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11-1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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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연안 여행에 나선지 사흘째다. 전날 밤 일찍 잠든 탓도 있겠지만, 일찍 숙소를 나설 예정이라서 긴장한 때문인지 2시 반에 눈을 떴다. 신문기사를 챙겨 읽고, 전날 구경한 것들을 정리하다보니 기상알림전화(morning call이라고 알려진 wake up call을 우리말로 옮기면 이런 의미일 듯하다)가 온다. 

이날은 7시에 숙소를 나서기로 했다. 칼리닌그라드에서 리투아니아로 넘어가야 하는데, 러시아 출국심사는 입국심사보다 더 까다롭고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출입국사무소에 일찍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린 암막을 걷었더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날 칼리닌그라드의 일출시간은 5시 20분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아직 올라오지 않은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씨스티 푸르드(Чистый пруд, 깨끗한 연못)에 담긴 그 모습이 황홀한 풍경을 만들었다. 동녘에 해가 올라올 때까지 창가를 지켰다. 

어디서 지켜봐도 해가 뜨는 광경은 장엄한 무엇이 있다. 해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 뒤에는 일정 때문에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겼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행 모두 바지런해서 예정된 7시에 숙소를 출발했다. 아침 기온이 19도라는데 삽상한 바람에 더해져 우리나라의 초가을 날씨가 연상됐다. 

버스가 출발하자 가이드는 일정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칼리닌그라드에서 유명한 ‘춤추는 숲’을 소개한다. 칼리닌그라드의 북쪽에 있는 삼비아(Sambia) 반도와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Klaipėda)를 연결하는 쿠로니안 스핏(Curonian Spit)에 있는 소나무 숲이다. 

쿠로니안 스핏은 칼리닌그라드와 리투아니아에 걸쳐 있는 면적 1619㎢ 넓이의 쿠로니안 석호를 발트 해로부터 감싸는 98㎞ 길이의 얇고 굽어있는 모래언덕이다. 기원전 3000년 무렵 빙하에 실려 온 빙퇴석이 쌓이고, 바람과 해류가 실어온 모래가 더해져서 쿠로니안 스핏이 만들어졌다.

발트신화에 따르면 네링가(Neringa)라는 여자 거인이 해변에서 놀던 흔적이 쿠로니안 스핏이라고 전한다. 네리아(neria), 네르게(nerge), 네링기아(neringia)는 수영선수가 물 위에서 오르내리는 듯한 모양의 땅을 의미한다. 9세기 초부터 1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카우프(Kaup)를 중심으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13세기 이곳을 점령한 튜턴기사단은 메멜(Memel), 노이하우젠(Neuhausen), 로시텐(Rossitten) 등에 성을 쌓았다. 

19세기 말부터는 수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들어 정착촌을 이루기도 했다. 1929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이 니다(Nida)를 찾아 여름별장을 짓고 머물렀다. 마을 사람들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Onkel Toms Hütte)’이라고 불렀다. 토마스 만은 대하소설 ‘요셉과 그의 형제들(Joseph und seine Brüder)’의 일부를 이곳에서 쓴 것으로 알려졌다.

춤추는 숲(Танцующий лес)은 칼리닌그라드 주의 쿠로니안 스핏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특이하게 꼬인 모습으로 유명하다. 반듯하게 크는 소나무들과 달리 춤추는 숲에 있는 소나무들은 고리 혹은 하트 모양을 하거나 지면으로 구부러진 나선형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꼬여있다. 

1960년대에 조성된 소나무들이 꼬인 모양을 하게 된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소나무싹 나방인 리아키아니아 부오리아나( Rhyacionia buoliana)의 유충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주민들은 모래의 움직임 때문이라고 믿는다. 춤추는 숲에 있는 소나무들은 영구동토 지역에서 보는 기울어지듯 크는 ‘술 취한 소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칼리닌그라드를 빠져나가면서 본 월드컵 경기장 부근에는 2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있다고 한다.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우리가 향하는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부근에도 역시 원자력발전소가 있는데, 빌뉴스의 원자력발전소는 사고가 났던 체르노빌의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와 같은 형이라고 해서 문제가 됐다. 

