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목숨 바쳐 유배인 조정철을 사랑한 홍윤애

기사승인 2020-01-18 00:00:00
- + 인쇄
“설 연휴 때 제주도에서 4일을 지내려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그렇게 시작한 그와의 전화통화가 40분 넘게 이어졌다. 3박4일 여행이라면 함덕은 최고의 여행지다. 공항에서 30분 이내에 올 수 있고 숙소 역시 호텔, 리조트, 펜션, 민박 등 다양하다. 무엇보다 제주도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다.
제주의 숲을 알고 싶다면 선흘의 동백동산 숲길이 안성맞춤이고, 잘 가꾸어진 삼나무 숲속을 산책하고 싶다면 절물자연휴양림이 제격이다. 발에 흙 묻히지 않고 울창한 숲길 걷기를 원한다면 사려니숲길이 멀지 않다.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천여 그루의 거대한 비자나무 사이를 걸으면 겸손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힘들이지 않고 산책하듯 오를 수 있는 용눈이오름 능선에서는 제주의 멋진 풍경을 눈에 담고 가슴에 품을 수 있다. 백약이오름 역시 어렵지 않게 올라 아기자기한 분화구와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걷기에 자신 있다면 다랑쉬오름에 다가서며 그 당당한 모습을 보고 능선에 올라 백록담과 견줄 수 있는 웅장한 분화구와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어디 숲길과 오름뿐이랴. 함덕 해변을 벗어나 동쪽 해변 길을 가면 김녕, 월정리, 행원리, 평대리,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를 지나 성산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해변의 모양과 아름다운 바다색에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사무실 소파에서 잠을 자기 시작한 지 21일째 되는 날 어머니가 누워있는 중환자실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오전 중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길 예정이란다. 순간 임종을 준비하라는 뜻인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그간 마음 졸였을 가족들과 일가친척들, 친구들에게 어머니 소식을 알렸다. 
부랴부랴 간병인을 고용하고 일반 병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어머닌 중환자실을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의식은 없는 듯했다. 이젠 그간 짊어지고 있었던 세상의 모든 걱정을 다 내려놓고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곧 깨어날 것이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간병인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는 다시 사무실로 올라왔다.
점심시간에 다시 병실에 내려갔는데 어머니가 침대 등받이에 기대 앉아 빙긋 웃으며 나를 맞았다. 어머니 얼굴이 본래 이렇게 예뻤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다가가는데 어머닌 입만 벙긋벙긋한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생각이 소리가 되지 못한다. 간병인이 말을 거들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서툴지만 곧 말을 하게 될 것이란다. 뇌졸중 환자 간병을 오래 했다는 그이의 말을 믿었다. 다시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하니 알아듣고 어서 가라고 왼손을 내 젓는다.
조금 더 일찍 가보고자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해를 넘겼다. 제주국립박물관에서 지난 해 11월 26일부터 올 3월 1일까지 제주에 유배된 이들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회를 열고 있다.

조선의 9대 왕 성종 때에 지방에서 은거하며 유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치 이념을 앞세운 권력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오지로 유배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도 치열한 권력다툼은 계속되어 숙종 때에는 대 유학자 우암 송시열이 제주에 유배되었었고,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증손, 추사 김정희도 유배를 피하지 못했다. 이들보다 훨씬 앞서 인조 때에는 반정으로 왕위에서 밀려난 광해군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이는 260여 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제주국립박물관에서 기획한 ‘유배인 이야기’를 주제로 한 전시에서는 조정철이라는 인물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조정철은 정조시해모의사건과 관련해 29년의 유배생활을 했으며 이중 제주에서 26년을 살았다.
영조 시대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앞장섰던 인물 중 하나가 홍계희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홍계희의 아들인 홍지해와 손자 홍상범을 중심으로 정조 시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촌인 홍계능과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이 주동이 된 또 다른 시해모의가 발각되었다.

