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당(耕雲堂)에서] 임명진 에세이(1) 일곱 번째 아홉 수를 맞으며

입력 2020-01-19 23: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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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임명진 전북대 명예교수

◆ 엊그제 아침 나절, 방미산(尨尾山) 능선 위에서 비쳐든 겨울 햇살이, 내가 오 년 째 살고 있는 이 시골 흙집 창살을 넘어 안방을 따스하게 덥히고 있는 중이었다. 루키(필자의 딸이 대학 졸업 후 독립하면서 어린 강아지를 분양 받아 칠년 동안 키우다가 오년 전 결혼을 앞두고 친정인 우리 집에 맡긴 반려견 이름)가 갑자기 짖어댔다. 매우 다급하고 큰 소리로 컹컹대는 것으로 보아 필시 낯선 누군가가 내방한 것이라 생각되어 속히 문을 여니 마을 이장이 마루 밑 토방에 서 있었다. 
“집에 계셨구먼요?”
“아이쿠! 이장님이 어쩐 일로 손수……?”
“금년 치 목욕권이 나왔고만요.”
이장은 소형 편지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받는 사람은 임 아무개요 보내는 사람은 ‘임실군 관촌면장’이었다. 
재작년부터 이런 식으로 ‘목욕권’(전북 임실군에서는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관내 목욕탕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목욕권’을 신년 초에 적당량 배분함. 다른 시·군에서도 그러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음)을 받아왔으니 이제 세 번째인 셈이다.
시중의 일반 편지 봉투와 크기는 같지만 가장자리에 파란 색 줄무늬가 빙 둘려져 있는 ‘관용’ 봉투를 헤집어 내용물(십여 장의 목욕권)을 꺼내다 보니 몇 가닥 상념이 떠올랐다. ‘역시 나도 국가가 노인으로 인정할 만큼 나이를 먹은 게야!’ ‘노인 때를 잘 씻어내라고 목욕권을 주나? 나이 들수록 체취가 좋지 않을 테니 자주 씻으라는 배려는 고마울지언정 탓할 일은 아닌 거야’ 이런 생각들을 작년·재작년 연초에도 했었던 것 같다. 이에 이어 ‘아 이제 나이 한 살 더 먹어 또 아홉 수에 이르렀구나!’란 또 다른 상념이 일었다.
그렇다. 나는 올해로 일곱 번째 아홉수를 만나고 있다. 해가 바뀌고 보름이 지나가고 정부가 하사한(?) 노인목욕권을 받고서야 비로소 내 나이가 예순아홉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 ‘아홉수를 잘 넘겨야한다’는 속설(俗說)이 있다. 나이가 아홉·열아홉·스물아홉……에 이르면 건강도 조심하고, 결혼도 삼갈 것이며, 큰 사업도 벌리지 말라는 등등……. 
하지만 속설인 만치 철석같이 믿을 일은 아니다. 굳이 아홉수에만 좋지 않을 일이 일어난다는 합리적 근거는 희박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부터 있어온 속설을 그냥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처신할 일도 아니다. 사려 깊게 성찰하고, 매사에 조심하고, 처신에 신중해서 나쁠 일은 없으되, 그 반대로 행동해서 큰 낭패를 보는 경우는 많을 테니까.
나의 경우, 내 자신의 처신과 별 관계없이 아홉수를 호되게 보낸 경험이 있다. 나는 전북 동부 산간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 가까운 산촌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보냈다. 첫 아홉 수였던 1960년, 국가는 4.19 혁명으로 격변의 시기를 맞을 때 나는 장티푸스(당시 전라도 사투리로 ‘옘병’)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해 초가을 정신이 들어보니 여름 한 철 내내 고열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족들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그해 추석 무렵 겨우 운신과 거동을 할 수 있었고, 학교는 10월이 넘어서 근 넉 달 만에 등교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날 가장 아끼던 할머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은 “옘병할 놈우 옘병! 징그럽다. 아이고! 우리 장손, 아홉 수 땜시 이 고상을 한겨. 초벌로 액땜 지대로 했응께 담에는 갠찮을끼구만”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소년시절 이른바 ‘옘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 일은 아닐지라도 신산한 산촌의 ‘가난병’으로 여겨져 남들에게 그 사실을 가급적 말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인데, 전북 동부 산간 지역에서 1950년대 초 빨치산활동을 했던 임방규(1932~ )의 자서전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자서전』을 최근에 읽고서, 당시 토벌대가 세균전의 일환으로 전북 산간 빨치산 거점 여기저기에 장티푸스 균을 산포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내가 앓은 장티푸스도 ‘가난병’이라기보다는 토벌대 세균전의 여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음.) 
