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정준호의 코미디 업데이트

기사승인 2020-01-18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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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정말 잘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식사라도 한 번 하시죠.” 남성이 휴대전화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그러나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하자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온다. 무자비한 테러범의 추격을 받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서도 직장인 특유의 업무용 너스레가 자연스럽다. 영화 ‘히트맨’ 속 국정원 비밀 프로젝트 방패연의 리더 천덕규(정준호)의 모습이다.

22일 개봉하는 ‘히트맨’은 국정원에서 도망쳐 웹툰 작가가 된 전직 암살요원 준(권상우)이 술김에 국가 기밀을 웹툰에 공개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배우 정준호는 이 작품에서 준을 ‘인간병기’로 길러낸 방패연 대장 천덕규로 분했다. 충남 예산 출신인 그가 뿜어내는 ‘충청도 바이브’는 이 영화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여유롭고 능글맞은 와중에도 어수룩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데뷔 26년차, 영화 ‘두사부일체’와 ‘가문의 영광’으로 2000년대 초반 한국 코미디 영화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배우. 그러나 최근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준호는 “현장에선 주로 후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편”이라고 했다. ‘나 때는 말이야~’라며 훈수를 둘 법도 한데, 오히려 “속도와 템포 면에선 우리(중년 배우들)가 상당히 뒤처지고 있다”고 성찰했다.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이건 정준호의 2020년 버전 ‘코미디 업데이트’다. 

“‘두사부일체’가 벌써 20년 가까이 됐어요.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슬랩스틱 코미디가 유행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영화의 흐름이) 굉장히 섬세하고 빠른데다가, 아이덴티티(정체성)가 없으면 관객들이 찾지 않습니다. 예전의 향수에 젖어있다 보면 요즘 호흡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요. 이런 눈높이에 맞추다보니까 감히 코미디로 실험하기가 어려운데, 그래서 오히려 검증되지 않은 코미디가 먹힐 수도 있다고 봐요. 그게 신선하니까.”

자신감만큼 중요한 게 배려의 미덕이다. 정준호는 ‘히트맨’을 찍을 당시 나서야 할 때와 참아야 할 때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차진 애드리브로 화면을 장악하는 후배들을 보면 ‘나도 뭔가 보여주리’ 욕심이 끓었지만, 그는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있는 듯 없는 듯 내 몫을 다하면, 결국 톱니끼리 맞아 들어 바퀴가 굴러가게 돼요.” 박수와 환호에만 익숙한 삶이었다면 이런 겸허함을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벌써 10년 넘게 사업체를 운영 중인 있는 그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연기자와 고객·클라이언트에게 질책도 받는 사업가를 넘나들면서 연기에 깊이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정준호는 코미디의 진정한 맛은 “웃음 속에서 묻어나오는 삶의 가치”에 있다고 믿는다. ‘히트맨’에 마음이 동한 것도 꿈과 가족을 위해 무모하리만큼 내달리는 준의 모습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정준호도 두 아이의 아빠다. 2011년 이하정 TV조선 앵커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다. 특히 작년 6월 태어난 둘째 딸이 자신의 생활패턴을 따라온다며 신통해 했다. 정준호가 인터뷰 내내 ‘가장’ ‘아버지’ 같은 단어를 강조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쿠키인터뷰] 정준호의 코미디 업데이트절친한 배우 신현준의 표현을 빌리면 ‘악수 중독’인데다 거절도 어려워 해 맡은 홍보대사만 100여개다. 선거철이 되면 ‘정준호가 정치를 한단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그의 월례 행사를 듣고 나니 그런 오해가 아주 무리는 아니지 싶었다. 정준호는 한 달에 1~2번씩 배낭을 메고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에 들른다. 지갑에 현금을 가득 챙겨 “할머니가 파시는 양말 스무 켤레”나 “할아버지가 파시는 깐 군밤” 같은 것들을 산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혹여 생길지 모르는 자만함의 뿌리를 자르고, 그들의 생활을 연기에 녹이기도 한다. 지역 맛집을 찾아가면 주방에까지 들어가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사진도 찍는다. 정준호의 ‘찾아가는 팬서비스’다.

“제가 잠깐 인사드리고 사진 찍어드리는 일이 그분들에겐 종일 기분 좋은 이벤트가 될 수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행복이라는 게 큰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이들 잘 자라는 거, 가족 모두 건강하고 친구와 지인들도 무탈한 거… 제겐 전부 행복이에요. 가까운 사람들과 작은 데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게 가장 큰 행운이라는 걸, 나이 오십이 다 돼서야 느낍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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