정조 시해모의를 조사하던 중 홍지해의 사위인 ‘조정철의 집에 홍상범의 여종이 드나들며 부인 홍 씨와 만났다’는 자백이 나온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조정철의 부인 홍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조정철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가 과거 급제한지 3년째 되던 27살 때였다. 충신이었던 증조부 조태채를 감안한 처결이었다.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 이어 조정철까지 3대에 걸쳐 4명이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니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조정철의 유배생활은 1777년부터 시작해 1807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절망의 나락에서 시작된 제주 유배생활마저 순탄하지는 않았다. 제주판관으로 부임했던 정래운이 개인적인 원한을 드러내며 도착한 날 함께 온 종을 잡아가두고 양식 얻는 것까지 방해해 굶주림을 걱정할 정도였다. 때로는 책 읽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고 큰비가 내리는 가운데 급박하게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이렇게 서러운 유배생활 중에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가 홍윤애다. 홍윤애는 향리 홍처훈의 딸이었는데 조정철이 제주 유배생활을 시작하고 3년이 되던 해인 1779년부터 그의 처소에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1781년에는 그의 딸을 낳았다. 이 시절 그가 지은 시 한 수가 홍윤애를 향한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待人人不至 (대인인부지) 기다리는 사람 오지 않고
孤月欲三更 (고월욕삼경) 외로운 달 삼경이 되려는데
負手虛庭立 (부수허정립) 뒷짐 지고 텅 빈 뜰에 서니  
松風不耐淸 (송풍불내청) 솔바람 맑기만 하여라
그러나 1781년 조정철 가문과는 할아버지 때부터 정적이었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며 이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제거하려 그의 죄상을 캐기 시작했다. 김시구는 홍윤애를 강제로 불러 조정철이 머물고 있는 집에 출입한 죄로 서까래와 같은 매로 70대를 때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져’ 죽었다. 딸을 낳은 지 두 달만이었다. 홍윤애의 죽음으로  조정철의 죄를 밝힐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김시구는 홍윤애의 죽음을 자살로 은폐하고 ‘제주도에서 유배인이 정조시해 음모를 꾸민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제주도로 어사를 파견해 조사하였지만 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조정철은 홍윤애가 죽은 이듬해인 1782년 1월 같은 제주 정의현으로 이배되어 9년을 살고,  1790년 9월 추자도로 이배되어 13년의 세월을 보냈다. 순조 즉위 후인 1803년에 내륙인 광양으로 옮겨졌다가, 1805년 3월에 구례로, 1807년 5월에 황해도 토산으로 이배되었다가 그해 석방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1811년에 제주목사 겸 전라방어사가 되어 1년 동안 제주에 부임했다.

그는 홍윤애의 묘를 찾아 무덤을 단장하고 ‘洪義女之墓 (홍의녀지묘)라 새긴 비석을 세웠다. 비석 뒷면엔 홍윤애와의 인연, 죽게 된 사연을 적고 7언 시 두 수를 적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을 위해 세워준 유일한 비문이다. 그는 또한 홍윤애가 낳은 자신의 딸 가족을 호적에 올려 돌보았다.
瘞玉埋香奄幾年 (예옥매향엄기년) 옥과 향 묻힌 지 오래 
誰將爾怨訴蒼旻 (수장이원소창민) 누구든 마땅히 그대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거늘
黃泉路邃歸何賴 (황천로수귀하뢰) 황천길 멀고먼데 누구를 의지하오
碧血藏深死亦綠 (벽혈장심사역록) 고이 간직한 뜨거운 피 죽으면 다시 만날까 
千古芳名蘅杜烈 (천고방명형두열) 아름다운 자매 이름 온 세상에 드높으니 
一門雙節弟兄賢 (일문쌍절제형현) 한 집안의 아우 언니 절개 높고 어질어
烏頭雙闕今難作 (오두쌍궐금난작) 지금 열녀문 세우기는 어려우나               
靑草應生馬鬣前 (청초응생마렵전) 무덤 앞엔 언제나 푸른 풀 무성하리
벚꽃거리로 유명한 제주시 전농로에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제주지역본부 앞에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그 옆엔 홍랑로가 있어 홍윤애를 기리고 있다. 1997년 양주 조씨 문중에서는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인 함녕재에 봉안했다고 한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