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아홉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1-0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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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우스 대왕 교회에서 나와 네무나스 강에 걸려있는 비타우스 대교(Vytauto Didžiojo tiltas)를 건넜다. 지금은 네무나스 강에 여러 개의 다리가 건설돼있지만 카우나스와 네무나스 강 건너편 지역인 알렉사타(Aleksotą)를 연결하는 다리는 없었다. 1812년에서야 목재 기둥으로 된 다리가 처음 건설됐다. 그 전까지는 여름엔 길이 254m, 폭 2.3m의 임시 뗏목이 비타우타스 교회 근처로 다녔고, 봄·가을 홍수기간에는 페리로 대체됐다. 물론 겨울에는 얼음 위로 왕래해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1915년 비타우타스 교회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목조다리를 세우고 알렉사타 다리라고 했다. 1927년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기 위한 국제공모전이 열렸고, 덴마크 코펜하겐의 크누드 호가르드(Knud Højgaard)의 설계를 채택해 공사가 시작됐다. 다리 건설은 1930년에 완공됐다. 다리를 개통할 때는 조나스 벨레이시스 시장의 제안에 따라 비타우타스 대왕의 이름을 따서 비타우타스 대교라고 부르게 됐다. 이전에 있던 목조다리는 철거됐다.

1940년 비타우타스 대교는 카우나스 시장 안타나스 가르마우스(Antanas Garmaus)의 명령으로 다시 알렉사타 다리로 개명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41년 6월 24일 러시아 장군 이반 쉬레민(Ivan Shlemin)의 명령에 따라 다리를 폭파했고, 카우나스에 진주해온 독일군은 임시 다리를 세웠다. 1948년 목조다리가 홍수에 무너졌을 때 레닌그라드 디자인연구소의 건축가 레바스 카자린스키스(Levas Kazarinskis)가 설계한 길이 256.6m, 폭 16m, 높이 10.4m인 지금의 다리를 건설했다. 러시아군과 독일군 포로가 건설작업에 투입됐다.

2004년 안전점검을 거쳐 2005년 보완공사가 이뤄졌다. 교량 패널과 난간을 교체하고, 이전의 화강암 교량 레일을 복원하며, 일부 철골 구조물을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리프트로 교체했다. 무게 99톤의 소비에트 주철 난간을 교체하고 세운 새 난간의 무게는 30톤에 불과했다. 2008년 시의회는 오랜 논쟁 끝에 다리 이름을 알렉사타에서 비타우타스 대교로 변경하기로 했다.

비타우타스 대교를 건너는데 13일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260m도 안 되는 다리를 건너는데 13일이나 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막은 네무나스 강을 사이에 두고 카우나스 구 시가와 알렉사타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이 사용하는 달력이 달랐기 때문에 생긴 우스개였다. 그런데 네무나스 강을 국경으로 마주한 세력이 프로이센과 러시아, 폴란드와 러시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라고들 해서 헷갈리게 만들었다.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역법은 발트-슬라브 민족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1680년에 발견된 게디미나스 왕의 홀에 적힌 당시의 역법에 따르면 한 해는 12개월로 나뉘며 한 달의 길이는 29일에서 31일까지 다양했다. 1주는 9일이었다. 1월에서 12월까지의 이름도 다양한데, 새나 나무 이름을 비롯해 세속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에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했지만 158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하면서 그레고리오력을 채택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1800년 리투아니아를 합병하고는 율리우스력이 다시 표준이 됐다고 한다. 다만 네무나스 강 왼쪽의 리투아니아 민족 일부는 그레고리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있은 직후인 1918년 1월부터는 러시아 역시 그레고리오력을 따랐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그레고리오력을 사용하게 됐고, 지역 간 차이도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대로라면 네무나스 강을 두고 나라가 달라 역법에 차이가 있었다는 설명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보면 네무나스 강을 국경으로 삼았던 시기는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 벌어진 바르샤바 전투에서 러시아가 패퇴하면서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얻고, 폴란드가 빌니우스를 점령했던 1920년에서 1939년 사이다. 당시 독립 리투아니아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러시아가 1918년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했고,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는 그레고리력을 써왔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윤년을 두었는데, 율리우스력의 1년 길이는 365.25일이므로 천문학의 회귀년 365.2422일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어서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생긴다. 율리우스력의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1582년 10월 4일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세 번의 윤년)을 없애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반면 그레고리력의 1년 길이는 365.2425일이므로, 천문학의 회귀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고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 그리해 1582년 10월 4일(목) 다음날을 1582년 10월 15일(금)로 하기로 결정했다. 유럽국가들 가운데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국가들은 그레고리 역법이 제정된 1년 만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종교적 이유 때문에 개신교회 국가들은 18세기 전반까지, 정교회 국가들은 20세기 초까지도 기존의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다.

영국은 1752년 9월 2일 다음날을 9월 14일로,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 직후 1918년 1월 31일 다음날을 2월 14일로 표기해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20세기 초반 독립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와 네무나스 강 건너편의 알렉사타 사이에 날자가 13일 차이가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러시아가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리투아니아는 율리우스력을 고수했던 모양이다. 네무나스 강을 사이에 두고 카우나스와 알렉사타가 13일이나 차이가 나는 역법을 각각 사용하게 된 것은 1800년부터인데, 최근 리투아니아가 독립하고 네무나스 강 건너편을 폴란드가 점령하면서 그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 모양이다.