그 이후에는 아홉수만 닥치면 조심·근신하였다. 그래선지, 할머님의 간절한 기원 덕분인지 그 후부터는 그 정도의 혹독한 아홉수는 치르지 않았던 같다. 
◆ 누에는 알에서 깨어나 번데기가 되기까지 네 번 허물을 벗는단다. 며칠 간 뽕잎을 먹다가 하루나 이틀 동안 잠을 자면서 허물을 벗게 되면 몸집이 부쩍 커지는데, 그런 탈바꿈의 과정을 다섯 번(알에서 깨어난 것 포함)이나 거치고서야 비로소 익은 누에가 되어 고치를 지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도 누에와 같은 탈바꿈은 아닐지라도 어떤 매듭 비슷한 단계를 거친다고 보고 싶다. 일생 동안 육체적·정신적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단계의 임계점에 이르면 그 경계를 벗어나거나 넘어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발이 커지면 신발 치수를 높여야 하는 이치와 무엇이 다르랴? 이와 관련해서 아홉수란,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10년 단위로 어떤 단계를 거치기 마련인데, 그런 단계를 넘어 새로운 과정에 진입하는 경계(境界)와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즉 유년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오르는 사다리이기도 하고, 청년 이후에는 사회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더 큰 방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건너야 할 문지방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아홉수를 조심하라는 것을 그런 새로운 단계로 오를 때, 더 큰 방으로 건너갈 때 더욱 조심하라는 의미를 담은 셈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 번의 경계를 만나기 마련이고 그럴 때 신중하게 조심하여 그 경계를 넘어서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말인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단계로 경계를 넘는 일, 더 큰 방으로 문지방을 건너는 일은 비단 사람 개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싶다. 가정사도 그렇고 회사일도 그러하며, 나아가 국가의 대사도 그러할 것이다. 사람이 모여 이룬 사회라면, 그것이 가정이든 학교든 회사든 국가든, 그 구성원인 사람들의 의식(意識)과 행위들의 총화가 그 사회의 정체성이나 가치를 판가름할 테니까.
보통 한 국가의 역사를 기술할 때 10년 단위로 정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그 십 년의 단위가 나라의 변화상을 구분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한 결과로 해석된다.(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현대사를 언급할 때 자주 사용하는 70년대니 80년대니 하고 낯익을 표현들도 결국은 역사 전개 과정을 10년 단위로 분절해서 이해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광복 후 한국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10년 단위로 큰 변화들이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1950년대 전쟁과 그 상처 치유, 1960년대 군사독재 강화, 1970년대 자본주의 산업화의 가속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취, 1990년대 신자유주의 공고화, 2000년대 남북관계 개선 등). 사람이 몇 번의 아홉수를 거치는 동안 육체적·정신적 변화를 겪듯이 우리나라도 지난 70여년 동안 매우 급변하는 역사적 변전을 거쳐 왔고 이제 2020년대를 맞고 있다.  
◆ 나는 올 한 해 일곱 번째 아홉수를 맞아 여느 해보다 근신·조심하면서 살고자 한다.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당부해서 19세 이후 큰 탈 없이 넘겨온 지난 다섯 번의 아홉수처럼 무난하게 금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을 이 정초에 가져본다. 그러면서 이런 내 개인적인 소망을 넘어서, 2020년대가 열리는 올해 우리나라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경계를 잘 넘어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나라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일도 다방면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나의 판단으로는 주변 강대국의 휘둘림에 크게 요동치지 않는 일이 그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지난해 일본의 ‘수출 제한 압박’에 의연히 대처한 것처럼, 어느 강대국이 어떠한 일로 우리를 압박할지라도 우리의 국가정체성과 민족적 자존심을 구심점으로 삼아 온 국민이 합심하면 그 압박을 벗어날 수 있다. 
문제는 강대국의 압박을 정파적·개인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잖다는 점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의 질곡도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더욱 깊어졌었다는 점을  환기하자. 19세기 후반 이후 주변 강대국들이 우리의 국가정체성과 민족 자존심을 얼마나 훼손해왔는지 다시금 각성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각성이 선행되어야 ‘정파적·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을 수 있다. 
◆ 금년부터는 외세에 빌붙는 사람들이 대폭 줄어들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들의 정치력이 소멸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녕 바라건대. 그리하여 이 한반도 어디서든지 시위현장에서 강대국의 국기가 펄럭거리는 꼴불견이 제발 사라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20.01.18.)
(필자는 문학평론가다.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회 회장과 전북작가회의 회장을 지냈다. 고향에서 구름을 벗 삼아 밭을 갈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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