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한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1-10 01:11:28
- + 인쇄

라트비아(Lativia)의 공식명칭은 라트비아 공화국이다. 라트비아어로는 라트비야스 레푸블리카(Latvijas Republika)이며 약칭은 라트비야(Latvija)이다. 라트비야라는 나라이름은 고대 인도유럽어계의 발트족 가운데 하나인 라트갈리안(Latgalians)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라트갈리안들은 오늘날의 라트비안과 핀란드 리보니안(Livonians)으로 갈라졌다. 

북쪽으로는 에스토니아, 동쪽으로는 러시아, 남동쪽으로는 벨로루시, 남쪽으로는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이루고 북서쪽은 발트해와 연한다. 영토면적은 6만4589㎢이며 수도는 리가(Riga)다. 4계절이 뚜렷하고 비교적 온화한 기후대에 속한다. 2018년의 추정인구는 191만9968명이다. 

인구 구성을 보면, 라트비아 인 62.2%, 러시아인 25.2%, 벨로루시인 3.2%, 우크라이나인 2.2% 폴란드인 2.1%, 리투아니아인 1.2% 등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2019년 기준 추정치로 1만8522달러이다. 하지만 구매력지수(PPP)에 따른 일인당 국민소득은 같은 기간 3만1490달러이다.

기원전 3000년 무렵, 발트인의 선조들이 발트해 동쪽해안에 정착했다. 이들은 로마와 비잔티움으로 가는 무역로를 개척하고 발트연안에서 나는 호박 등 귀금속을 거래했다. 서기 900년에 이르렀을 때 라트비아에는 쿠로니안, 라트갈리안, 셀로니안, 세미갈리안 등 발트부족이 살았다. 12세기 무렵 라트비아에는 모두 14개 부족국가가 흩어져 있었지만 통일왕국을 성립하지는 못했다.

교황청은 사제를 파견해 선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193년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는 북유럽의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파견된 독일의 튜턴기사단은 결국 무력을 사용해 발트연안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갔다. 13세기 초 무렵, 오늘날 라트비아의 상당한 지역과 에스토니아 남부를 포함해 테라 마리아나(Terra Mariana) 혹은 리보니아(Livonia)라고 알려진 십자군 국가를 이뤘다. 

1282년에는 리가를 비롯한 몇 개의 도시가 한자동맹의 일원이 됐다. 리가는 동서무역의 중심이 됐다. 러시아가 리보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1558~1583년)을 일으켰을 때 폴란드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참전을 시작으로 덴마크-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웨덴 왕국까지 개입해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했다. 

전쟁 중에 튜턴기사단은 리보니아를 리투아니아의 보호령으로 양도했고, 1561년 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는 리보니아 공국과 쿠를란트(Courland) 공국이 성립했다. 1600~1629년 사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이 이 지역의 지배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스웨덴은 1621년 리가를 점령했고, 1629년에는 리보니아 공국을 차지할 수 있었다. 반면 쿠를란트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속하면서 독립을 유지했다. 

1700~1721년 사이에 벌어진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북방전쟁의 결과, 리보니아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됐고, 쿠를란트 공국 역시 1795년의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예카프스 케틀레르스(Jekabs Ketlers) 공작이 지배하던 시대(1642~1682)에는 쿠를란트 공국의 선단이 대서양을 누볐으며, 서인도제도의 토바고와 아프리카의 감비아에 해외식민지를 만들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40년 6월 중순, 소련은 발트 3국에 군대를 투입해 점령했다. 소련군이 점령한 가운데 실시된 선거로 구성된 의회는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의결했다. 소련의 승인을 얻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됐다. 라트비아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 

5시40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도착했다. 리가는 한자동맹의 일원이던 시절 북유럽의 동서무역의 요지였다. 구도심에서 버스를 내려 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아담한 크기의 광장에 들어서면 검은 머리의 집(Melngalvju nams)이 눈길을 끈다. 