비타우타스 대교를 건너 알렉사타까지 갔다가 다시 시청광장으로 돌아왔다. 시청광장의 서쪽 끝, 길 건너에는 리투아니아 역사박물관이 있지만, 들어가 구경할 시간여유는 없었다. 역사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카우나스 대성당(Kauno šv. Petro ir Pauliaus arkikatedra bazilika)으로 갔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에게 헌정된 로마 가톨릭교회이며, 리투아니아 최초의 고딕양식 교회다. 

1413년에 언급돼있지만 건축된 정확한 시기는 분명치 않다. 비타우타스 대왕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다만 15세기에 시작된 건축은 도시의 귀족과 주민들의 기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1650년에 이르러서야 대규모 종탑을 비롯한 주요 건설작업이 완료됐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의 건물이 됐다. 

1655년에는 목조 구조물과 실내 장식이 불타버렸고, 1671년에 재건됐다. 1732년의 도시 화재로 교회의 지붕이 불타고 노회의 금고가 무너졌다. 재건은 1775년에야 완료됐는데, 이때 바로크 양식을 적용했다. 1800년 파괴와 1812년의 약탈을 거치면서 교회는 황폐해졌고, 1887년에 들어서야 재건이 시작됐다. 

113m 높이의 전면 탑 2개는 이때 건설됐다. 1879~1884년 사이에 합창단석을 확대하고 오르간 장인 주오자포 라다비치우스(Juozapo Radavičiaus)의 오르간을 설치했다. 바로크 양식으로 된 7개의 제단과 강단은 1775~1784년에 사이에 사카루리아이(Skaruliai) 출신의 건축가 카로리스(Karolis)와 조각가 토마스 포드가이스키스(Tomas Podgaiskis)가 제작한 것이다. 

특히 십자가와 사도들의 조각상이 있는 대제단이 귀중하다. 교회 안에는 귀중한 예술품들이 많이 소장돼있다. 가장 오래된 그림은 16~17세기에 제작된 ‘영혼의 성모(Sopulingosios Dievo Motinos)’다. 동정녀 마리아의 가정 제단에 있는 그림 ‘축복된 성모 마리아의 승천(Mergelės Marijos Ėmimo į dangų)’은 얀 고타드 버치호프(Jan Gothard Berchhoff)가 1686년에 그린 것이다.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으로 가는 길에 옛시청 뒤편에 있는 마이로니스 리투아니아 문학박물관을 구경하다. 시루티스의 집(Siručio namas) 혹은 마이로니스의 집(Maironio namas)이라고 하는 리투아니아 바로크 양식의 이 건물은 1742년 카우나스 법원의 장로가 지었는데, 훗날 리투아니아 최고재판소 소장을 지낸 시모나스 시루티스 (Simonas Sirutis, 1698~1774년)가 소유하게 됐다. 

시루티스 사후에는 병원, 감옥, 군대의 요새, 막사 등으로 사용되던 것을 1910년 시인 조나스 마쿨리스-마이로니스(Jonas Mačiulis-Maironis)가 구입해 살았다. 1922년 마이로니스는 카우나스 신학교에 저택을 기증했다. 1936년 6월 28일  문학박물관이 설립됐고, 1941~1955년까지 마이로니스 문학 박물관으로 운영됐다. 8개의 방 가운데 3개의 방에는 마이로니스 기념관이 설치됐다.

가톨릭 사제이자 교육가이기도 한 마이로니스는 가장 유명한 리투아니아 시인 가운데 한 명이다. 리투아니아 라세이니아이(Raseiniai) 지방의 파산드라비스(Pasandravys)에서 태어나 키에프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1년 동안 공부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리투아니아 국가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는 리투아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고 지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봄의 목소리(Pavasario Balsai)’라는 유명한 시집이 있다. “네무나스(Nemunas)는 강한 휴식처로 흐른다 / 그리고 우리의 토착 토양에 물을 줍니다. / 우리 동생의 혀에 있는 Birute의 노래 / 농군(Ploughman)의 수고를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 우리 강이 영원한 가닥을 건너감에 따라 / 우리의 노래도 모든 땅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라고 시작하는 그의 시 ‘리투아니아’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시는 민족적이며 애국적이다.

카우나스 옛 시청의 오른쪽 뒤편으로는 카우나스 사제 신학교(Kauno kunigų seminarija)가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로마 가톨릭 신학교이다. 학교의 역사는 162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타니스와프 키슈카(Stanisław Kiszka) 주교가 바르니아(Varniai)에 신학교를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1628년 신학교를 크라지아이(Kražiai)로 옮겨 예수회 크라지아 대학 건물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1745년 안토니 도미니크 티슈키비츠(Antoni Dominik Tyszkiewicz)주교는 신학교를 다시 바르니아로 다시 옮겼다. 1863년 1월 봉기가 있은 뒤, 모티에주 발랑치우스(Motiejus Valančius) 주교는 1864년 신학교를 바르니아에서 카우나스로 옮겼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병원으로 개조됐다.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의해 통합된 뒤 리투아니아의 다른 모든 사제 신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카우나스 신학교는 학생 수를 줄여갔고, 많은 사제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됐다. 1990년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후, 신학교는 복원된 옛 건물들을 다시 인수했다. 신학교 남쪽 담 자락에 서있는 동상은 교육자, 작가, 역사가이자 냉정한 운동 조직가인 모티에주 카지메에라스 발랑치우스(Motiejus Kazimieras Valančius)주교이다. 그는 1920년대 리투아니아의 예술적 산문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아홉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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