빌뉴스의 60만 주민은 물론 리투아니아에서 가까운 유럽 국가들이 안전을 위협받는다 해서 발전을 중단하라 요구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정부는 원전비중이 큰 전력 생산구조로 인해 중단이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스웨덴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전력을 공급하기로 하고나서야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

칼리닌그라드에서 리투아니아로 가는 국경마을 체르니솁스코예(Чернышевское)로 향하는 A229번 국도는 좁은 왕복 2차선 도로였다. 아스팔트 포장이 잘돼 있지만, 가끔은 작은 돌을 깔아놓은 구간도 있다. 이런 구간에서는 속도를 줄이기도 하지만 승차감이 떨어진다. 특히 마을 안 도로는 대부분 이런 포장형태다. 나이든 노인이 천천히 걸어 길을 건널라치면 멈춰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통행량은 만만치 않다.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사이의 차량 통행이 만만치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평원을 달리는 터라 창밖 풍경은 큰 변화가 없다. 숲으로 덮인 야트막한 언덕과 평원이 교대로 등장한다. 평원은 주로 밭인데 농작물을 수확한 빈터이거나 옥수수 밭이다. 숙소를 출발하고 1시간쯤 지나자 허허벌판의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선다. 버스기사가 가이드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더니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잡은 듯하다. 

조금 전에 지나친 구셰프(Гусев)의 시내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구간을 우회하느라 골목길을 빙빙 돌다가 길을 헷갈렸나보다. 내비게이션(차량자동 항법장치, 너무 길어서 ‘김기사’라고 하면 딱 좋을 듯하다)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면 문제가 될 게 없을 것 같은데, 구식 항법장치에 목적지를 잘못 입력한 것 같단다. 

다시 제대로 입력을 했으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제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각선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크라세놀레셰(Краснолесье)에서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 거의 다 가서야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러시아-폴란드 국경을 따라서 리투아니아 국경에 이르러서야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체르니솁스코예(Чернышевское)로 향했다. 

덕분에 시골구경도 하고 자작나무 숲도 구경하며 이야기꺼리도 생겼다고 위로했지만, 사실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조금은 화가 났다. 으슥한 숲길을 달리다 보니 보헤미아의 숲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카를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가 떠올랐다. 

아우구스트 아펠(August Apel)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슐쩨[Friedrich August Schulze, 프리드리이 라운(Friedrich Laun)의 가명]이 전해오는 무서운 이야기를 모아 엮은 유령의 책(Gespensterbuch)에 실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오페라인데 원작과는 달리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야기는 보헤미아의 영주인 오토카는 자신의 숲을 맡길, 숲지기를 뽑는 사냥대회를 열기로 하며 시작한다. 사냥대회의 우승자는 숲지기가 되는 것은 물론 영주의 아름다운 딸 아가타와 결혼도 하는 영광이 주어지기로 한다. 이에 동네에서 소문난 사냥꾼 막스도 대회에 출전을 했지만, 시범경기에서 이름 없는 농부 킬리안의 신출귀몰한 솜씨에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사냥친구 카스파의 꼬임에 넘어가 악마 자미엘과 흥정을 벌여 마법의 탄환 7발을 손에 넣었다. 자미엘이 숨겨놓은 꼼수는 마지막 7번째 탄환이 아가타를 맞춰 숨지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탄환은 아가타의 목에 걸린 신부화환에 맞고 사라지며 막스와 아가타가 결혼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본론으로 돌아와, 칼리닌그라드에서 동쪽으로 쭉 뻗은 A229번 국도를 따라왔으면 2시간도 안 걸린다는 체르니솁스코에에 도착한 것은 10시 20분이었다. 국경을 코앞에 두고 루코일(Лукойл)이라는 주유소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산유국이라서 기름 값이 리투아니아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에 국경 바로 앞에서 기름을 넣는다고 했다. 