검은머리 형제단이라는 길드가 소유했던 건물이다. 검은머리 형제단은 13세기 후반 게오르기우스 성인 형제단에서 분리해 나왔다. 시민권을 가지지 않고 리가에 살았던 미혼의 외국 상인들로 구성됐는데, 이들은 발트해 연안의 탈린, 리가, 페르누, 타르투 등지에서 상업 활동을 했다. 

특히 정치적 요구를 하는 행사를 개최하곤 했다. 1446년에 정한 규칙이 보존돼 있는데, 지금도 독일의 브레멘에 여전히 기반을 두고 있고 회원들은 규칙을 따르고 있다. 창설 당시에는 게오르기우스(Georgius) 성인이 수호성인이었는데, 뒤에 마우리티우스(Mauritius) 성인으로 바뀌었다. 게오르기우스 성인 형제단과의 차별화도 하고, 마우리티우스 성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수호성인이었기 때문일까? 

조지 성인이라고도 하는 성 게오르기우스(? ~ 303년 4월 23일)는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다. 지금의 터키 카파도키아 출신인 성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근위병이었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들은 상충되는 바가 많다. 기사와 전사의 수호신인 성인은 흔히 백마를 타고 칼이나 창으로 용을 찌르는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11세기에서 12세기 초에 카파도키아에서 처음 시작돼 리비아로 전해진 게오르기우스 성인과 용의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시를 파괴하는 용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공물로 바치는 곳에 나타난 성인이 마침 공물로 뽑힌 공주를 대신해 용과 싸워 죽였다는 것이다. 왕은 답례로 많은 보물을 줬는데, 성인은 이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다는 것이고, 감격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됐다고 한다. 

마우리티우스 성인은 모리스(Maurice) 성인이라고도 하는데, 서기 250년 이집트의 테베에서 태어났다. 로마군에 들어간 그는 테베군단의 사령관에 이르렀다. 그의 영향으로 테베군단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구성됐다. 로마제국 말기에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bagaudae)을 토벌하라는 막시미안(Maximian) 황제의 명령에 따라 테베군단이 차출됐다. 

출병에 앞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를 올리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테베군단은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발레주에 있는 생 모리스(Saint-Maurice) 지역이다]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에도 따르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테베군단을 전부 처형하고 말았다. 494년에 사망한 리옹의 주교 유체리우스(Eucherius)가 이들의 죽음을 기록했다. 

마우리티우스 성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수호신이 됐다. 92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1세는 마우리티우스 성인의 창과 칼, 박차를 얻는 대가로 현재 스위스의 아르가우(Aargau) 주를 수도원에 양도했다. 이 유물들은 1916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 대관식에 사용됐다.

리가의 검은머리의 집을 다녀온 사람들이 마우리티우스 성인을 무어(Moore)인이라고 적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무어인은 이슬람교도로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르는 용어다. 아라비아반도를 지배하던 우마이야왕조가 아바스왕조에 몰락했을 때, 우마이야왕조의 후예는 화를 피하기 위해 멀리 아프리카의 북서쪽 마그레브까지 도망쳤다. 

이들은 마그레브의 베르베르족으로 구성한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 후기 우마이야왕조를 열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아랍인들과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사이에 태어난 후예들이 무어인이다. ‘무어’라는 용어는 ‘검다’, ‘아주 어둡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마우로(Μαύρο)에서 유래했다.

1911년 발간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무어’라는 용어는 실제 민족학적 가치가 없다고 적었다. 유럽사회에서는 무어인이라는 단어는 그저 검은 피부를 지닌 사람 따위로 막연하게 인식됐다. 특히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에 사는 무슬림, 특히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을 구분하지 않고 광범위하면서도 다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다. 

