾸려야만 했던 여성들이 필요에 의해 조합을 만든 것이 세이빙앤크레딧의 시초였다. 

◇ 여전히 불평등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여성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여성들이 돈과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문화가 팽배하다. 가정 및 젠더 폭력도 적지 않다. 가부장적 문화가 강한 일부 지역에서는 명예살인이 보고되기도 한다. 현지 여성의 처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가 성폭력 피해에 대한 해결방식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성폭력은 중범죄이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은 즉각 가해자를 체포한다. 그러나 가해자-피해자간 합의 시 공권력의 강제력은 사라지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라마 활동가의 설명이다. 

“성폭력 처벌법은 있지만, 법원은 대개 가해자-피해자 가족 간에 해결할 것을 권고합니다. 각 가족의 남자끼리 만나 처벌 수위를 정하는 겁니다. 성폭력 피해를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것 자체를 숨기려 하죠.” 

사정이 이렇다보니 풀뿌리 여성지원단체는 피해여성을 위한 긴급구호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피해여성지원센터를 떠올리면 된다. 우리나라가 경제성장 이후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법이나 쉼터를 마련한 것을 감안하면, 비록 민간 차원이라해도 팔레스타인의 여성 지원 활동은 퍽 선진적인 편이다.  

“샤리아(이슬람 율법·규범체계)에 따라, 남성은 여성보다 곱절 이상의 상속을 받습니다. 여성 상속은 절반에 불과하죠. 항상 남성이 우선되고, 여성은 뒷전이죠. 우린 이런 불평등을 당사자인 여성들이 제대로 인식하도록 열심히 알리고 있어요.”(마날 활동가)

이스라엘 점령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도 자생적인 여성권익신장 및 자립운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 이슬람 문화권보다도 남다른 저항의 DNA를 갖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성평등 요구는 이제 막 싹을 틔웠다. 변화의 바람이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여성의 전문직 진출 증가와 더불어 현지 여성들의 삶에 느리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라말라(팔레스타인)=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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