게다가 3시간 반이나 운전해왔기 때문에 유럽의 장거리 운행버스(LDC, Long Distance Coach)관련 규정에 따라 45분을 쉬어야한다는 기사를 달래서 바로 출발했다. 벨라루스에서 왔다는 기사도 참 대단하다. 자동차 항법장치에 목적지를 잘못 찍어 늦어진 것에 대해 사과할 법도 한데, 사과는 한마디 없이 권리만 주장한다니 말이다. 게다가 러시아어만 가능해서 가이드나 인솔자와 의사가 제대로 통하지도 않았다.

결국 10시 40분에야 국경에 도착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8시 50분에 도착할 수 있는데 돌아오는 바람에 2시간 가까이 늦어진 셈이다. 출국신고과정도 3단계로 진행되는데, 1단계 여권확인은 건성인 출입국관리직원 덕분에 금세 끝나고 2단계 출국신고로 넘어갔다. 앞에 온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의 출국신고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가 출국신고를 했다.

그런데 러시아 출입국관리는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다. ‘영어할 줄 아느냐?’고 묻더니 ‘어디로 가느냐?’, ‘한국으로 돌아가느냐?’는 등 말을 시켰다. 영어를 못하는 척했지만 질문을 이어가는 바람에 시간을 잡아먹은 탓에 일행 모두 출국신고가 끝난 것은 11시 15분께였다. 게다가 국경마을에서 기름을 넣으면서 쉬지 못했다는 버스기사의 고집대로 국경에 있는 면세점 등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12시에 출발했다. 3단계는 간단하게 인원 파악하는 것으로 끝났다. 

결국 12시 15분에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리투아니아 입국신고도 만만치 않았는데, 앞선 버스에 탄 40명의 러시아 사람들의 리투아니아 입국수속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반러시아 정책을 펴는 리투아니아에서는 입국하는 러시아인에 대해 개별적으로 비자심사를 한다. 버스에는 무려 40명이 타고 있어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러시아 국경에서 일찍 떠났더라도 리투아니아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버스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면세점이라도 자유롭게 구경하는 편이 더 나았다는 이야기였다. 

러시아 버스가 떠나고 우리 차례가 됐을 때는 리투아니아 출입국관리가 버스에 올라 여권과 얼굴을 대조한 뒤에 여권을 모아 사무실로 가서 입국도장을 찍어주는 것으로 끝났다. 1시 45분에 여권을 돌려받았는데, 필자의 여권에만 입국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돌려받은 여권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뒤에 출국할 때 불편할 뻔했다. 한편 리투아니아에 들어서면 시계를 1시간 더해야 한다. 두 나라 사이에 적용하는 표준시가 다르기 때문이다.

국경에서 출입국 수속하는데 2시간이 걸렸고, 시차 1시간을 더해져 국경을 통과하니 3시간 40분이었다. 남은 일정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여행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라고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로 위로를 삼았다. 국경마을 키바르타이(Kybartai)로 나오면서 칼리닌그라드-리투아니아 국경을 다시 넘을 일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리투아니아에 입국해서 첫 번째 일정 트라카이(Trakai)까지는 다시 2시간을 가야 했다. 국경에서 트라카이로 가는 길은 왕복 2차선인데 버스운전사는 앞에 저속 운행하는 차가 있으면 추월도 서슴지 않았다. 오전 중에 사라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트라카이로 향하던 중에 긴급재난 문자가 왔다. 

해외로밍을 했더니 리투아니아 통신사에서 보낸 문자도 들어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어로 돼있어 해독이 안 됐다. 가이드의 도움으로 구굴번역기를 다운받아 해석해 봤더니 빌뉴스에 가까운 도로에서 군사훈련이 예정돼 있어 통행에 불편을 겪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두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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