리가에 있는 검은 머리의 집은 1334년에 ‘대형 길드의 새로운 집’이라고 처음 언급됐다. 높이가 27m에 이르는 가파른 지붕이 있는 고딕 양식의 주택이다. 주택 외벽과 박공을 장식한 매너리즘 양식의 주요 조각과 장식품들은 네덜란드의 플랑드르에 있는 길드 주택을 참고한 것으로 17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검은머리 형제단은 1447년 이 건물 위쪽에 있는 퍼레이드 홀을 빌어 입주했다. ‘검은머리의 집’이라는 이름은 1687년에 처음 등장했지만, 이 건물은 1713년이 돼서야 형제단의 소유가 됐다. 건물 전면의 화려한 장식을 맨 위로부터 살펴보면, 꼭대기에 있는 풍향계는 금박을 입힌 창을 들어 용을 찌르는 게오르기우스 성인을 조각한 것이다. 

원본은 1622년 리가의 은세공 장인 에버하르트 마이어(Eberhart Meier)이 제작했다. 박공 중앙에는 홀과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아더왕의 부조가 있다. 박공 아래 돌림띠에는 ‘ANNO 1334 renov. ANNO 1999’라고 적혀있는데, 앞에는 건축연도를 뒤에는 재건축연도를 나타낸다. 

처음 세워졌던 건물은 1941년 6월 28일 독일인들이 폭파했고, 1948년에는 소련이 유물을  철거했다. 현재의 건물은 1996~1999년 사이에 재건됐기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리가 시와 검은머리 형제단 사이에 맺은 협약이 지켜진 것이다. 협약의 내용은 “Ja man kādreiz sagrūt būs, mani atkal celiet jūs!(내가 한번 무너지면 나를 재건해야한다!)”다.

돌림띠의 양 끝 위에는 각각 리가의 문장(紋章)과 상징인 교차된 열쇠를 새긴 방패를 들고 있는 용병의 석상을 세웠다. 16세기에 뤼베크(Lübeck)에서 제작된 원본을 복제한 것이다. 돌림띠 아래로 천문시계가 걸려있다. 1626년에 시계장인 마티스(Matis)가 제작한 것이다. 만세력(Calendarium perpetuum)을 적용한 것으로 달의 위상, 황도 12궁의 표시, 시간 이외에도 날짜와 요일이 표시된다. 지금 걸려있는 것은 레겐스부르크에서 만든 복제품이다. 

천문시계 아래로 4개의 기다란 홈이 있는데, 각각에는 네 도시의 문장과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조각상이 들어있다. 왼쪽으로부터 리가의 문장과 바다의 신인 넵투누스(Neptunus), 브레멘의 문장과 조화의 여신 콘코르디아(Concordia), 뤼베크의 문장과 평화의 여신 팍스(Pax), 함부르크의 문장과 상업과 이익 추구, 교역의 신 메르쿠리우스(Mercurius) 등 이다. 

문장이 새겨진 높이의 양끝에는 각각 리가의 문장과 검은 머리 형제단의 표지를 든 사자들을 세웠는데 16세기 무렵 뤼베크(Lübeck)에서 제작된 원본을 바탕으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정면에 있는 입구에는 양쪽에 4각 기둥을 세웠다. 왼쪽 기둥은 아래에서부터 성모마리아상을 부조로 새겼고, 그 위로 리가의 문장을 새겼으며, 기둥 위쪽에는 검은머리를 부조한 방패를 움켜쥔 사자상을 세웠다. 

오른쪽 기둥에는 아래에서부터 마우리티우스 성인을 부조로 새겼고, 검은머리 형제단의 문장을 새겼으며 기둥 위에는 리가의 상징인 교차된 열쇠를 부조한 방패를 움켜쥔 사자상을 세웠다. 마우리티우스 성인의 오른쪽에 3개의 아치가 있는데 아치의 사이 공간에 왼쪽으로는 타르투의 문장을 오른쪽에는 탈린의 문장을 새겼다. 3번째 아치 옆의 모퉁이를 이루는 기둥 위에 세워진 석상은 용과 싸우는 게오르기우스 성인의 동상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한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